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흑마법사보다 독한 놈 (2)
명예는 소중하다.
결코 허상이 아니다.
이 세상 홀로 무인도에서 살아가지 않는 이상, 사람의 관계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있어 명예란 참으로 커다랗고 중요한 자산이 되곤 한다. 심지어 그런 경우는 일상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리그 오브 리자드 게임 등급이 다이아, 혹은 챌린저라면? 당장 친구들 사이에서 크나큰 부러움과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첫 월급을 받았다며 부모님, 친척 어르신들께 도톰한 내복과 두둑한 용돈 선물을 드린다면? 아이구 우리 땡땡이 참 잘 컸네 잘 컸어, 라고 두고두고 칭찬을 들을 수 있다.
혹은 하다못해, 아파트 경비 아저씨와 청소 아주머니들께 꼬박꼬박 인사만 친절하게 잘 해도 주변에 좋은 인상을 얼마든지 줄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소소한 명예이며,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만들고, 인생을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곤 한다. 그만큼 명예는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사회적 식량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그 명예를 잃으면?
심지어 일개 개인이 아닌, 제국의 황실 같은 존재가 명예를 잃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응 그래서 왜?”
라키엘은 빵긋 웃었다.
그리고 방금 자신을 향해 원망 가득한 외침을 토해낸 아난샤를 뻔뻔하게 쳐다보았다.
“나 불렀어?”
“…….”
저거.
미친놈인가.
아난샤는 이를 갈았다. 양쪽 허벅다리가 몽땅 부러졌다. 너무나 아파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빌어먹을 황태자의 흑발 호위의 검은 이미 목 위에 들이대어져 있었다. 즉, 완전히 제압당했다.
아난샤는 이를 갈며 짓씹듯 항의했다.
“약속을 했잖나! 제국의 황태자여!”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대광장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하여 아까 황태자가 말했던 약속을 떠올릴 수 있도록. 비로소 황태자의 신뢰를 저버린 행동을 모두가 비난할 수 있도록. 그렇게 자신에게 유리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황태자! 당신은 분명 약속을 했어! 이 자리에서! 모두가 듣는 앞에서! 제국 황실의 그 누구도 나를 공격하거나, 어떤 형식의 체포 시도도 하지 않겠노라고 말이다! 그런데! 벌써 그 약속을 잊었단 말인가!”
“응 아니. 기억하고 있는데?”
“…….”
“공격 안 한다고 약속했지. 그거 아직 5분도 안 지났는데, 벌써 잊었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왜!”
“깨면 안 돼?”
“……뭐?”
“약속, 깨면 안 되는 거냐고.”
“그야 물론…….”
아난샤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는 너무나 큰 혼란에 빠졌다.
약속은 당연히 깨면 안 된다. 깨지 말라고 약속을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사람 x끼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상도덕이자 보편타당한 상식이 아닌가?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아닌데. 내가 아는 상식이 맞는데. 맞아야 하는 건데. 그래야 이 세상이 그나마 서로를 믿고 살아가는 따스한 곳이구나, 라는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원래 건강한 사회라면 마땅히 그래야 할 텐데.
‘그런데…….’
황태자, 저놈은 어째서 약속을 깼다는 반인륜적이고 비인도적이며 개x끼적인 발언을 저토록 뻔뻔하고 당당하게 입에 담을 수 있지? 심지어 만인이 보는 앞에서?
아주 잠깐 엄습해 왔던 혼돈의 터널(?)에서 빠져나온 아난샤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욱 큰 불합리와, 그에 따른 합당한 분노를 느꼈다.
“깨면 안 되지!”
“아 그래?”
“당연하지! 이 명예도 없는 황실의 핏줄이여!”
비난했다. 목 놓아 부르짖었다. 그렇게 비난을 당해도 이제는 할 말이 없을 거라고 여겼다. 당연하다. 자신을 공격하면 황실이 명예를 잃을 거라고 했으니까. 그러니 이제 마젠타노 황실은 더럽혀진 가문인 것이다. 모두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하다.
마땅한데…… 그런데…….
“응, 명예 없는 거 맞아.”
