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맛있는 건 일단 호로록 (1)
……꾸드득!
아난샤는 주먹을 쥐었다.
문득 떠오르는 200년 전의 기억.
당시의 스승이 말했던가.
혈염의 힘은 귀한 것이라고. 위대한 일족의 로드께서 우리 학파에게 선물한 축복이라고. 우리는 로드의 호의를 받들어 혈염의 힘을 더욱 연구하여야 한다고. 그것이 학파의 발전을 위한 일이라고.
다 늙어빠진 얼굴로.
다 죽어가는 얼굴로.
현명한 척하며 웃던 스승의 모습.
그 모습이 얼마나 역설적이던지.
‘학파의 발전을 위해? 개소리.’
당시의 자신은 코웃음을 쳤더랬다. 당연했다. 먼 과거, 뱀파이어 로드가 학파의 시조에게 선물한 혈염의 힘. 핏빛 보석.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 스승이 어째서 그것을 자신의 몸에 품지 않는지 의문이 들었다. 의심 또한 들었다.
당연했다.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을 몸속에 품으면 영생에 가까운 수명을 얻게 되니까. 스승의 스승들, 선대의 흑마법사들이 일찌감치 그 사실을 밝혀내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왜?
‘당신은 그걸로 수명을 늘리지 않았지?’
수명을 늘리면 그만큼 더 오래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일파의 흑마법을 한층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학파의 부흥 또한 더욱 효율적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한데 스승은 그러지 않았다.
정혈을 몸속에 품지 않았다.
초라한 몰골로 늙어 버렸다.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식적이라고, 위선적이라고 느꼈다. 하여 직설적으로 물었다. 왜 정혈을 사용하지 않으셨느냐고. 그랬더니 스승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았던가.
‘내 연구를 이어받을 네가 있지 않느냐.’
……라는, 판에 박힌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자에게 연구를 물려준다? 비효율적이다. 새로 제자를 키우는 일도, 과정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도, 모두 능률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자신의 수명을 늘려서 무한대로 연구를 이어가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고. 그것이 학파의 발전에 더욱 도움이 되는 길이리라고 여겼다.
그래서였다.
스승이 무력해지자마자 본심을 드러냈다.
병환으로 죽어가던 스승 앞에서 보란듯이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을 흡수했고, 심장에 받아들였다. 경험한 적이 없는 무한한 힘이 느껴졌다. 새로운 감각이 눈을 떴다. 마치 자신이 뱀파이어 로드가 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몸속에 받아들인 정혈을 통해 학파의 마법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200년에 걸쳐서 차근차근. 제자 따위는 거두지 않고 독자적으로. 더욱 효율적으로. 뱀파이어 권속들을 양성하며 힘을 키우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러자 다음 단계의 갈망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음지에 숨어서 사는 것이 슬슬 지겨워졌다.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었다. 인정과 우러름을 받고 싶었다. 역사의 페이지에 자신의 이름을 찬란한 잉크로 새기고 싶어졌다.
그 무렵, 마침 크라노스에서 다른 학파의 흑마법사가 황태자에게 토벌당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마침내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나머지 흑마법 학파를 소집했다. 모두를 선동했다. 자신이 길을 보일 테니, 따라오라고.
그런데 결국…… 이 꼴이다.
‘나는…….’
까드득!
아난샤는 이를 갈았다.
두 다리가 부러지고 체포되어 파멸만이 남은 암담한 상황. 그 속에서 그는 최후의 방법을 동원하였다.
심장에 200년간 깃들어 있던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 그 조각이 흐물흐물해졌다. 녹아내렸다. 고체에서 액체로, 보석에서 방울로 화하며 전신의 혈맥을 타고 번져갔다.
동시에 귓가에 번져오는 아스라한 한탄. 죽어가던 스승의 마지막 읊조림이었던가.
‘그걸 쓰면…… 돌이킬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야. 너는 어찌 그걸…… 모르는 것이냐?’
병상에서 끝까지 안타까움을 드러내던 노인네. 진정으로 이쪽을 걱정하던 기색. 그를 향해 잘라내듯 대꾸하였던가.
