277화. 콩깍지를 벗겨라 (2)
“그럼 쟈빌론 씨?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이제부터 나 건드리면, 저 리한 군의관이 죽는다아?”
“……!”
가슴이 철렁.
눈앞이 캄캄.
쟈빌론은 암담한 심정을 느꼈다. 동시에 절박하고도 다급한 맥박이 머릿속을 온통 움켜쥐었다.
‘안 돼!’
리한 군의관이 죽는다니.
그건 안 된다.
그를 찾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였던가. 얼마나 되찾고 싶었던가. 평생 주치의로 삼아 곁에 붙잡아두고 싶었다. 오직 그것만이 최선의 목표였다. 그래야 두통에 시달리지 않을 테니까. 끔찍한 고통에서 해방되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자신의 두통을 해결해 줄 유일한 존재인 리한 군의관이 죽는다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다시는 곁에 잡아둘 수 없게 되어 버린다면?
“…….”
거대한 상실감.
아득한 절망감.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위기감이 쟈빌론의 뒤통수에 소름을 돋게 하였다. 그의 대답이 다급해졌다.
“허, 헛소리! 리한 군의관을 털끝 하나라도 다치게 하면…… 황태자 그대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게 될 것이야!”
“그럼 리한 군의관이 죽는데?”
“……!”
“말했잖아, 쟈빌론 씨. 나 건드리면 리한 군의관이 죽는다고. 이거 장난 같아? 난 아닌데?”
더욱 흔들리는 쟈빌론의 눈동자.
그걸 빤히 쳐다보며 라키엘이 외쳤다.
“데미안!”
그의 외침은 그리 크진 않았다. 하지만 데미안의 날카로운 청각에 닿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놈의 귓불을 잘라!”
“……!”
쟈빌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와 동시에, 데미안의 검이 일언반구의 반문조차 없이 즉시 움직였다.
스핏!
“그읏!”
데미안의 롱소드가 가볍게 움직인 직후, 아난샤의 오른쪽 귓불 아랫부분이 0.5센티 가량 예리하게 잘려나갔다. 저릿한 통증. 흘러나온 피가 삽시간에 목덜미와 셔츠 깃을 검붉게 물들였다.
쟈빌론을 돌아보는 라키엘의 눈초리가 의미심장해졌다.
“봤지?”
“무슨…….”
“나를 벨 건가?”
“…….”
“명심해. 다음 차례는 목이야.”
“이러고도, 그대는 무사하길 바라나, 황태자?”
“누가 무사할지는 조금 더 지켜보면 알겠지?”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역시나 쟈빌론 이 인간, 이쪽을 전혀 알아보질 못한다. 이쪽을 수중에 붙잡아두고 있으면서도 엉뚱한 놈을 향해 ‘리한 군의관!’을 외치는 모습이라니.
생각할수록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쪽이 리한 군의관이라고 호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지만 뭐 어쨌건, 나이스 데미안.’
데미안이 신속하게 움직여 준 덕분이다. 말 그대로 전광석화. 쟈빌론이 제대로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서 흑마법사를 제압해 준 덕에 이쪽이 칼자루를 쥐게 됐다.
라키엘은 주위의 상황을 스윽 훑어보았다.
다들 이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걸까.
근위대 병력 일부가 데미안과 흑마법사 쪽으로 우르르 달려가고 있었다. 대광장의 포위망 또한 한층 견고해졌다. 좋다. 이제는 저 흑마법사도, 쟈빌론도 자력으로는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시나리오 한번 돌려보자고.’
재빠른 상황 파악.
더욱 재빠른 즉석 작전 수립.
라키엘의 대뇌피질이 뽕 맞은 슈퍼카 12기통 자연흡기 엔진처럼 격렬하고도 거칠게 부아아앙 돌아갔다. 떠오르는 예상 시나리오와 대응법, 추후의 사건 전개까지. 잠깐 사이에 몇 가지의 가능성과 결과를 떠올리고, 계산했다.
그리고 최적의 작전을 뽑아냈다.
‘작전을 뽑았으면, 곧바로 실행.’
……촵촵촵!
그의 혓바닥이 찰진 엡실론-델타 논법의 현란한 기하학적 그래프를 그리며 입술 가득 침을 촵촵 발랐다. 그리고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황제를 향해 외쳤다.
“황제 폐하! 저, 마젠타노의 적법한 후계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폐하께 드릴 청이 있사옵니다!”
낭랑하게 울려 퍼진 외침.
그 외침에 모두가 자신의 달팽이관을 확인하고 싶어지는 충동을 느꼈다. 대뇌피질 전두엽을 땅 때리는 의문과 함께였다.
‘폐하께? 청을? 지금?’
