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첫 페어링의 효력 (1)
눈앞이 콱콱 답답해진다.
한숨이 절로 새어나온다.
‘하아.’
앙부아즈의 왕녀, 아델린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텅 빈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방금까지 황제와 유혈 없는 전쟁을 벌였던 협상 테이블. 전사자의 시신처럼 곳곳에 널브러진 서류들.
진이 빠졌다.
황제 때문이었다.
‘요즘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왕녀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최근, 황제의 협상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다. 안 좋은 쪽으로. 아예 칼을 갈고서 이쪽을 잡아먹을 듯이 깐깐하게 굴었다. 듣자마자 숨이 턱 막히고 기도 탁 막히는 엄청난 요구조건을 툭툭 내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협상 초기의 며칠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물론 이번 협상이 쟈빌론의 난동을 배상하는 성격이다 보니, 이쪽이 지극히 불리한 입장이긴 했다. 그럼에도 황제의 태도가 우호적이었다. 그 점을 다행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배상금액이 문제가 아니야. 일방적인 무역 관세의 조정에다가, 국경 관문의 독점적인 관리 권한까지 요구하다니……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통상적인 배상의 범주를 넘어도 많이 넘었다. 거의 굴욕외교, 혹은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나 치를 법한 일방적인 강요에 가까웠다.
자신도 그 점을 황제에게 항변했다. 합리적이지 않다고.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를 흔드는 과도한 요구라고.
그런데 씨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의 더욱 깐깐한 표정과 눈빛만 돌려받았을 뿐.
‘우리가…… 뭔가 큰 실수를 했나?’
아니,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는데.
자신도, 협상단도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불쾌하게 만들 법한 언행은 전혀 하질 않았는데. 그런데 왜 갑자기 저렇게 태도가 확 돌변해서 이쪽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칼을 갈아대는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시금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울러, 제국의 황태자에 대한 묘한 동정심과 존경심이 무럭무럭 피어나기도 했다.
‘황태자…… 알고 보니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왜 아니겠는가.
하루가 머다하고 저토록 깐깐하고 까칠하며 종잡을 수 없는 황제와 부대끼며 살아왔을 것이 아닌가. 자신은 며칠 협상 테이블에서 시달린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고 숨이 턱 막힐 지경인데. 황태자는 저런 사람을 아버지로 두고서 평생을…….
“후우.”
대단하다.
진심으로 대단하다.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훗날 황태자에게 시집갈 여자도 참 대단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황제를 시아버지로 모셔야 할 거니까.’
참 대단하고, 불쌍하고.
누가 될지는 정말로 모르겠지만.
“…….”
왕녀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녀를 일깨운 것은, 잠시 후에 들려온 어느 수행원의 목소리였다.
“왕녀님, 황제 측에게서 전달사항이 왔습니다. 다음 회의는 내일로 다시 잡자는 소식입니다.”
“내일? 한 시간 후에 재개하는 게 아니라?”
“그렇습니다, 왕녀님.”
“……후우, 알았어. 그럼 오늘은 이만 숙소로 돌아가도록 하지. 회의 자료는 잘 챙기고. 그대들도 수고했어.”
“알겠습니다. 그런데…… 왕녀님? 혹시 오늘도 들르실 생각이십니까?”
“별궁 한의원?”
“그렇습니다.”
수행원의 물음에 왕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가야지, 당연히. 내 당숙이 입원해 있는데.”
그러하다.
당숙이자 장군인 에두아르. 그가 장기간 입원해 있는 별궁이다. 하니 조카이자 수행단의 대표인 자신이 문병을 위해 별궁 한의원에 가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겠는가.
“처음으로 입원이라는 걸 경험하고 계실 테니까. 그것도 낯선 타국에서 말이지.”
역시나 그러하다.
얼마나 아프고 외로울까.
“그럼, 출발할까?”
황태자를 보…… 아니, 당숙을 문병하러. 전쟁터 같던 회의장을 벗어나 별궁으로 향하는 왕녀 아델린. 그녀의 발걸음이 어쩐지 모르게 가벼워졌다.
♣
딩동!
[가까운 거리에서 연결 가능한 다수의 정령을 탐지하였습니다.]
[탐지된 정령 중의 하나가 연결을 수락하였습니다.]
[‘캡사이신의 정령’과 페어링을 시작합니다.]
‘어?’
라키엘의 고개가 갸웃.
방금 조제한 탕약을 산지직송(?)으로 장군 에두아르에게 원샷 시키려던 그는 멈칫했다. 그리고 눈앞을 야물딱지게 채우는 메시지를 쳐다보았다.
그 내용이 심히 놀라운 까닭이었다.
‘뭐야. 맨날 다수의 정령이 탐지됐다고만 그러고 끝나더니?’
오늘은 달랐다.
후속(?) 메시지가 반갑게 주르륵 떠오르고 있었다!
‘정령과 페어링? 캡사이신의 정령?’
이거…… 실화?
