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흑마법사보다 독한 놈 (1)
“리한 군의관이…… 아니었군?”
쟈빌론은 되뇌었다.
되뇌임이 귓가에 스며들고.
뇌리를 적셔 기억을 일깨웠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그리고 저자는 어떤 이인가. 과연 내가 아는, 알던, 알고 싶던, 리한 군의관이 맞는가.
‘나는…….’
모르겠다.
눈을 가늘게 떴다.
눈길을 던져 당황한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리한 군의관의 모습이 있었다.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칼. 그래. 나는 그대의 그 머리칼 색이 참 마음에 들어. 불꽃과 피를 연상시키거든. 마음이 차분해진달까.
그리고 통통한 체구. 싸움이나 다툼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것만 같은 자세. 누군가의 피를 저며낸 경험이 없어 보이는 동작. 그런데도 묘하게 당찬 구석이 있지. 그게 바로 그대의 신기한 점이기도 하고.
그런데…….
‘달라.’
눈앞의 리한 군의관은 기억 속의 모습과 어딘가 달랐다. 겉모습이? 아니. 느낌이 달랐다.
‘그러고 보면 리한 군의관은 저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았는데.’
사소한 동작이나 자세가 그랬다.
다른 이라면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미묘한 차이지만, 쟈빌론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만큼 리한 군의관을 항상 눈여겨 보았기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며 더욱 세밀한 감각과 관찰력을 얻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느낄 수 있었다. 어딘가 다르다. 리한 군의관의 움직임이 아니다. 나는 그걸 왜 이제서야 알아차리고 있는 걸까.
‘어째서?’
쟈빌론은 스스로를 향해 물었다. 꼬인 기억의 실타래가 뇌리를 서슴없이 쑤셔왔다. 잔혹하던 마법 실험실. 엄습하던 고통. 일그러지던 이성. 냉랭하게 내려다보던 눈동자. 탈출. 목숨을 걸고서. 가까스로. 그 후로 나는…….
‘한참을…….’
방황했다.
리한 군의관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만났노라고, 찾아냈노라 기뻐하였다. 그게 저 앞에 서 있는 리한 군의관이었다.
그런데…… 아닌 것 같다.
오직 리한 군의관에게만 말해줬던 이야기. 둘만의 비밀. 사소하지만 자신에게는 중요한 기억. 지금처럼 일그러진 의식 사이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악몽 같던 실수의 순간. 아버지의 죽음. 자신의 검에 묻어났던 피. 흥건한. 그래서 더욱 지울 수 없어져 버린.
‘그 이야기를…… 모른다고? 리한 군의관이?’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내가 이야기해 준 적이 있으니까. 살면서 오직 한 사람, 리한 군의관에게만 솔직하게 밝혔던 자신의 이야기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리한 군의관만큼은 그 이야기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눈앞의 저 리한 군의관은 그걸 모르는 듯하다. 방금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그러했다. 이상했다. 말이 되지가 않았다.
내 아버지를 죽인 흉수가 따로 있다고? 내가 아니라? 원수 같은 놈이 있어? 그놈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파?
‘개소리.’
쟈빌론은 고개를 세차게 털어냈다.
스멀스멀 가슴으로 스며오는 확신. 저건 리한 군의관이 아닌 것 같다. 확신 속에서 다시금 눈길을 던졌다.
그러자 조금씩…… 리한 군의관의 모습이 바뀌어 갔다. 곱슬거리던 붉은 머리칼의 색이 바랬다. 혼탁하게. 색 빠진 갈색으로. 길게 자라났다.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탐스럽게 빵빵하던 볼살이 삽시간에 야위었다. 코가 오뚝하게 자라나고, 광대가 튀어나왔다. 눈썹 끝이 쳐졌다. 입술이 얇아졌다. 몸매도 그러했다. 지극히 평화적이던 통통한 몸매가 늘씬하게 변했다. 키도 커졌다.
‘저건…….’
완전히 다른 사람이잖아.
그런데 어째서 나는 저놈을 리한 군의관으로 여기고 있던 거지? 어떻게? 왜? 그는 스스로를 향한 의문과 경악, 혼란을 느꼈다. 뒤이어 분노 또한 느꼈다. 엉뚱한 놈에게 속아서 이용을 당하고 있었나? 나는? 정녕?