시성식장에 난입한 괴한에게 붙잡혀 인질이 된 황태자. 그런데 인질극의 진짜 흉수 또한 황태자의 호위에게 붙잡혔다. 서로가 인질이 되어 대치하게 된 상황.
그런데 황태자는, 이런 상황에서 황제에게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일까. 대체 무슨 꿍꿍이를 품은 것일까.
광장의 모든 이가 의문을 느끼는 가운데, 라키엘의 외침이 이어졌다.
“가능하시다면, 미천한 저를 위하여 약조를 하여주시옵소서!”
“…….”
황제는 미간에 주름을 그려내었다.
사실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빠르게 심장이 뛰고 있던 황제였다. 아까 이미 가슴이 철렁했다. 손바닥 가득 진땀이 흥건히 배어났다. 소중한 장남에게 행여나 흉한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서. 차라리 자신이 대신 인질이 되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럼에도 그는 황제였다.
아들을 위협당하는 아비이기 이전에, 만인의 위에 군림하는 자로서 함부로 당황하는 모습을 내보일 수가 없었다. 특히, 지금은 더욱 그러하였다. 자칫 제국과 황실의 위신이 추락할 수도 있는 지금과 같은 순간에는 더더욱.
“……황태자는 생각하는 바를 고하도록 하여라.”
그는 아들의 안위를 묻고픈 외침을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대신 궁정 마법사에게 눈짓하여 음성 확장 마법을 지시하였고, 그 후에야 마법의 힘을 빌려 침착한 목소리로 응답하였다.
라키엘이 외쳤다.
“실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여 감히 고하노니, 이제부터! 저 납치범 일당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공격도 하지 않겠노라는 폐하의 약조가 필요하옵니다!”
“……뭐?”
이번에는 황제도 당혹감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였다.
“무슨 뜻인지 더욱 상세히 고하라.”
“예, 폐하! 이제부터 저는 저자와 인질 맞교환을 협상할 것이옵니다! 그렇기에 저자에게 믿음을 줄 약조가 필요하옵니다!”
“저자를 치지 않겠다는 약조 말이더냐?”
“그렇사옵니다, 폐하!”
“점이 약조를 통해 무엇을 걸면 되겠느냐?”
“황실의 명예와! 폐하의 신앙을 걸어주소서!”
“설마, 짐더러, 약조를 깨면 교단으로부터 파문을 당하라는 뜻이더냐?”
“정확하시옵니다, 폐하!”
“…….”
미친 거 아닐까. 혹시나 황태자가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다 보니 판단력이 많이 흐트러진 건 아닐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황제는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제법 먼 거리였지만, 이쪽을 쳐다보는 황태자의 눈빛이 보였다. 혼란과 당황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지극히 침착한 눈동자였다.
마치, 지금 상황을 모조리 지배하며 조율하려는 자의 눈빛 같은.
‘너는…….’
필시 무언가를 꾸미고 있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을 생각을 품고 있구나.
황제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러한 깨달음 덕분이었을 것이다.
“……좋다. 황태자의 뜻을 알겠노라.”
황제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서 짐이 약조하노니, 마젠타노 황가는 금일 황태자를 능욕한 일당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공격과 체포 시도도 행하지 아니하겠으며, 만약 이 약조를 어길 시에는 황가의 모든 명예를 내려놓고서 짐이 파문의 길을 걷겠도다. 또한, 지금 이 광장에 모인 모든 이가 이 약조의 증인이 될 것이니라.”
그의 선언이 마력의 힘을 타고서 광장 구석까지 중후하게 퍼졌다.
“……이제 되었느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라키엘이 힘차게 외쳤다.
동시에 웃음을 삼켰다.
됐다.
‘이걸로 작전 실행을 위한 세팅(?) 완료.’
뇌주름 구석구석 야물딱지게 잔머리가 팍팍 돌아가는 가운데, 라키엘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데미안에게 붙잡혀 있는 흑마법사가 보였다.
“어이.”
제법 먼 거리였지만, 황제와 대화할 때와는 달리 외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쟈빌론과 저놈의 청각이 공유되고 있을 테니까.
그는 쟈빌론을 무전기(?) 삼아서 흑마법사에게 말을 걸었다.
“들리지? 들리면 고개 들어봐.”
“…….”
귓불을 잃은 통증과 굴욕감에 어깨를 부들부들 떨던 아난샤가 고개를 들었다. 쟈빌론과 연결된 청각을 통해 라키엘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방금 다 들었을 거다. 우리 폐하께서 어떤 약조를 해주셨는지.”
“…….”
“지금 우리 상황은 너도 알겠지? 서로 인질이 되어서 묶였지만, 누가 불리한지도 충분히 깨닫고 있을 테고.”
“…….”
아난샤는 소리 없이 이를 갈았다. 그도 돌아가는 상황을 충분히 실감하고 있었다.