심봉사 눈 뜨듯이 눈이 번쩍 뜨였다. 일단 정령의 이름이 캡사이신이라는 점의 괴상함은 상관없었다. 정령이란다. 드디어 자신에게 연결을 허락했단다. 그게 중요하다.
‘캡사이신이건 우라늄이건 정령이면 된 거지!’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거래처를 뚫을 때가 그렇다. LxL 게임에서 상대방의 첫 타워를 먼저 깰 때가 그렇다. 썸 타던 이성에게 고백할 때도 그러하다.
가장 어려운 첫 스타트.
그걸 무사히 뚫어내면?
그다음부터는 한결 수월해진다.
정령과의 교감 또한 그렇다고 여겼다.
‘하나가 응답을 해왔다는 건, 그동안 나한테 쌓아두고 있던 비호감 적립이 없어졌다는 거잖아? 그럼…… 앞으로 다른 정령들도 차례로 날 받아들이겠지?’
생각만 해도 2심방 2심실이 설레발설렘의 트월킹을 추며 열심히 쿵덕거렸다.
하지만 누가 말했던가.
세상사 쉽게 되는 거 없다고. 함부로 설렜다간 뒤통수 맞기 딱 좋다고. 그걸 증명하듯, 라키엘의 입꼬리가 스윽 말려 올라가려는 찰나였다. 뜻밖의 난관이 눈앞을 떡 채웠다.
딩동동!
[캡사이신의 정령과 페어링이 완료되었습니다.]
[정령과의 본격적인 교감을 시작하려면 보안 자격을 획득하여야 합니다.]
[정령과의 교감을 시작하기 위한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주세요.]
‘…….’
비번?
이건 무슨 와이파이나 블루투스 연결도 아니고. 난감해졌다. 그는 무의식중에 속으로 반문했다.
‘뭔 밑도 끝도 없는 비번이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딩동!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나요?]
[비밀번호 찾기 메뉴를 선택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예스지!’
일단 매달려볼 만한 동아줄이 생겼다. 라키엘은 냉큼 예스를 외쳤다. 그러자 떠오르는 다음 메시지란…….
[비밀번호의 힌트는 객관식 수수께끼로 제공됩니다.]
[Q : 역사상 고춧가루를 먹은 사람을 한 명도 해치지 않은 착한 동물은 무엇일까요?]
[1. 사자]
[2. 늑대]
[3. 악어]
[4. 상어]
[5. 티라노사우루스 렉스]
‘……5번! 티라노사우루스 렉스!’
보자마자 잽싸게 답했다. 답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다. 다행히(?) 응답이 곧바로 왔다.
딩동댕↗
[비밀번호 입력 완료]
[캡사이신의 정령과 교감이 시작됩니다.]
……사아아앗!
어디선가 커튼이 열리는 듯한 부드러운 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변화가 시작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발그레한 색깔의 무언가가 은근슬쩍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어딘지 익숙한 실루엣.
라키엘은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빨간색…… 청양고추?’
- 옙!
빨간 고추, 아니, 캡사이신의 정령이 머리 대신 달린 고추 꼭다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중하게 덧붙였다.
- 반갑습니다? 저는 이 세상 모든 매운맛의 친구이자 스코빌 지수의 수호자, 캡사이신의 정령입니다. 혹시 오늘 아침도 혀 떨어져 나가는 매운맛으로 힘찬 하루를 시작하셨나요?
‘어? 응?’
- 캡사이신은 교감 신경을 활성화하고, 체온 상승과 함께 땀샘 분비를 촉진합니다. 아드레날린요? 엔도르핀요? 물론이죠! 저를 먹으면 행복해집니다. 속이 뜨끈해집니다. 대신 좀 과하게 먹어서 소화기 염증 좀 생기면 어때요. 암 방지 면역세포 기능 저하? 괜찮아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까짓거!
‘어, 으음…….’
- ……하지만 저와 친한 존재가 그렇게 아픈 건 싫단 말이죠. 그래서 제가 다른 정령들의 만류를 무릅쓰고서라도 당신과의 교감을 진행한 거고요?
‘뭐?’
라키엘은 눈썹을 찡그렸다.
처음엔 뭔 정신 나간 정령인가 싶었다. 그런데 듣다 보니 아니었다. 방금 캡사이신의 정령이 한 말에서 뭔가 의미심장한 단서가 느껴졌다.
‘너랑 친한 존재가 아픈 게 싫다고? 혹시?’
- 네. 장군 에두아르입니다.
‘역시.’
옳거니.
라키엘은 물었다
‘에두아르 장군이 위장 염증과 궤양에 시달리는 건 맞아. 너도 알겠지? 그런데 네가 굳이, 지금 내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뭔가를 말한다는 건…… 설마, 내가 놓친 질환의 원인이나 치료법이 따로 있어서 알려주러 온 건가?’
- 맞습니다.
정령이 꼭다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고자질을 시작했다.
- 당신은 우리의 오랜 친구 에두아르를 치료하고자 많은 노력을 해왔지요. 그런데 혹시, 장군이 당신 몰래 고춧가루를 흡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뭐?’
