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티끌도 밟으면 꿈틀한다 (3)
- 타차원의 티끌이. 감히.
“……!”
영혼부터 짓눌리는 느낌. 아득한 압도감. 거인과 마주한 미물의 절망. 이것이 신화적 존재가 지닌 힘일까.
라키엘은 눈을 부릅떴다.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완벽한 허무의 어둠. 까마득한 암흑의 공간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심해의 우주에 홀로 던져진 듯이.
‘어째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병실에 있었다. 마침내 추출한 인슐린을 데미안에게 주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꼴이다. 주삿바늘을 데미안의 몸에 찌르자마자, 거대한 목소리와 함께 이 아득한 암흑의 공간에 내던져져 버렸다.
아니, 내던져진 것은 나의 영혼인가. 혹은 이곳은 환각으로 이루어진 공간인가. 그도 아니라면 저놈이 웅크리고 있는 세계의 일부인가.
‘마계왕…….’
중얼거렸다.
그놈이다.
확실하다.
거대한 목소리와 존재감. 전신의 솜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특유의 오싹함까지. 겪어본 적이 있다. 어디서? 크라노스에서. 무너지던 협곡에서. 데미안 녀석의 내면에서 눈을 뜨던 마계왕을 저지하던 순간에.
그때도 지금과 같았지.
- 타인의 몸을 빌린 기생자여. 그대는 끝끝내 나의 길을 막아서려는 것인가?
다시금 울리는 목소리.
영혼 전체가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목소리만으로도 끔찍하게 아팠다. 온몸이 분쇄되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손아귀에서 힘이 쭈욱 빠져나갔다.
그때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어?’
내 손에 뭔가가 들려 있다.
익숙한 물건이다.
주사기니까.
한데 어째서 이 공간에 영혼만 끌려왔는데, 내 손에는 주사기가 들려 있는 걸까. 그리고 주사기 안쪽에 용액이 담겨 있는 걸까.
그래.
알겠다.
저거, 인슐린이구나.
실제 주사기인 걸까. 아니면 내 고집, 혹은 마계왕의 집착이 불러온 허상인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내 손아귀의 힘이 계속해서 빠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안 돼.’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주사기를 놓으면 안 된다. 놓치면 끝장이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주사기를 놓는 순간 마계왕이 원하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것만 같다는 느낌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또한, 마계왕이 그걸 바라고 있다는 사실도.
‘으읏……!’
이를 꽉 깨물며 버텼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추출한 인슐린이었다. 그걸 내어주기는 싫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제발.’
간절한 바람과는 반대로, 손아귀와 팔뚝은 점점 무력해져 갔다. 아니, 사실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아득한 어둠 속에 둥둥 떠 있는 신세니까. 신화적 존재에게 불려 온 미물, 그것만이 선명한 현실이었다.
현실.
그래.
잔인하고 냉정한.
현실.
현……실?
‘아니잖아, 이거. 현실.’
얼핏 든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들어올렸다. 막막하고도 아득한 심연의 공간. 오로지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없는 어둠뿐인 공간. 하지만 이건 현실이 아니다. 여기로 끌려온 나도 현실의 육신이 아니다.
이건 아마도…….
‘마계왕이 만든 환영, 환각이겠지.’
그리고 이걸 통해서 내 영혼을 압박하고, 짓누르고, 진료를 방해하려는 것이겠지.
그래.
의료 방해.
어째서?
생각해보니까 간단한데.
‘설마 마계왕, 불안해하고 있는 건가.’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확신이 들었다. 내가 추출한 인슐린이 효력이 있을까 봐. 기껏 데미안에게 불러온 급성 1형 당뇨병이 호전되어 버릴까 봐. 그래서 데미안의 육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못하게 될까 봐.
그러면…… 현세에 강림하겠다는 계획이 또 물거품이 될 테지.
‘그걸 걱정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건…….’
내 인슐린 추출액이 제대로 만들어졌다는 뜻인 거다. 하여 마계왕이 내 의식을 이런 곳으로 불러들여서 압박하고, 방해를 하려는 거다.
그걸 깨달은 덕분이었다.
‘……하.’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손에 들린 주사기?
더는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진짜 주사기도 아니니까. 그저 마계왕이 만든 환영에 불과한 것이니까. 내 마음을 꺾으려고, 의지를 짓밟으려고, 시도를 포기하게 만들려고 만든 장치에 지나지 않으니까.
