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나를 울리는 사람들 (2)
딩동!
귓가에 울리는 알림음.
이내 눈앞을 채우는 메시지.
[체질 변화 알림 : 당신이 흡수한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 일부가 당신을 새롭고 강력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였습니다.]
“…….”
이건 또 무슨 귀신 콘푸로스트 까먹는 소리일까.
라키엘은 잠깐 멍하니 메시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슬쩍 곁눈질로 황제의 기색을 살폈다.
다행이다.
황제는 여전히 잘(?) 졸고 있다.
‘힘들었겠지.’
아까 로베르토 경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열흘 꼬박 병상 곁을 지켰다던가. 그 상태에서 숨죽여 울고 하느라 체력과 심력의 소모가 컸을 거다. 생각해보면 황제 저 양반도 50이 넘은 나이인 데다, 뇌졸중도 앓았던 몸이니까.
어쨌건 당분간은 황제가 깨어날 일이 없겠다. 그럼 다시 메시지를 살펴보자. 라키엘은 눈길을 허공으로 돌렸다.
[당신은 열흘 전, 개인적인 탐욕과 노력을 동반한 끝에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의 정혈’ 일부를 흡수하였습니다.]
[당신은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의 정혈’ 일부를 흡수한 상태에서 신진대사 ‘8282 모드’를 연거푸 한계까지 사용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의 신체가 혹사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마나하트의 방어기제가 느슨해졌으며, 평소라면 거부반응에 막혔을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의 정혈’이 마나하트에 성공적으로 깃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비정상적 과정 끝의 기연이 당신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었습니다.]
‘어?’
죽음의 구렁텅이? 내가?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문득, 짐작 가는 구석이 떠올랐다.
‘설마 만년필을 연달아 발사하느라 기력이 완전히 고갈돼서…… 죽을 운명이었던 건가?’
추측에 대한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딩동!
[열흘 전, 당신은 무구 : 만년필을 한계까지 사용한 것도 모자라 폭주하는 열폭풍 속에서 버티며 최후의 기력까지 고갈되는 상황을 맞이하였고, 그 끝에 심각한 탈진으로 사망할 운명이었습니다.]
[이때, 마나하트에 깃든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의 정혈’이 임시로 심장 역할을 해주며 신체기능을 유지하여 줄 소량의 마나를 지속적으로 제공하였습니다.]
[그러한 일련의 특수한 과정에서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의 정혈’이 당신의 신체에 더욱 자연스럽게 동화되었고, 열흘의 숙성과 싱크로 조정 기간을 거쳐 마침내 당신의 완벽한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연이 당신에게 놀라운 체질 변화를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신체가 조건부로 강화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해주세요.]
“…….”
그래. 좀 보자.
라키엘은 <여기>를 눈도장으로 콕 찍었다. 자세한 내용이 눈앞에 주르륵 펼쳐졌다.
딩동!
[조건부 신체 강화]
[당신의 신체에 완벽하게 깃든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의 정혈’이 유용한 권능을 선사합니다.]
[매일 밤, 당신의 모든 신체 능력이 1.5배 향상됩니다.]
1.5배?
지구력과 근력, 속도, 그 밖의 모든 능력이 전부 다?
그때였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뜻밖의 개이득에 환호합니다.]
[심장 : 밤마다 심장 펌프력 1.5배!]
[허파 : 나도…… 허파핰ㅋㅋ]
[대장 : 괄약근 근력 상승으로 급똥 참기 인내력도 1.5배!]
[간장 : 알코올 해독 능력도 뻥튀기!ㅋㅋ]
[위장 : 야식도 1.5배 먹을 수 있다굿? 캬ㅋ]
[콩팥 : 오줌도 1.5배 생산할 수 있음!]
[비장 : ……잠깐. 다들 너무 하찮은 능력에만 집중하는 거 아님? 밤에 상승하는 능력이라면 그딴 것들보단 훨씬 중요한 게 따로 있다고 보는데?]
[콩팥 : 훨씬 중요한 게 뭐임?]
[비장 : 정려ㄱ…… 읍읍!]
[전연령 작품의 수위를 깨부수려 시도한 비장이 빠르게 진압되었습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신체능력 향상에 기뻐하며 5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21,100]
“…….”
라키엘은 잠시 가출할 뻔했던 어이를 붙잡았다. 그 사이에도 메시지가 계속해서 출력되었다.
딩동!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의 정혈’은 야간 신체능력의 상승 외에도 부가적인 권능을 당신에게 부여합니다.]