“……뭐?”
“욕해. 그러면 되잖아?”
“무슨…….”
아난샤는 멍해졌다.
라키엘은 더욱 뻔뻔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흑마법사? 그쪽이 화를 내는 것은 이해해. 댁의 말이 맞아. 나는 약속을 했고, 그걸 어겼지. 그에 따라 우리 마젠타노 황가는 명예를 잃었어.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거고. 그런데 말이다……. 약속을 깨는 것보다, 황가를 능멸한 적과 타협을 하며 잃는 명예가 더 크지 않을까?”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은 라키엘의 음성. 그의 눈동자는 이곳 대광장의 어느 누구보다도 냉정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당연히 타협하며 잃는 명예가 더 크겠지. 훨씬. 더더욱.”
라키엘의 냉랭한 말이 이어졌다.
“하여 나,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선언하노니. 오늘부로 마젠타노의 이름은 약속을 깨뜨림으로써 더럽혀졌도다. 그러나 대신에, 마젠타노를 능멸한 적과의 어떠한 형태로의 타협 또한 없을 것임을 더럽혀진 명예로 천명하노라.”
“…….”
아난샤의 전신에서 소름이 돋았다.
그는 비로소 완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속았다. 자신이 황태자를 너무 쉽게 보았다. 이런 종류의 독종인 줄은 차마 몰랐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명예를 기꺼이 버리겠단다. 대신 황가를 능멸한 이쪽을 반드시 도륙내겠단다. 명예를 버린 대가로 말이다.
그럼, 사람들은 이 일을 어떻게 평가할까.
마젠타노를 욕할까?
아니.
오히려 찬양하겠지. 나약한 모습을 거부하기 위해 명예마저 기꺼이 내던진 과감함을 우러르겠지.
“하, 하지만……! 다른 약속도 하지 않았는가!”
아난샤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외쳤다.
“날 공격하면! 황제가 신성교단으로부터 파문될 것이라는 약속은 어떻게 지킬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명예를 잃는 것보다 더욱 무서울 것이다. 황제와 제국은 동일체. 황제가 파문을 당하면? 제국 전체도 파문을 당한다. 제국의 모든 귀족과 백성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이 하루아침에 파문을 당한 자신들의 신세를 쉽게 받아들일까? 아니. 절대로.
‘그것마저 감당하기엔 여파가 어마어마할 테지!’
아난샤는 비릿하게 웃었다.
명예?
그걸 무시할 수는 있겠지만, 파문만큼은 제아무리 황태자가 미친놈이라고 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저기, 교황님?”
황태자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 단상 옆쪽. 그곳에 성기사들의 철통같은 호위를 받던 통통한 노인이 있었다. 교황이었다.
라키엘이 교황을 향해 물었다.
“제국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감히 여쭙노니, 방금 저와 흑마법사의 대화를 모두 들으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모두 들었습니다, 제국의 황태자시여.”
“예, 감사합니다. 하여 감히 교황께 묻고자 합니다. 오늘 저와 마젠타노 황가가 흑마법사와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신성한 교황께서는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셨겠지요?”
“물론 지켜보았습니다, 제국의 황태자시여.”
“그럼 흑마법사에게 걸었던 약속의 조건대로, 우리 황제 폐하께서 파문을 당하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제국의 황태자시여.”
“언제, 어떻게 파문을 당하게 되십니까?”
“지금 파문을 하여드리겠습니다, 제국의 황태자시여.”
교황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가슴 앞에 성호를 그렸다. 희미한 황금색 물결이 성호를 따라 허공을 수놓다가 사라졌다.
“됐습니다. 이로써 제국의 황제,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는 신성교단으로부터 파문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합니다.”
엄청난 의미의 선포가 아침밥 메뉴 공개하듯이 건조하게 발표되었다. 그걸 들은 아난샤는 비릿하게 웃었고, 라키엘은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교황님?”
“예, 마젠타노의 황태자시여.”
“방금 파문당하신 우리 폐하 말입니다, 다시 복권이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시여.”
“언제, 어떻게 복권이 가능할까요?”