집착할 필요가 없다.
아니, 집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말려드는 꼴이다.
‘이런 것 따위.’
놓았다.
그토록 붙잡고 버티려 애쓰던 주사기를 놓는 순간,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물론 여전히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신화적 존재가 선사하는 압도적 위세 앞에 전신이 부서질 듯 떨리고 있지만.
영혼이 짓밟혀 짓뭉개지듯이 막막하지만.
그럼에도 웃음이 나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쪽의 인슐린 주사에 마계왕이 보이는 저런 위압적인 태도. 그 행위 속에 숨은 본질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스케일은 우주적으로 거대하게 느껴지지만…… 정리해보면 그냥 심플하잖아. 의료 방해 행위.’
바로 그러했다.
문득, 한국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한의원을 운영하다 보면 아주 가끔 이것과 비슷한 상황을 겪고는 했다. 주로 환자의 가족에 의해서였다.
당신이 뭔데 우리 어머니 몸에 함부로 침을 찌르느냐고 경찰을 불러오는 사람. 이거 전부 사이비 진료 아니냐고 트집을 잡으며 한의원 입구를 막아서고 다른 환자를 쫓아내는 사람. 심지어 멀쩡히 인증받고 나온 한약을 식약처에 신고하겠다며 원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협박하는 사람까지.
아닐 것 같다고?
천만에.
설마 진짜로 그런 일이 있겠느냐고?
물론 있다.
세상에는 상식을 뛰어넘는 사람이 상식 밖으로 무궁무진한 법이었다. 이쪽도 한의원을 실제로 운영하고서야 그걸 비로소 깨달았더랬다.
그런 현실 속 악전고투의 경험들 덕분(?)이었다.
내내 압도감에 짓눌리던 영혼 한구석에 숨구멍이 뚫렸다. 실낱같은 여유가 생겨났다. 그 틈새를 통해 새로운 감정이 싹텄다. 그 감정의 정체는 바로…… 의료인으로서의 분노였다.
“……대한민국 의료법, 제12조.”
무의식중에 읊조렸다.
분노를 담아서.
아득한 어둠의 공간을 향해.
“의료기술 등에 대한 보호.”
- 뭐?
눈썹을 찡그린 것일까, 마계왕은. 혹은 미물의 반항에 고개를 갸웃한 걸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상관없다.
자연스럽게 치미는 울분.
그걸 가득 담아 뇌까렸다.
“1항. 의료인이 하는 의료, 조산, 간호 등 의료기술의 시행, 이하 의료행위에 대하여는 이 법이나 다른 법령에 따로 규정된 경우 외에는 누구든지 간섭하지 못한다.”
당연하다.
물론 한의사 또한, 의료법으로 지정된 의료인이다.
- 타차원의 티끌이여. 혹시, 벌써 정신과 이성이 붕괴된 것인가?
마계왕의 비웃음이 귓가를 후벼 팠다.
정신과 이성이 붕괴?
두려움에 짓눌려서?
아니, 천만에.
나 지금 빡쳤다니까.
“2항. 누구든지 의료기관의 의료용 시설, 기재, 약품, 그 밖의 기물 등을 파괴, 손상하거나 의료기관을 점거하여 진료를 방해하여서는 아니 되며, 이를 교사하거나 방조하여서는 아니 된다.”
까마득한 심연을 향해 말했다. 아니, 선언했다. 마계왕의 압도적 존재감에 맞서듯 고개를 들었다. 대우주와 마주한 듯한 아득함에 눈이 멀 것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다.
마계왕의 공간?
아니.
눈앞의 광경은 한낱 환상일 뿐.
이곳은 엄연히 내 진료실이다. 내 환자가 있는 병실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어느 누구도 내 의료 행위를 방해할 수가 없다. 오직 그것만이 지금의 내게 있어 진리이며, 진실이다.
“3항. 누구든지 의료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의료행위를 행하는 의료인, 제80조에 따른 간호조무사 및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 제2조에 따른 의료기사 또는 의료행위를 받는 사람을 폭행, 협박하여서는 아니 된다.”
- 무슨…….
이쪽의 정신이 멀쩡하다는 걸 이제 슬슬 파악한 걸까. 마계왕의 위압적인 목소리에 약간의 당혹감이 배어들었다.