뒤섞인 혼란과 분노의 감정이 스민 눈길을 던졌다. 마지막 확인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제는 리한 군의관과 완전히 딴판의 모습이 된 남자가 돌연 이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에서 섬광이 번쩍, 하고 일었다.
“……!”
섬광이 시야를 온통 점령했다.
살면서 경험하여 본 가장 강렬한 눈부심이었다. 시야가 뒤덮였다. 사라졌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크읏!’
설마 기습인가.
불현듯, 불쾌한 기억이 살아났다. 마법 실험실. 그래. 그곳에서 나를 가지고 놀던 놈들이 이런 느낌을 줬지. 그래서 나는 마법이 싫어. 마법으로 조작하는 마나의 기색만 느껴도 갈가리 찢어서 죽이고 싶어지거든.
그런데…… 마침 저놈이 그렇네.
“……크아아!”
콰앙-!
쟈빌론은 품속에 잡아두던 황태자를 내동댕이치며 버렸다. 지면을 박찼다. 순간적인 섬광에 시야가 사라졌지만 상관없었다. 소드마스터의 날카로운 감각만은 여전하니까.
쐐애액!
그의 거구가 믿기지 않는 속도로 쇄도했다. 방금 섬광 마법을 기습적으로 사용한 아난샤를 향해서.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방향과 타이밍으로 돌진했다.
물론 그 방향과 타이밍이란, 0.5초 전의 시점을 기준으로 놓았을 때 ‘정확한’ 것이긴 했다.
……후웅!
쟈빌론의 손가락에 생성된 다섯 줄기의 오러소드가 맹렬하게 공간을 헤집었다. 하지만 그곳에 걸리는 뼈와 살은 없었다. 강맹한 일격은 그저 허공만을 긁었을 뿐.
실제 아난샤는 1미터 떨어진 지점으로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한 직후였다.
‘후읍!’
아난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간발의 차이로 코 앞을 스쳐 간 다섯 줄기의 오러. 걸리면 자신의 육신 따위는 정육점에 내걸린 고깃덩이보다도 못 한 신세가 될 것이다. 그걸 생각하자 발끝까지 소름이 오싹 돋았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날 건드리진 못할 테니까!’
쟈빌론에게 걸었던 정신지배가 풀리는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감지한 그였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정신지배를 시전한 당사자였으니까.
그래서였다.
정신지배가 풀리는 기색을 감지한 순간, 위험 또한 온몸으로 느꼈다. 자신이 꼭두각시 인형 신세가 되어 있었다는 걸 깨닫는 쟈빌론이 가장 먼저 누구에게 살기를 드러낼까.
생각할 것도 없이 자신일 터였다.
하여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당하기 전에 친다.
그러나 전면전은 피한다.
쉽기 이기지 못할 테니까.
우선 이 자리를 모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둔다.
‘그러니까…….’
일단 눈을 멀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최소 5분 동안은 장님 신세일 것이다. 그러니 다른 감각마저 멀게 하면, 안정적으로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겠지.
‘……이렇게!’
파앗!
아난샤는 더욱 거리를 벌리며 손을 뻗었다. 한 차례 박수를 쳤다. 손바닥으로 치는 평범한 박수. 그러나 그 속에 실린 뒤틀린 마나가 만들어낸 결과는 사뭇 평범하지 않았다.
……째애앵-!
철판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생성되었다. 가장 커다란 북 100개를 합쳐서 두드리는 것 같은 음량으로. 거대하게 증폭되어. 전면의 좁은 범위로만 집중된 음파의 형태로 날아갔다. 오직 쟈빌론의 얼굴을 향해서였다.
원래 평소의 쟈빌론이었다면 그럭저럭 피해낼 수 있을 유형의 공격이었다. 당연했다. 앞서의 섬광과 달리, 이번의 공격은 음속의 속도에 그치는 것이었으니까. 멀쩡한 상태의 그였다면 어렵지 않게 공격 범위를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사실 정신지배는 그 자체만으로도 심령에 커다란 타격을 준다. 그는 그러한 정신지배에서 풀려난 직후였다. 커다란 심령의 타격에서 회복되지도 못했고, 그만큼 반응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음파에 직격되었다
“……!”
