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콩깍지를 벗겨라 (3)
누구에게나 특정한 사람과만 공유하는 기억이 있다. 사소한 비밀이라거나, 특별한 사건의 순간이라거나 하는 것들. 그러한 기억의 꾸러미들. 흔히 사람들은 그것을 ‘추억’이라고 부르곤 한다.
쟈빌론도 마찬가지였다.
리한 군의관. 평생 주치의로 붙잡아두고픈 사람. 반드시 찾아내고 싶은 중요한 존재.
그런 리한 군의관과의 추억은 그에게 각별한 기억이었다.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마법 실험실에서 갖가지 가혹한 정신 실험을 받는 동안에도 그러했다. 리한 군의관과의 기억 덕분에 고통을 버텨낼 수 있었다.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실험실에서 탈출한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잔혹한 실험 때문에 정신이 망가졌지만, 기억의 실타래가 무참히 뒤엉켰지만, 그럼에도 리한 군의관과의 기억은 소중했다. 잊고 싶지 않았다. 끝끝내 품어서 지켜냈다.
그건, 캄캄한 절망 속의 자신에게 유일하게 비추어지는 등불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대는, 어떻게 그 일들을 알고 있는 거지?”
쟈빌론의 목소리가 떨렸다.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을 속이고 도망치려 했던 리한 군의관. 그때 리한 군의관이 댔던 핑계가 떠올랐다. 한 달에 한 번, 달을 향해 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했더랬다. 그걸 하지 않으면 두통을 사라지게 해주는 능력을 잃는다고 하였다.
솔직히 당시에도 의구심을 느꼈다. 하지만 리한 군의관을 향한 의구심보다, 그의 능력이 사라지면 겪어야 할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컸다.
하여 못 이기는 척 허락했다.
그리고 속았다.
리한 군의관이 도망쳤다. 자신을 버리고서. 너무나 냉정하게.
“……말해보도록. 황태자, 어찌하여 그대가 리한 군의관이 했던 거짓말을 알고 있는 거지?”
“어, 음, 어쩌다 보니까?”
라키엘이 싱긋 웃었다.
혼란에 휩싸인 쟈빌론과 달리, 그는 여전히 태연한 기색을 유지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리한 군의관이라는 주장을 직접적으로 펼치지도 않았다.
‘당연하지. 내가 내 입으로, 내가 리한 군의관이야! 이러면 오히려 더 못 믿을 수도 있으니까.’
사칭을 한다는 반발심을 살 수도 있다. 의심을 얻게 되고, 신뢰를 잃게 된다. 하여 라키엘은 얼굴 가득 티타늄 3중 엠보싱 철판을 깔고서 능청스럽게 말했다.
“뭐…… 그냥, 생각이 나서?”
“생각이…… 나서?”
“그냥 기억 같은 거랄까. 아, 맞다. 그때 생각나나? 당신이 내 다릴 자르려고 했던 거. 내가 말 타고 도망치고 있는데 대놓고 검을 휘둘렀잖아.”
“…….”
“그땐 좀 무서웠거든. 안 잘려서 다행이지. 안 그래?”
“그대는 진짜…… 누구야?”
“황태자. 마젠타노의.”
“그런데 어떻게, 리한 군의관과 나만 아는 일들을 직접 겪은 것처럼 떠드는 거지?”
“글쎄?”
시치미를 뚝.
한층 궁금해하도록.
안달이 나서 못 참도록.
조바심에 잡아먹혀 버리도록.
‘조약돌을 던지는 건 여기까지.’
이쯤이면 됐다. 이만큼으로도 이미 쟈빌론의 마음속에는 의구심과 당혹감의 파문이 해일처럼 몰아닥치고 있을 테니까.
‘여기서 더 밀어붙이면 역효과가 나겠지.’
그러니 여기서 딱 끊는 게 좋다.
답답해 죽도록. 더 궁금해하도록.
라키엘은 쟈빌론의 질문을 무시했다. 대신 고개를 들어 광장 건너편에 있는 아난샤를 향해 외쳤다.
“맞교환을 하려면! 이쪽으로 오도록!”
“……좋다!”
아난샤가 즉시 응했다.