계획이 모조리 망했다. 쟈빌론을 시켜 황태자를 위협하고, 모두가 곤란에 빠진 순간 자신이 나서려 했다. 정신지배의 우위를 이용하여 만인이 보는 앞에서 쟈빌론을 죽이려 했다.
그러면?
자신이 영웅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황태자를 구한 공로자, 혹은 사회의 공헌자, 황실의 명예를 지켜준 수호자로서.
하지만 그 계획은 망했다. 그냥 망한 정도가 아니라, 이젠 아예 x됐다. 계획은 탄로가 났고, 자신마저 황태자의 호위에게 제압되었다.
‘이젠…… 자력으로 여길 빠져나갈 수 없겠구나.’
그는 상황을 인정했다.
이미 광장이 몇 겹으로 포위가 되었다. 서로 인질이 된 황태자와 자신. 인질 맞교환을 통해 자유를 얻어도? 그 후에 근위대와 소드마스터들의 공세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내게 신뢰를 주려고 황제의 약조를 얻어낸 것인가?”
아난샤가 외쳤다.
라키엘이 한쪽 입술만으로 웃었다.
“당연하지. 안 그러면 이 자리에서 댁이 맞교환에 응할까? 아니겠지?”
“…….”
“그렇다고 인적 없는 곳으로 가서 맞교환을 할 것도 아니잖아. 우리 폐하가 그걸 가만히 지켜보실 리도 없고.”
“…….”
“그래서 서로에게 답이 없는 협상 따위를 생략하려고 내가 배려를 해주는 거야. 어때, 여기서 인질 맞교환을 하는 건?”
“…….”
아난샤는 순간 고민했다. 황태자의 제안을 믿을 수 있을까. 당연한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젠장.’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선택의 자유도 없다. 오히려 저 제안이야말로 완전한 외통수 속에서 내려온 구원의 동아줄이다.
아난샤는 상황을 인정했다.
‘그래도 황제가 이 자리의 모든 이를 증인으로 삼아 약속까지 했으니까. 심지어 교단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겠노라고 직접 공언했으니까. 그건…… 믿어볼 수 있겠지.’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랬다.
파문은 결코 장난이 아니다.
단순히 황제 개인의 신앙 상실? 그 정도가 아니다.
황제가 파문을 당하면, 자동으로 황가와 제국 전체가 파문을 당한다. 즉, 제국과 교단의 모든 교류와 협력이 끊긴다. 신성교단의 모든 수도원이 제국으로부터 철수할 것이고, 제국의 국제적 위상과 민심은 나락으로 추락할 것이다.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닌 사태가 펼쳐지는 셈이다.
‘그런 조건까지 걸었으니…… 설마 약속을 대놓고 어기지는 않겠지.’
물론 이 광장을 벗어난 후에는 은밀한 공격을 가해올 것이다. 사람들 몰래 추격대를 붙이겠지. 하지만 그건 상관없다. 강력한 괴물 소드마스터 쟈빌론과 자신이 힘을 합치면, 얼마든지 추격을 뿌리칠 수 있을 테니까.
“……좋다!”
나름의 계산을 마친 아난샤가 외쳤다.
“황태자의 제안에 동의한다! 그럼! 셋을 세면 서로가 풀려나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는가?”
“콜.”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작전 성공을 위한 마지막 조약돌을 던질 차례다. 그는 자신을 붙잡아둔 쟈빌론을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빵긋, 웃었다.
“방금 들었지? 셋을 세면 날 풀어주면 된대.”
“……운이 좋은 줄 아시오, 황태자여.”
쟈빌론이 살기 서린 눈빛으로 응수해 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그러게. 내가 운이 좋지. 실험실로 끌려가서 죽은 줄 알았던 당신을 이렇게 또 만나게도 되고.”
“……뭐?”
“그땐 미안했다고.”
“…….”
“치료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 달에 한 번씩 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했던 거짓말로 댁을 속이고 도망치려 했던 거, 미안해.”
“무슨…….”
“갑자기 덩치가 무진장 커져서 그쪽을 이리저리 패대기쳤던 것도 미안하고. 아프고 쪽팔렸을 텐데. 그렇지?”
“…….”
“그런데 말이야. 미술 학교 입학에 실패한 거, 생각해 보면 이제는 상관없지 않나 싶은데. 그냥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취미를 계속 살려 가면 되는 거 아닌가?”
“…….”
“아, 오지랖이었다면 또 미안. 오늘은 미안하다고 말할 일이 좀 많네.”
“그대는…….”
……누구야?
대체 누군데, 나와 리한 군의관만 아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내는 거지?
라키엘을 쳐다보는 쟈빌론. 그의 눈에서 살기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아난샤의 정신지배 마법이 걸어둔 거짓된 콩깍지가 한 큐에 홀라당 벗겨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