다 안다고.
알고서 이러는 것이라고.
그 대가 또한, 받을 각오가 되었노라고.
‘그게 바로…… 지금인 거 같습니다.’
쓴웃음이 나왔다.
이걸 쓰면 이제 자신은 자아가 사라지겠지. 최소 10년. 어쩌면 30년쯤? 그 후에야 제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다. 그동안에는 정혈이 주는 힘에 사로잡혀 사람이 아닌 그 무언가로 살아가야겠지. 자아조차 없이. 짐승처럼.
하지만 그럼에도…….
‘이대로 끝장이 나는 것보다는 낫겠지.’
살아남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30년 뒤에 눈을 떠도 상관없다. 어쨌건 훗날을 도모할 수 있을 테니까. 긴 시간을 들여서라도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 테니까. 그 정도의 실낱같은 가능성과 희망이면 된다.
그러니 이제는!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비장한 각오와 함께 눈을 질끈 감으려던 때였는데.
촵?
별안간, 하찮은 손바닥이 이마를 짚어왔다.
빠르거나 강맹한 손길?
전혀 아니었다.
마치 상점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해서 손을 뻗는, 딱 그 정도쯤 어딘가와 비슷한 느낌의 손길이었다.
‘……어?’
아난샤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손을 뻗은 이와 눈이 마주칠 수 있었다.
‘황태자?’
숨을 헐떡이는 황태자가 보였다.
얼마나 힘껏 뛰어왔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돋아난 채로, 손을 뻗어 이쪽의 이마를 짚고 있었다.
긴박한 표정?
전혀 아니었다.
이쪽의 흉악하고 위험한 시도를 저지하려는 비장한 눈빛? 그 또한 물론 아니었다.
오히려 황태자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혹은 너무나 흐뭇한 눈길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미소와 눈빛이 마치, 먹음직한 꿀맛 음식을 앞에 둔 사람처럼 보였다.
“…….”
착각?
아니다.
진짜다.
그래서 헷갈렸다.
‘내가…… 꿀맛이라고?’
라고 아난샤가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키이이이잉-!
“……!”
이마를 짚은 황태자의 손바닥이 기이한 흡입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이쪽이 전신의 혈맥에 돌리려던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무슨?’
아난샤는 한쪽 눈썹을 꿈틀했다.
상대의 마나를 흡수한다고?
사람이?
어떻게?
아, 그래.
전에 이런 마나 운용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아스라한 심법?’
그랬다.
마젠타노 황가의 일족에게만 전수되는 강력한 비전이라고 했던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토록 게걸스럽게, 경우도 매너도 예절도 없는 약탈자처럼 남의 혈맥 속 마나를 갈취하는 흉악한 기술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무슨 이런 흡혈귀 같은 놈이.’
아난샤는 어처구니가 없어짐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라키엘을 비웃었다.
‘멍청한 놈.’
아스라한 심법?
상대의 마나를 흡수하는 기술?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것은 알겠다. 인정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흡수하려는 목표물 또한 한참이나 잘못 골랐다. 그 생각에 다시금 황태자를 향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탐이 나 보인다고 해도…… 감히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을 집어먹을 생각을 해?’
상황을 깨닫자마자 황태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황태자가 흡수하려는 것은 단순한 이쪽의 마나가 아니다. 이쪽이 전신에 퍼뜨리려는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이다. 그걸 집어삼키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어이가 없었다.
미친놈.
어리석은 놈.
그 섣부른 탐욕 때문에 참신한 자살법을 선택한 놈.
라키엘을 보는 아난샤의 눈빛에 비웃음을 넘어선 안타까움과 애잔함까지 섞였다. 당연했다.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은 아무나 함부로 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한데 이걸 날름 집어삼키겠다고? 가능이라도 할까?’
아니.
절대로 불가능하다.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은 단순한 마나 덩어리가 아니었다. 일종의 자아를 지닌 존재였다. 그렇기에 자신을 품을 숙주를 스스로 선택했다. 선택의 기준마저도 까다롭기가 그지없었다.