- 기생자, 혹은 티끌에 지나지 않는 그대가, 감히 나에게, 미미한 인간의 법을 언급하는 것인가, 지금?
“미미한 인간의 법은 개뿔. 기생? 그거, 너무 적반하장식 발언 아닌가.”
- ……뭐?
“실상은 그쪽이 기생하고 있는 신세 아닌가? 데미안의 육신에 말이다.”
짓씹듯이 말했다.
말하면서도 빡침이 그라데이션으로 몰려왔다. 아니, 솔직히 사실은 일부러 더욱 화를 냈다. 안 그러면 저 압도적 위세에 짓눌릴 것 같아서. 겨우 옆으로 밀어둔 본능적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지배될 것 같아서.
힘껏 저항하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
“따지고 보면 그래. 당신, 지금 내 의료행위를 고의로 방해하고 있는 거잖아. 그만큼 불안하다는 거겠지. 내 인슐린 주사의 치료 효과가 두려운 거겠지. 그쪽의 계획이 어그러질까 봐. 안 그런가?”
- 감히.
“감히는 무슨. 더 적나라하게 까발리면, 주사 맞기 싫어서 징징거리는 거 아닌가?”
- 뭣?
“맞네. 딱 들켰네. 이봐요, 마계왕 환자분? 주사 맞을 시간이세요.”
- …….
마계왕 같은 존재도 어이가 없어지면 할 말이 사라지나 보다. 놈에게서 흘러나온 희미한 실소가 들린 것 같았다.
- 그래. 이 상황에서도 그토록 대담하게 입을 놀리는 용기만은 가상히 보아 주마.
물러나는 걸까. 자신의 훼방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걸까.
마계왕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온통 심연의 어둠뿐이던 세상에 빛이 조금씩 돌아왔다. 압도적이던 존재감이 멀어졌다. 아니, 사라졌다.
이윽고 찾아오는 약간의 현기증.
순식간에 돌아오는 시야.
깔끔한 실내.
창문을 통해 비치는 햇살.
“…….”
여전히 평화로운 병실의 풍경이 이쪽을 맞이했다. 설마 나 이외의 이들에겐 정말로 아무 일이 없었던 걸까.
“전하, 괜찮으십니까?”
데미안의 목소리가 의식을 일깨웠다.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녀석의 초췌한 얼굴이 보였다.
녀석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했다. 이쪽에게 말을 걸어왔던 마계왕의 존재도. 놈이 선사했던 아득하고도 절망적이었던 위압감도. 모두.
“……아. 잠깐 어지러워서.”
대강 얼버무렸다. 다행히 주사기는 여전히 손에 들려 있었다. 데미안의 복부를 찌르기 직전인 상태 그대로.
‘집중하자.’
마계왕이 벌인 뜻밖의 개입 때문에 진료가 어그러져선 안 된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다짐하며 주삿바늘을 데미안의 배에 찔렀다. 그리고 천천히 인슐린을 투여했다.
“……생각보다 따끔하군요.”
“어. 미안. 손이 좀 떨려서.”
“괜찮습니다. 앞으로 능숙해지시겠지요.”
“그러기 전에 네가 낫는 게 더 좋겠는데.”
솔직한 진심이다.
정말로 그러면 좋겠다.
라키엘은 염원하며 데미안의 손목을 짚었다. 그리고 인슐린 주사의 효과를 확인하였다.
‘진맥.’
딩동!
선명한 알림음.
덜컹 뛰는 심장.
그런데 이어지는 메시지의 내용이 평소 진맥 스킬을 사용하던 때와 사뭇 달랐다.
[(경) 인슐린 제조 성공! (축)]
[당신은 로라시아 대륙의 역사상 처음으로 인슐린을 농축, 추출하여 1형 당뇨병 환자의 혈당을 효과적으로 떨어뜨리는 기념비적 업적을 세웠습니다.]
[지금까지 이곳 세계에서 1형 당뇨병은 걸리는 즉시 사망이 확정되는 불치병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선보인 췌장 성분 추출을 통한 인슐린 생산 업적 덕분에 1형 당뇨병 치료의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거대한 업적이 로라시아 대륙 인류의 의학 역사에 길이길이 새겨질 것입니다.]
[후대의 의료인 꿈나무들이 시험 범위를 늘려 버린 당신을 원망합니다.]
[업적에 걸맞은 명의 포인트 (GDP : Great Doctor Point)가 수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