- 사실입니다. 에두아르는 매운맛을 좋아하고, 즐깁니다. 특히 고춧가루를 좋아합니다. 그것도 굉장히 특이한 방법으로 말입니다.
‘특이한 방법이라면……?’
- 독한 술에 고춧가루를 풀어서 원샷.
‘…….’
이게 뭔.
라키엘은 할 말을 잃었다. 듣는 순간, 소주에 고춧가루를 풀어서 원샷을 하는 아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주 가끔 그런 분들이 있다. 아니, 실제로 만나본 적도 있다. 심각한 위궤양 때문에 자신의 한의원을 찾아왔던 어느 할아버지 환자분이 그랬다.
말렸다.
절대로 그러시면 안 된다고. 그거, 위장을 망가뜨리는 최선의 지름길이라고. 그런데도 도통 듣질 않으셨다. 고춧가루를 안 풀면 소주 맛이 안 난다나 뭐라나.
‘그리고 결국 돌아가셨지.’
만류하는 말도 안 듣고.
큰 병원에라도 가보시라 해도 안 듣고.
자기는 그저 침만 좀 맞고 뜨끈하게 누워 있다가 가면 된다고 한사코 고집만 부리시던 할아버지 환자분은 그렇게 결국, 어느 날 자택에서 피를 토하며 119에 실려 가시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셨다.
그런데 지금…….
‘이 인간, 아니, 하프엘프가 그딴 음주습관을 가졌던 거라고?’
라키엘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장군을 쳐다보았다. 그런 이쪽의 눈길을 느낀 걸까. 병상에서 탕약을 받아들고 있던 장군이 어깨를 움츠렸다.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제국의 황태자시여?”
“…….”
라키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캡사이신의 정령에게 물었다.
‘하지만 장군은 여기 입원한 뒤로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 맞아요. 하지만 대신 물은 마셨습니다?
‘그 말뜻은…… 술 대신에 물에 고춧가루를 풀어서 마셨다는 거? 내가 못 보는 사이에? 몰래?’
- 정답입니다.
“…….”
이제 좀 알겠다.
어째서 그동안 탕약의 약빨(?)이 생각보다 나오지 않았던 건지. 왜 장군의 회복이 예상보다 더뎠던 것인지. 그리고 캡사이신의 정령이 난데없이 이쪽과 교감을 시작한 이유도.
‘그걸 고자질…… 아니, 알려줘서 장군을 살리려고?’
- 친구니까요.
‘그래. 알겠다.’
라키엘은 정령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그리고 장군을 묘한 눈초리로 빤히 쳐다보며 툭, 말했다.
“환자분? 에두아르 씨?”
“……예?”
이쪽의 말투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걸까. 장군이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러라고 목소리를 착 깐 거니까.
“있지요?”
“예?”
“저 몰래 숨긴 거 말입니다.”
“예에?”
“쓰읍. 왜 이러실까. 고춧가루 압수.”
“……!”
알보-세븐 바른 총알에 맞은 사람처럼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장군!
그러나 얄짤없었다.
“아니스!”
외쳤다.
이쪽이 부르자마자 아니스와 웨어울프 수간호사들이 입원실로 들이닥쳤다. 잠시 소란이 일었다. 장군이 소중하게 숨겨둔 고춧가루가 모조리 털렸다.
그리고 열흘이 지났다.
고춧가루를 끊으니 비로소 장군에게 먹이는 탕약의 약빨이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물론 장군의 표정에서는 행복이라는 감정이 사라졌다. 밍밍하기 그지없는 병원 식사에 하루하루 미각과 영혼이 털려나가는 듯했다.
그래서였다.
“이게 그렇게 맛이 없습니까? 억울하십니까? 그럼 저도 병원식, 같이 먹지요.”
라키엘은 선뜻 장군의 병원식 고행(?)에 동참했다. 물론 한국식 입맛을 지닌 그에게도 병원식은 심심하기가 그지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환자를 위한 길이니까. 특히나, 보통 인간보다 몇 배는 긴 수명을 지닌 이를 진료하고 무더기 보너스 수명을 퍼 받을 기회니까.
‘절대 못 놓치지!’
이를 갈고서 병원식을 함께 먹었다. 그런 모습 때문이었을까. 감동을 받은 까닭이었을까. 어느샌가부터 장군의 반찬 투정(?)이 사라졌다.
약효가 더 잘 올라왔다. 시침의 효과 또한 그러했다. 아니, 보통의 인간과 차원이 다른 회복력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보름이 더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딩동!
[당신은 적절한 식이요법과 탕약, 시침의 활용으로 환자 : 에두아르 앙부아즈를 성공적으로 진료하였습니다. 그의 위궤양과 헬리코박터-파일로리 박테리아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향후 자극이 적은 식단과 탕약의 꾸준한 복용으로 위산의 작용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시, 그는 다른 하프엘프들과 달리 튼튼한 위장과 함께 천수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진료비 청구 (Lv.2) 스킬이 발동됩니다.]
“…….”
마침내 왔다.
보너스 수명, 피버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