대상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그냥 거부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예 처참한 몰골로 피를 말려 죽이는 끔찍함까지 지녔다. 자격 없는 이가 정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설정한, 뱀파이어 로드의 안배 때문이었다.
덕분에 고위급 흑마법사인 자신조차도 로드의 정혈을 품기 전에 얼마나 많이 준비를 하였던가. 그러고도 죽을 각오를 짓씹어야 했다. 시도한 직후에 실제로 거의 죽을 뻔했다. 심지어 10년 가까이 지독한 후유증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정수를 성공적으로 품은 뒤부터, 자신만의 안전장치도 따로 준비를 하였다. 훗날 누군가가 자신에게서 정수를 강탈하려 들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여 50년에 걸쳐 별도의 금제를 만들었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서 정수를 앗아가지 못하도록 마법적 자물쇠를 걸었다. 이를테면 그것은, 수십 겹의 단단한 금고로 정수를 감싸둔 것과 같은 형태였다.
‘그런데? 그걸? 감히 네가?’
아난샤는 황태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절대로 가능할 리가 없다는 확신. 어설픈 시도 따위는 자신의 금제에 막히겠지. 실제로 상황도 그렇게 돌아갔다.
쿠쿵-!
수십 개의 자물쇠가 정혈을 보호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두통이 엄습해 왔다. 관자놀이가 깨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난샤는 웃었다. 이 두통이야말로 금제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증거니까.
그러니까…….
‘넌 죽을 것이다, 황태자여.’
금제에 막혀서 죽든. 정혈에게 거부당하여 죽든. 혹은 곧 새로운 존재로 깨어나게 될 내 손에 죽든. 네가 이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리란 사실은 변치 않을 것이다.
죽어라.
처참하게. 그 누구보다도 비참하게. 널 아끼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끔찍한 몰골로, 허덕이고 애원하고 바닥을 기며 벌레처럼 죽어라.
하면 나는 너의 그 모습을 감상해 주마. 내 계획과 미래를 망쳐놓은 황태자, 네놈에게 선사할 내 복수로는 그것조차도 성에 차지 않을 터이니.
‘그렇지 않겠는가, 황태자여?’
아난샤는 확신에 찬 눈길을 들었다. 잔혹한 눈웃음으로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관자놀이가 깨질 것 같은 두통. 그 속에서 환희에 차서 기대했다. 황태자의 표정 또한 끔찍한 고통으로 물들기를. 절망감에 뒤덮이기를.
그런데 그때였다.
“이봐. 살면서 침 맞아본 적 없지?”
태연하게 날아오는 황태자의 물음.
오히려 이쪽을 비웃는 듯한.
혹은 약간 한심해하는 듯한.
그 뜬금포적인 물음 때문이었다.
“어?”
아난샤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대꾸하였다. 그리고 뒤늦게 목격했다.
황태자가 한 손을 들고 있었다. 그 손에 들린 가시가 보였다. 처음 보는 형태. 굵고. 길고. 뾰족한 끄트머리가 이쪽을 조준하고 있었다. 어디를? 이쪽의 머리통을. 대놓고 에임 맞춰 정조준하듯이 따악.
‘어째서? 왜?’
지금처럼 긴박하고 심각한 와중에 가시 따위를 치켜든 걸까. 겨우 저걸로 뭘 하겠다는 걸까. 저딴 것엔 찔려도 별 타격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 황태자의 표정과 눈빛은 왜 저렇게도 여유가 만만한 걸까. 대체 뭘 믿고서?
……라고 의아해하는 순간.
“두유 노우 두유혈(頭維穴)?”
괴상한 물음이 달팽이관을 푹 쑤셔왔다.
동시에 황태자의 가시가 이마 옆쪽, 두유혈을…….
푹!
쑤시는 순간,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을 감싸고 있던 수십 겹의 자물쇠 금제가 한 큐에 카드값 빠져나가는 은행계좌처럼 호로록 털리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