“지금 복권을 하여드리겠습니다, 제국의 황태자시여.”
교황이 흐뭇하게 웃었다. 또 가슴 앞에 성호를 그렸다. 아까보다 또렷한 황금색 물결이 손짓을 따라 허공을 수놓았다.
“됐습니다. 이로써 제국의 황제,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는 신성교단으로부터 파문당하며 잃었던 신도의 권리를 모두 복권받게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합니다.”
또 엄청난 의미의 선포가 지하철 도착 알림방송처럼 건성건성 발표되었다. 이제 아난샤는 웃지 못했다. 라키엘은 더욱 뻔뻔하게 웃으며 아난샤를 돌아보았다.
“들었지?”
“…….”
“잠깐이었지만 파문은 확실하게 됐다?”
“…….”
“그러니까 약속을 깨면서 받을 대가는 다 받은 거다?”
“…….”
“아아, 10초 정도였지만, 황제 폐하와 더불어 제국 전체가 파문을 당한 상황은 참으로 비극적이고 끔찍하며 암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어. 그렇지?”
“…….”
“그래도 금방 복권이 됐으니까.”
“…….”
“참 다행이야 하핫.”
“…….”
야, 이 개x끼야!
아난샤는 깨달았다.
망했다.
완전히 끝났다.
자신이 품었던 모든 원대한 목적이, 정교한 계획이, 모조리 무너졌다.
‘안 돼…….’
자신이 흑마법으로 공개적인 공헌을 세우는 상황을 만들려 했는데. 그걸 통해 흑마법을 제국 법으로 보호되는 양지로 끌어올리려고 했는데. 제국 사회 내부에 뿌리를 내리고, 다른 지파의 흑마법사들을 끌어들이고, 안쪽에서부터 제국을 삼키려 했는데.
그렇게 흑마법의 왕국을 건설하려 하였는데.
‘모두…….’
끝이다.
100년의 시간 동안 정예로 키워온 권속들을 모조리 잃었다. 쟈빌론에게 걸었던 정신지배는 풀렸고, 자신은 두 다리가 부러진 채 탈출조차 꿈꾸지 못할 신세가 되고 말았다.
“…….”
그건 싫은데.
이렇게 끝나고 싶지 않은데.
“데미안. 그자를 체포해.”
황태자의 명이 떨어졌다. 데미안이라 불린 흑발 호위가 검집을 치켜들었다. 설마 저걸로 한 번 더 내리치려는 걸까. 저 건너편에서는 우르르 몰려오는 근위대도 보였다. 그 사이 어디에도 좀처럼 빠져나갈 틈은 보이지 않았다.
끝났다.
완전하게.
그런데, 그건 싫다.
‘그러니까 나는…….’
이대로 끝나긴 싫다. 이러려고 지금까지 아등바등 힘을 키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내겐 아직 마지막 한 가지 수단이 남아 있다. 절대로 쓰고 싶지 않았던, 일평생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쓰고 나면 그 후로는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그 무엇보다도 위력적인 마지막 수단 하나가, 내겐 있다.
‘그걸, 쓰자.’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겠다.
깨달으며 결심하는 순간.
……꾸드득!
아난샤는 주먹을 쥐었다. 눈을 감고서 200년 전, 자신의 내부에 깃들였던 존재의 문을 두드렸다. 그를 혈염의 흑마법사로 존재하게 하여 준 근원. 인간이면서도 뱀파이어를 양성하고 조종할 수 있었던 비결.
그의 심장에 결정 상태로 박혀 있던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 조각이 흐물흐물해졌다. 녹아내렸다. 고체에서 액체로, 보석에서 방울로 화하며 전신으로 퍼졌다.
다음 순간.
“……!”
부릅뜬 그의 핏빛 눈동자가 불길한 섬광을 토해냈다. 파괴와 재창조의 혈염. 냉철한 살육의 충동. 밤의 지배자의 권능이 그의 몸을 통해 현현되기 시작하였다.
덕분에 그걸 보던 라키엘은 생각했다.
저거도 뽑아서 약으로 만들면 맛있겠…… 아니, 약빨 좀 쩔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