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93화 (293/468)

293화. 나를 울리는 사람들 (1)

열흘이 지났다.

부서진 프론테라 대광장의 포석 조각 위로 새로운 아침의 햇살이 드리웠다. 사람들의 땀방울도 떨어졌다. 복구공사를 위해 바쁘게 오가는 손수레, 그 위에 가득 실린 모래와 잡석 같은 두런두런 이야기들과 함께.

“후우. 이거, 많이도 부서졌군그래. 아주 난리도 아니었겠어.”

“말도 마십쇼. 끔찍했습니다, 정말로.”

“그런가?”

“예.”

광장 복구공사에 동원된 젊은 인부가 삽을 들었다. 그가 부서진 잡석과 모래를 수레에 퍼담으며 말했다.

“그날 제가 똑똑히 봤거든요.”

“봤다고? 자네가 직접?”

“예.”

“어떻게?”

“여자친구 집이 바로 저쪽입니다. 대광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죠.”

“…….”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아니, 자네한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게 조금 뜻밖이라서.”

“…….”

“아, 미안하네.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보게.”

“후. 수레나 꽉 잡으십쇼 좀.”

“…….”

“뭐 어쨌건, 어제 전 여자친구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대광장에서 거행되는 황태자 전하의 시성식을 구경할 생각이었죠. 테라스에서 즐기는 근사한 식사와 함께 말입니다.”

“그러다가…… 그 난리를 보게 된 건가?”

“예. 그랬죠.”

젊은 인부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처음엔 작은 소란이 일더군요. 멀어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가 시성식 단상 위로 뛰어들고 험악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나 싶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흥미진진한 구경거리 정도가 생겼나 싶었지요. 역사에 새겨질 사건을 두 눈으로 직접 보는가 싶기도 했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그 후에?”

“하늘이 열리더군요. 마법진? 뭐 그런 비슷한 거였던 거 같습니다. 그 속에서 박쥐 떼가 끝없이 쏟아져 나왔지요. 그리고 피투성이 색깔의 마법진이 대광장을 휘감아 버렸습니다. 엄청난 폭발과 함께 말이지요.”

“이런. 다치진 않았나?”

“예. 저도, 여자친구도 무사했습니다. 뭔가 위험해진다 싶은 느낌 때문에 얼른 몸을 숙이고 있었거든요. 덕분에 다치진 않았는데…… 청혼하려고 몰래 준비해서 꺼내려 했던 반지가 날아갔지요. 훨훨.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어, 저런. 반지는 찾았고?”

“아뇨.”

“…….”

“그래서 오늘 인부 모집에 냉큼 달려온 겁니다.”

“설마 다시 반지를 사려고?”

“별수 있겠습니까.”

“…….”

“어쨌건, 저는 그런 괴물은 처음 봤습니다. 그렇게 끔찍한 괴물에게 맞서는 황족의 모습도 처음 봤고 말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예. 소문은 들으셨지요?”

“물론이네. 모두가 빈혈 같은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지는 순간에 유일하게 꿋꿋하게 버티고 일어서셨다더군. 그리고 소드마스터들을 격려하며 일으켰다고도 했고.”

“그뿐이었겠습니까. 가장 위험한 곳에서 가장 절박하게 싸우셨지요. 제가 봤거든요.”

젊은 인부가 말했다.

“펑, 하고 터지더군요. 황태자 전하께서 손을 내민 곳에서 말입니다. 괴물이 고통에 몸부림을 쳤고 말입니다.”

“그래서…… 혹시 소문과 똑같았던 건가?”

“어떤 소문을 들은 겁니까?”

“거 있잖나. 황태자 전하께서 화염 덩어리를 쏘아내셨어도 괴물이 멀쩡했다던데.”

“예. 맞습니다.”

“그럼…… 그 뒤도 소문처럼?”

“그거 단순한 소문이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정말로, 전하께서 멀쩡한 괴물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화염을 쏘아내셨다는 건가? 그 병약하신 몸으로? 대마법사도 감히 견주지 못할 위력의 화염을?”

“저도 직접 보지 못했다면 믿기가 어려웠겠지요. 하지만 해내셨습니다. 우리 전하는 말입니다.”

“…….”

“그런 모습을 직접 보고 나니 뭐랄까요. 사람들의 인식이나 선입견이라는 게 참 웃기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선입견 말인가?”