[뱀파이어 로드의 권위 일부가 당신의 숨결과 눈빛, 모든 행동에 자연스럽게 깃듭니다.]
[이에 따라, 이 세상의 모든 일반급 뱀파이어는 당신과 만나는 즉시 본능적인 위압감과 복종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메시지는 여기까지였다.
다 읽고 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개이득이네.’
야간 한정으로 신체 능력 강화. 이것도 꿀이었다. 하지만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모든 뱀파이어에 대한 위압감과 복종심 유발.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엄청난 자산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라키엘?”
귓가에 불현듯 들려오는 목소리.
조금은 떨리는, 혹은 놀란 듯한, 그 놀람이 기쁨과 환희로 번지는, 하지만 그러한 감정의 흐트러짐을 끝끝내 간신히 자제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황제가 선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이쪽의 깨어난 모습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리는 눈길을 보내어 오고 있었다. 그 눈빛만으로 이쪽의 온 얼굴을 죄다 다급하게 쓰다듬고 확인해보는 듯한, 그런 눈길이었다.
“정신이…… 들었느냐?”
“……예.”
라키엘은 입술을 깨물고 싶은 걸 참았다. 딱 걸렸다. 제법 민망했다. 이래서 황제와 단둘이 있을 때에 의식을 되찾은 티를 내지 않으려 했던 건데. 당신의 과분한 애정과 마주치게 되는 이런 상황이 부담스러운데.
내가 이런 거, 받으면 안 되는 건데.
“아픈 곳은 없느냐?”
“예, 아마도.”
“불편한 곳도?”
“예, 다행히.”
“그래. 그렇구나.”
웃는 걸까. 그러고 보니 황제가 저런 표정으로 웃는 건 처음 봤다. 평소엔 항상 찡그린 듯한 얼굴이었는데. 그래서 부담스럽고 깐깐하게만 느껴졌는데. 그런데 저렇게 웃으니까 꼭, 그냥 동네 아저씨처럼 보일 수도 있는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더 난감하다.
‘왜 자꾸 우리 아버지처럼 구는 건데…….’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다.
마냥 따사로운 분은 아니셨다. 오히려 무뚝뚝함에 가까웠다. 우리네 평범한 아버지들처럼 영 표현을 할 줄을 모르셨다. 그래서 항상 깐깐하게 보였고, 집에선 인상만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아니었다. 딱 저렇게 웃으실 때가 간혹 있었다. 예를 들자면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통닭을 사들고 오신 날. 그런 날엔 아버지도 딱 저런 웃음을 짓곤 하셨다.
그래서 몰랐다.
그런 날이, 아버지가 회사에서 유독 힘드셨던 하루였다는 걸. 상사에게 깨지고, 억울하게 책임을 덮어쓰고, 그럼에도 항변조차 하지 못해서 속앓이만 거듭한 날이었다는 것을. 나는 정말로 몰랐다.
그런데 지금 황제가 그때 봤던 아버지와 똑같이 웃고 있다. 평소와 너무나 다른. 실없어 보이는. 가만히 보면 눈동자로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그래서 함부로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게 되는, 딱 그러한.
그래서였다.
라키엘은 치미는 추억과, 저도 모르게 깨물어지려는 입술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대신 황제를 빤히 마주 보며 물었다. 뻔뻔하게. 치미는 감정을 들키기 싫어서. 더욱 뻔뻔하게.
“한데, 폐하? 오늘은 저를 혼내지 아니하시는 것이옵니까?”
“으음?”
“제가 제법 오래 병상에 머물러 있었던 듯하온데…….”
“그래서, 짐에게 혼쭐이 나고 싶다는 것이더냐?”
“아, 그건 아니옵고…….”
“하면?”
“어쩐지 허전하여서 말이옵니다.”
“…….”
“폐하께오서 평소부터 어찌나 저를 닦달하시었는지, 이제는 눈을 마주칠 때마다 혼찌검이 나지 않으면 허전한 지경에 이르러 버렸사옵니다.”
“정녕 혼이 나고 싶다는 뜻이로구나.”
“그것까진 아니긴 하온데, 예를 들자면 말이옵니다. 평소였다면, 마젠타노의 핏줄을 이어받은 주제에 별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나 오래 침상에 드러누워 나약한 꼴을 드러내서 어쩌고저쩌고, 네 어깨에 얹힌 책임과 만인의 시선을 자각하여야 하는데 블라블라, 뭐 이런 덕담들이 들리지 않으니 영 어색해서 말이옵니다.”