사실은 실시간으로 가슴이 철렁철렁 바운스를 그리고 있던 아난샤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태자 저놈, 지금 무슨 짓을 꾸미려는 거지?’
인질 맞교환을 하자고 해놓고.
서로 협의까지 다 봐놓고.
조금 전부터 갑자기 쟈빌론에게 이상한 말들을 건네기 시작했다. 쟈빌론과 청각이 공유된 상태라서 그 말들이 자신에게도 다 들렸다.
한데 그 내용이 심상치가 않았다.
‘설마……진짜로, 황태자가 리한 군의관이었다고?’
예전에 그런 의심을 잠깐 품은 적이 있었다. 물론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보기엔 그럴 가능성이 낮았으니까. 억측이라고 치부했다. 적어도 당시엔 그랬다.
한데 지금 보니 쟈빌론의 반응이 너무나 의미심장했다. 황태자의 말들. 그게 리한 군의관과 쟈빌론 둘만이 아는 기억인 듯했다. 그걸 눈치채는 순간 간담이 철렁했다. 말 그대로 엄청난 위기감이 엄습해왔다.
‘저 입을…… 다물게 해야 해!’
애초부터 자신을 리한 군의관으로 인식을 시켰다. 그렇게 세뇌를 건 덕분에 정신지배에 성공했다. 한데 그 세뇌가 깨지면? 거짓된 콩깍지가 벗겨지면? 자신이 리한 군의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쟈빌론이 깨달으면?
그 순간 정신지배도 풀린다. 저 괴물 같은 소드마스터마저 적대적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끝이야.’
아난샤는 다급해졌다.
황태자의 입을 한시라도 빨리 막기 위해 서둘렀다.
“가, 가자고. 갑시다, 얼른!”
자신을 붙잡고 있는 데미안을 오히려 재촉했다. 종종걸음으로 광장을 가로질렀다. 마침내 황태자와 열 발짝 떨어진 곳까지 다다랐다.
황태자가 묘하게 여유 가득한 미소로 이쪽을 맞이했다.
“어유. 이 사태의 흉수께서 바쁘게 오시는구만.”
“…….”
“그럼, 인질 맞교환을 시작할까?”
“좋다!”
“아, 그전에 조금 궁금한 점이 있는데.”
“필요 없으니 인질 맞교환부터 하자.”
“싫은데?”
“…….”
“궁금증이 풀리기 전에는 풀려나기 싫은데 어떡하지?”
“……!”
황태자 이 x끼, 미친 거 아닌가?
아난샤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그가 초조함에 분통을 터뜨리거나 말거나, 라키엘은 제 질문만 태연하게 툭툭 던져댔다.
“그쪽, 이름이 뭐지?”
“……나?”
“그래. 감히 수하를 시켜 시성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제국의 황태자인 나를 납치하려 시도한 흉수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적어도 나는 그걸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날 수배할 생각인가?”
“아니. 폐하께서 약조를 하셨잖아. 일체의 공격도 하지 않겠다고.”
“…….”
“이런 대담한 짓을 벌인 주제에 이름을 밝히는 건 불안한가? 보기보단 소심하…….”
“리한 군의관. 내 이름은 리한이다.”
“아하. 그러셔?”
“그렇다.”
아난샤는 짓씹듯 대꾸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황태자를 억류하고 있는 쟈빌론을 슬쩍 살펴보았다.
“…….”
기색이 좋지가 않다.
자신이 리한 군의관이라고 이름을 밝히는 순간, 이쪽을 보던 눈초리에 분명히 의구심을 드러냈다. 아주 작은 의심의 균열. 하지만 거대한 제방도 결국에는 작은 균열 때문에 무너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좋지 않아. 저런 의심은…… 계속 방치하면 위험해져.’
의심은 독버섯과도 같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제아무리 정신지배 마법으로도 제어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니 생기는 즉시 제거해야 한다.
결심한 아난샤는 입을 열었다. 쟈빌론의 내면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의심을 제거하기 위한, 나름의 심혈을 기울여 꾸며낸 말들을 꺼냈다.
“나는 한때 군의관으로 일했지. 전쟁터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앙부아즈에서 내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참전했다.”
“그랬나?”
“그래. 그곳에서 저자를 만났지.”