“2, 3년 전까지만 해도 황태자 전하는 없는 것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다들 공공연하게 숙덕거렸잖습니까. 저도 그랬고. 아저씨도 그랬고. 황도, 아니, 이 제국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말입니다.”

“뭐, 하긴…….”

늙은 인부가 멋쩍게 턱수염을 긁었다.

젊은 인부는 복잡한 눈길로 고개를 돌렸다. 별궁 한의원이 있는 방향이었다. 물론 대광장에서는 별궁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저는 그저, 한때 제가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폄훼했던 분이 어서 눈을 떠 주시길, 건강한 모습으로 일어나 제 칭송을 받아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게 그날 대광장에서 전하께 목숨을 빚진 모든 이들이 당연하게 해야 할 보답일 테니까 말입니다.”

젊은 인부의 말에 주위가 숙연해졌다.

모두는 생각했다.

소문보다 사실은 더욱 장렬하게 싸웠고, 이제는 더욱 안타깝게 쓰러져 있는 모두의 황태자. 벌써 열흘째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는 황도 마젠타의 영웅. 그가 어서 눈을 떠 주기를.

깨어나지 않는다.

눈을 뜨질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일깨움의 말을 건네어도.

그럼에도 눈을 뜨지 않는 나의 아들. 라키엘.

“…….”

황제, 아스테리온은 침묵을 지켰다. 그의 시선은 병상의 라키엘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벌써 얼마나 지난 건지 모르겠다. 자신의 아들이 눈을 뜨질 못한 것이. 자신이 그러한 아들의 곁을 지킨 것이.

막막했다.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물론 그런 황제를 보좌하는 근위대장, 로베르토 경은 달랐다.

‘벌써 열흘째인가.’

그는 슬쩍 시간을 가늠하였다. 황제가 황태자의 곁을 지킨 것이 벌써 대략 그쯤 된 듯했다. 그동안 황제는 거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좀처럼 잠을 이루지도, 물을 마시지도 못하였다. 그저 석상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말려야 할 터인데.

로베르토 경은 잠시 고민한 끝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폐하.”

“…….”

“비통한 마음은 알겠사오나, 옥체를 보존하여야 하시옵니다.”

“…….”

“이렇게 계신지가 벌써 열흘이 다 되어가오니…….”

“그만.”

“…….”

“짐이 지키지 못한 아들이다. 한때 무시하였던 아들이다. 이렇게 되고서야 소중함을 더욱 절감하게 된 아들이다.”

“폐하.”

“세상에 이렇게 비천하고 못난 아비가 또 있을까. 이토록 비겁한 아비가 또 있겠느냔 말이다.”

“…….”

“아들이 이 지경이 되고서야 반성을 하겠답시고, 간호를 하겠답시고 이러는 짐의 모습조차도 가증스럽기가 그지없거늘…… 고작 며칠을 고단히 보냈다고 엄살을 부릴 수 있겠는가, 내가?”

“하오나 폐하. 아니, 아스토.”

“…….”

“폐하의 근위대장이 아닌, 당신의 평생을 함께한 친우로서 말하겠습니다. 조금만 쉬십시오. 죄책감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날의 사태는 당신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짐은…… 아니, 나는…….”

“안타까운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 저도 똑같습니다.”

로베르토 경은 착잡한 시선을 돌려 병상의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저 모습이 벌써 열흘째다. 그날, 대광장에 출몰한 거대한 핏빛 짐승을 물리친 직후 혼절한 황태자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못 깨어나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

아마 황제는 더욱 불안하겠지. 무섭겠지. 그것이 자식을 먼저 눕힌 아비의 마음일 테니까.

“저 또한 더욱 맹렬히 싸우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더 잘 싸웠다면, 근위대장의 본분에 더욱 충실할 수 있었다면, 오늘의 결말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겠지요. 심지어 저는, 마지막 순간에까지도 황태자 전하의 흑발 호위만큼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였으니까 말입니다.”

“…….”

“데미안 카이엔이라 하였던가요. 마지막 순간에 온몸을 던져 황태자 전하를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낸 흑발 호위 말입니다. 그 또한 비통해하고 있습니다. 아니, 황도와 제국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마음으로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짐은, 나만큼은 오히려 꿋꿋해야 한다는 뜻인가? 황제이기에? 어깨에 짊어진 책임감 때문에?”