고막이 사라지는 것 같은 충격. 혹은 세상의 상하좌우가 모조리 뒤틀리고 뒤섞이는 느낌!
“쿠, 으욱!”
시야에 이어 소리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오직 삐- 하는 괴악한 외침만이 청각을 점령하였을 뿐.
그뿐만이 아니었다.
균형감각이 단숨에 상실되었다. 현기증. 빙빙 도는 듯한. 세상의 끝으로 내던져지는 듯한 어지러움.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속이 뒤집히며 참을 수 없는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아난샤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됐어!’
그는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전혀 방심하지 않았다. 쟈빌론에게 덤벼들 생각 또한 조금도 품지 않았다. 지금이야 기습이 먹혀서 잠깐 감각이 상실되었지만, 어쨌거나 쟈빌론은 괴물 소드마스터니까.
‘이 틈에 도망치자.’
어설프게 얕보고 덮쳤다간 되레 이쪽이 당한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내빼야 한다. 마침 제국의 근위병들도 황제의 약속 때문에 이쪽을 공격하지 않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게다가 도망치고 나면?
별다른 추격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도구가 되어 황태자를 위협한 자의 정체가 쟈빌론이니까.
분명 마젠타노 제국과 앙부아즈 왕가 사이에 외교적 분쟁이 생겨나겠지. 쟈빌론을 관리하지 못한 앙부아즈 왕가에 책임을 묻겠지. 갈등이 피어나고, 그 갈등에 관심이 쏠린 사이에 자신은 종적을 감출 시간을 충분히 얻겠지.
애초에 그걸 노리고서 쟈빌론을 도구로 쓴 것이니까.
‘그렇지? 황태자의 흑발 호위.’
아난샤는 도약을 준비하며 눈길을 슬쩍 돌렸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잡아두고 있던, 한쪽 귓불마저 베어낸 흑발 호위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황제의 약속 때문에 자신을 건드릴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며. 도망치는 순간에 비웃음을 날려 주리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오산에 불과했다.
데미안을 향해 눈길을 돌린 아난샤. 그는 시야 가득, 자신을 향해 검집째 날아오는 데미안의 검격을 목격하여야 했다.
‘어?’
나한테 검을? 휘둘러? 왜? 황제는? 약속은?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에 꽃다발처럼 활짝 피어나는 그 순간.
빠각!
허벅다리가 사라지는 충격이 엄습해 왔다.
“……!”
아난샤는 두 눈을 부릅떴다. 전신이 허공에 떴다. 세상이 옆으로 기울어져 보였다. 아니, 자신의 온몸이 뜬 채로 옆으로 넘어지고 있었다. 지면이 다가왔다. 맹렬하게. 자세를 잡고 대비할 틈도 없이.
콰당탕!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떡 벌어진 입에서는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나 아파서. 특히나 검집으로 얻어맞은 다리가 숨도 못 쉬게 아파서. 전신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바르르 떨렸다.
‘내, 내 다리……!’
사라진 건 아닐까.
사라진 거 같은데.
허벅지 아래가 느껴지지가 않는데.
그런데 아픈 건 왜지. 어째서? 날 공격한 거지? 황제의 약속은? 내 다리는?
‘다리…… 다리……!’
그는 버둥거리며 눈길을 내렸다. 덕분에 그제야 목도할 수 있었다. 자신의 양쪽 허벅다리가 90도로 가지런히(?) 부러져 있었다.
묵직한 고통은 한 발 늦게 찾아왔다.
“……그흡!”
열 손가락이 와락 오그라들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어야 했다. 다음 순간 아난샤가 절감한 것은 맹렬한 분노였다. 휴짓조각처럼 버려진 약속. 신뢰를 무참히 깬 상대의 불합리에 대한 마땅하고도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화, 황태자아-! 어째서!”
그는 처절하게 외치며 황태자를 불같이 노려보았다.
라키엘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응, 불렀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
황태자의 그러한 모습을 보는 순간, 아난샤는 깨달았다.
“…….”
저 x끼.
상황에 따라 약속이고 뭐고도 없는, 나 같은 흑마법사보다 더 지독한 놈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