아난샤는 며칠 사이에 쟈빌론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앙부아즈 내전. 리한 군의관과의 만남. 함께 보낸 시간들까지. 그 기억을 최대한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말했다.
“쟈빌론, 저 사람을 만나자마자 나는 깨달았다. 끔찍한 두통에 고통을 받고 있구나. 그래서 나는 저자의 두통을 다스려 주었지. 그것은 실로……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그래애?”
“그렇다. 그 일이 인연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졌지. 한순간도 서로를 저버리지 않는 신뢰를 품고서. 서로를 배신하거나 떠난다는 따위의 일은 상상조차 못 하는 완벽한 신뢰의 관계로 말이다.”
“아하, 그런가?”
“당연하지. 다만, 내가 잠깐 그와 떨어져서 지낸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내 본심이 아니었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그래서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고.”
“허허, 그러셨어?”
“물론. 황태자, 당신처럼 평생 높은 지위와 권력에 취해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부류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겠지. 순수하게 서로를 믿는 완벽한 신뢰의 관계를 말이다. 나, 리한 군의관과 저 사람의 관계 같은 것은 평생 누려볼 수도 없을 테고.”
목소리에 자부심을 가득 실었다.
쟈빌론이 잠깐 품었을 의심을 녹여내기 위해, 최대한 진지하며 진중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쟈빌론을 향해 따스한 눈길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 될 거라고 여겼다.
쟈빌론 또한 의심을 잊을 거라고, 이쪽을 리한 군의관으로 보아줄 거라고, 마침내 리한 군의관과 함께 있게 되어 무척 기쁘다고, 최근 그랬던 것처럼 반응해줄 것이라고 여겼다.
덕분에 쟈빌론의 반응은…….
“하하, 하하하.”
웃었다!
이쪽을 보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역시 리한 군의관. 그대는……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거였군?”
“그렇습니다.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다행이다.
믿어 준다!
아난샤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쪽의 적당히 꾸민 거짓말이 통한 듯했다. 아난샤는 그 믿음에 쐐기를 박고자 서둘러 말했다.
“저는 항상 당신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한시도 떨어지기 싫은, 잃고 싶지도 않은 중요한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래. 그렇지. 그거야.”
“당연하지요. 항상 말했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치, 가족처럼 말이지요.”
“가족?”
“예, 가족. 너무나 소중하고 따스한.”
“가족…… 소중…… 따스한……?”
“제겐 당신이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가?”
“예. 정말로요.”
더욱 신뢰감 있는 얼굴로 친근하게. 실제 리한 군의관이 그랬을 것처럼. 아난샤는 쟈빌론의 말에 열심히 호응해 주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환하게 웃던 쟈빌론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가족? 따스해?”
“네?”
“이상한데. 리한 군의관?”
“예?”
“나한테 가족은 따스하지 않았는데?”
“무슨…….”
철렁.
아난샤는 멈칫했다.
쟈빌론의 미소가 조금씩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쪽을 향해 문득 던져오는 질문 또한, 그러했다.
“특히 내 아버지…… 말이야…….”
“아, 그건…….”
“리한 군의관? 예전에 내가 말해준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혹시 기억하나?”
“물론이죠.”
“내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또한?”
“다, 당연히…….”
“누구의 손에 돌아가셨지?”
이제 쟈빌론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빈자리를 차지한 표정은 서러움, 혹은 분노 같은 무엇이었다.
아난샤는 저도 모르게 쿵쿵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쟈빌론이 아버지의 죽음을 언급하며 저런 표정을 짓는다면? 필시 슬프고 분한 사연이 있는 거겠지. 그는 그러한 예상에 맞추어서 적당한 대답을 했다.
“그건…… 참으로 아프고 슬픈 일이었죠. 아직까지도 그 원수 같은 놈을 생각하면 저 또한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
“예. 당신처럼요.”
“그런가?”
“물론이죠.”
“그래. 그렇군.”
“예.”
휴우, 정답인가. 살았다.
……라며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려던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내 손에 돌아가셨는데.”
“……네?”
“네놈은 누구지?”
“…….”
“리한 군의관이…… 아니었군?”
마침내 벗겨진 거짓된 세뇌.
아난샤는 전신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