“허허, 그랬더냐?”
“예, 폐하.”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네가 정녕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실로 송구하옵니다, 폐하.”
“말로만?”
“그 또한 송구하옵니다.”
“이제는 대놓고 뻔뻔하기까지.”
“그 또한 역시나 송구하옵니다.”
“그래. 송구해야지. 미안해야지. 짐에게가 아닌, 쓰러진 너를 보며 열흘 내내 슬퍼하고 노심초사하였던 다른 모든 이들에게 말이로다.”
“……예?”
라키엘은 뜨끔했다.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그때였다.
황제가 금줄을 당겼다. 줄에 매달린 종이 울렸다. 맑은 소리가 울리자마자 거짓말 안 보태고 3초 만에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깊은 새벽, 복도의 일렁이는 불빛을 등진 이들이 보였다.
“……전하?”
데미안이었다. 비록 목발을 짚고 있었지만, 한쪽 팔엔 깁스 같은 부목을 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실루엣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녀석이 절뚝이며 다급히 다가왔다. 발치에 나란히 달려오는 환상종들과 함께였다.
“꼬슴!”
“뽀보!”
“코몽!”
“꾸꺄!”
꼬슴이, 뽀복이, 코몽이에 꾸꾸까지. 통실통실한 세 환상종과 꾸꾸가 제일 먼저 도도도 달려오더니 병상으로 폴짝 뛰어 올라왔다. 인사나 안부를 나눌 틈도 없이 토실토실한 궁디며 온몸을 온통 얼굴에 부벼 왔다!
“꼬!”
“뽀!”
“코!”
“꺄!”
“……어악?”
숨을 못 쉬겠다. 그런데 미안해서 뭐라 말을 못 하겠다. 대광장에서의 혈투. 모두가 급성 빈혈에 시달리던 그때. 이 아이들에게 뱀각산을 먹이지 않았던 선택이 조금은 미안해서였다.
‘하지만…… 얘들이 피 튀기는 싸움터에 참가하는 건 싫으니까.’
솔직히 그랬다. 그런 건 이미 크라노스에서 겪게 했다. 다시 그러고 싶진 않다.
‘그렇지, 데미안?’
아이들에게 시달리며(?) 눈길을 돌렸다. 병상 곁으로 다가온 데미안 녀석이 보였다. 그 뒤로도 다른 이들이 차례로 병실에 들어오고 있었다.
가르딘 경은 벌써부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별궁의 경비책임자 프란델 경, 특근대원들, 아니스, 2황자 테오도르와 엘프족 집행자 실비아까지. 모두가 단체 병문안이라도 온 듯이 우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단 1분도 안 되는 사이에 말이다.
“…….”
이게 뭔.
설마 저 모두가 병실 앞에 오순도순 모여 있었던 걸까.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일단 별로 현실적이지 않아 보이잖아.
그런데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다들, 이 앞에서 대기라도 타고 있었던 거야?”
황당해져서 물었다.
가르딘 경이 눈물을 훌쩍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지요. 저는 전하의 주치의니까 말입니다.”
그 대답이 시작이었다.
프란델 경과 특근대 최고참 세르지오, 수간호사 아니스, 2황자 테오도르와 엘프 실비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각자의 이유를 밝혔다.
“저는 이곳 병실을 포함한 별궁 전체의 경비 책임자입니다. 그런 제가 전하가 계신 병실 앞을 지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저희 특근대야말로 전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속옷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전하!”
“제가 별궁 한의원의 수간호사잖아요? 그러니 현재 최고 등급의 VVVIP 환자인 전하의 병실을 체크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입니다.”
“저는…… 형님의 동생이니까 마땅히…….”
“숲을 태운 보상, 잊은 건 아니지?”
“…….”
뭐 대강 알겠다.
결론만 말하자면 많이 걱정했다는 거구나. 그런데 다들 참 솔직하지 못하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
“하.”
라키엘은 실소를 머금어 버렸다.
비로소 조금은 실감이 났다.
나, 여기선 외롭지 않은 걸까. 바람 시리게 불던 양화대교, 그곳을 혼자 쓸쓸히 걷던 겨울날과는 조금은 달라진 걸까. 어쩌면 그래서인 건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마음에도 없는 대꾸를 내뱉은 것은.
“새벽부터 쓸데없는 걱정들은. 다들 가서 잠이나 자든가.”
그런데 왜 콧등이 아릿해져 버린 걸까.
다들 웃는 얼굴로 울먹이는 걸까.
모르겠다, 정말로.
알겠다, 조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