“예.”

“그대는 잔인하구나, 나의 친우여.”

“신하가 아닌 친구이기에 이토록 기꺼이 잔인할 수 있는 거겠지요. 아스토, 당신을 위해서.”

“……그래, 그렇겠군.”

황제는 너털웃음을 흘려냈다. 열흘 만에 지어보는 미소였다. 그가 말했다.

“그렇기에 미안하네. 이번만큼은 자네의 조언을 따르지 못할 것 같군. 나는 이곳을, 내 아들을 지키고 있겠네.”

“아스토, 하지만…….”

“이번만큼은 자네가 날 이해해주게. 항상 그랬겠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나를 내버려두어 주겠는가?”

“…….”

근위대장 로베르토 경은 보았다.

열흘 만에 짓는 황제의 미소.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아니었다. 그렁거리는 눈가의 주름이 차례차례 젖어가고 있었다. 평생의 친구이자 심복인 자신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겠지.

“……명을, 따르겠습니다.”

로베르토 경이 병실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황제는 홀로 남았다. 아니, 황태자와 단둘이 남겨졌다. 무의식중에 흘러나오는 한숨. 그리고 저도 모를 읊조림이 새어나왔다.

“미안하구나.”

황태자에게 건넨 말일까.

아들에게 내민 손길일까.

“미안하고, 또 미안하구나.”

이것은 속죄일까.

혹은 굳은 다짐일까.

그도 아니라면, 구차하게 매달리는 애원일까.

모르겠다.

그렇기에 감히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는 못하겠다. 하여 가소롭게도 아들의 손을 꼭 쥔 채로 마음속으로만 다짐하고, 또 다짐할 뿐이었다.

‘네가 다시 눈을 뜬다면, 다시 눈을 떠 주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언젠가 다시금 네가 위험에 처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두 번 다시 너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다. 짐이, 이 아비가 너를 대신하여서라도 모든 것을 내어놓으마.’

아들의 손을 쥐고 또 쥐었다.

내쉬는 숨결마다 후회가 깃들었다. 내내 병약하였던 황태자. 이 아이를 먼저 포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는 아니 되었다. 아비가 아닌 지배자로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 변명하여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리하였다.

자신은 최악의 아버지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의 방법도 없다. 그렇기에 이처럼 구차하게 기도하고, 애원할 뿐이었다. 눈을 뜨지 못하는 아들의 손등 가득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며, 행여나 소리가 새어나갈까 걱정하며 신음하듯 울음을 삼킬 뿐.

덕분에 라키엘은…… 죽을 맛이었다.

“…….”

미치겠다.

사실은 10분쯤 전에 정신을 차렸는데. 얼마 만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식이 돌아왔는데. 몽롱하고 힘이 없지만 그래도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걸 깨달았는데. 안전한 병실에 누워 있고, 사지가 멀쩡하다는 것도 확인했는데.

눈을 뜰 수가 없다!

이대로 눈을 뜨기엔 너무나 민망했다!

‘어휴, 황제 이 양반. 보기보다 감수성이 예민해가지고.’

의식을 되찾자마자 들려온 것은, 황제가 억지로 울음을 삼키는 소리였다. 그리고 아주 작게 속삭이며 다짐하는 혼잣말이었다. 뭐, 대략, 다시는 너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다는 둥, 제발 깨어나기만 해달라는 둥, 그런 내용이었다.

그래서 부담스러웠다.

황제의 마음이 너무나 진심이라서. 그게 느껴져서. 자신이 감히…… 진짜 라키엘인 것처럼 저러한 진심을 넙죽 받아도 되는 건가 싶어서.

그건 마치, 죄를 짓는 것만 같아서.

그런 듯만 하여서.

“…….”

라키엘은 뜨려던 실눈을 다시 감았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겠다. 잠시만 더 자연스럽게 있자. 나중에 황제가 좀 진정이 되거나 자리를 비우면, 그때 깨어난 척을 하자.

그렇게 기다렸다.

황제는 한참을 울었다. 그러다 지쳐 잠이 들었다. 덕분에 라키엘은 새벽이 더욱 깊어서야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딩동!

마치 이쪽이 눈을 뜨기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뜻밖의 메시지가 눈앞을 장식했다.

[체질 변화 알림 : 당신이 흡수한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 일부가 당신을 새롭고 강력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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