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46화 (345/468)

346화. 내 몸은 내가 구한다 (1)

“야, 근데 있잖아.”

“어.”

“내가 진짜 월말에 갚으려고 하긴 했는데.”

“어.”

“갑자기 경조사 때문에 내 용돈으로 그거 때우느라고.”

“어.”

“다음 주에 와이프한테 그만큼 용돈 추가로 받기로 했거든.”

“어.”

“그걸로 갚으려고 했…….”

“어.”

“미안.”

“쯥.”

라키엘은 혀를 찼다.

그의 불알친구, 원호가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지금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비통함과 울분이 가득했던 터였다. 그만큼 힘든 하루였다.

둘도 없는 친구가 의식을 잃은 채 병상에 눕게 됐다. 양화대교에서 자살을 시도했단다.

연락을 받고 가장 먼저 달려와 지금껏 곁을 지키면서도 탄식만 계속 흘러나왔다.

죄책감부터 들었다.

친구한테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조금 더 자주 찾아가 만났더라면. 그랬다면 친구는 생각을 바꾸었을까.

스스로를 포기하는 결정을 안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나는 어째서 그렇게 해주지 못했던 걸까.

후회하고 탄식하며 곁을 지켰다. 그러던 와중에 잠깐 전화를 받느라 자리를 비웠더니, 그 사이에 웬 이상한 사람이 친구의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아니, 친구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처음 보는 외국인이었다.

보자마자 분노에 휩싸였다.

낯설고 무례한 외국인에 대한 분노? 아니. 어쩌면 그동안 친구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향한 분노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병원에서마저도 친구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자책이었던 건지도.

당장 경찰을 부르려 했다. 그런데 웬걸. 낯선 외국인이 너무나 유창한 한국어로 이쪽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도, 어쩐지 익숙한 말투로.

친구, 이한의 말투 같았다.

내심 놀랐다.

한편으로는 무슨 피싱범이나 사기꾼이 아닌가 더 큰 의심이 들었다. 그때부터 대강 장단에 맞춰주는 척을 하면서 휴대폰 음성녹음을 켰다.

그냥 경찰을 부르면 병원에서 쫓아내기만 하겠지만, 사기 정황을 증거로 남기면 제대로 조치를 해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10만 원을 네가…… 어떻게 아는 건데?”

“와. 입 닦으려고?”

“아니, 어, 아니.”

“10만 원 안 갚으려고 이제는 날 못 알아보는 척을 하시겠다?”

“아니, 그게 아니고…….”

원호는 조금 억울해졌다.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누가 친구의 정체를 알아보겠는가. 친구는 저기 병실에 누워 있는데.

낯선 외국인이 친구의 모든 기억을 가진 채로 자신을 다그치는 이런 상황이 스스로도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솔직히 자기가 미친 건가 싶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일말의 의심을 붙잡고서 물었다.

“그때 내가 톡으로 빌려달라고 이야기를 했을 땐…….”

“톡은 무슨. 전화로 부탁했잖아. 제수씨가 톡 볼 수도 있다면서.”

“…….”

“이거 혹시 무슨, 확인용 낚시 질문이냐?”

“어, 그게…….”

“그럼 더 해보든가. 의심 풀릴 때까지.”

라키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원호가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럼, 내가 재수하다가 망했던 이유가 뭐였지?”

“뭐긴. 내가 스토크래프트 알려줘서.”

“……x발.”

“또 물어봐.”

“나 결혼식 때 네가 사회 보다가 빵꾸낸 부분은 어디?”

“주례쌤 말씀 다 끝난 줄 알고 하객들한테 감사합니다, 박수! 하고 호응 유도하는 바람에 주례쌤이 다음 대사 까먹고 버벅거리게 만들었던 거?”

“그럼 우리 고2 때 2박 3일로 계곡 놀러가면서 텐트보다 더 중요하게 챙겨갔던 물건은?”

“목검.”

“왜였지?”

“바람의 곰심 보고 삘 받아서. 근데 그건 좀 찐하게 흑역사인 듯.”

“어. 인정.”

“이제 됐냐.”

“……어.”

원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이건…… 진짜다.

아무리 피싱범이나 사기꾼이라 해도, 누군가의 개인정보를 해킹하거나 스토킹한다고 해도 방금 말한 부분들을 알 수는 없을 거니까.

“진짜 이거, 어떻게 된 건데.”

그는 라키엘의 위아래를 망연자실하게 쳐다보았다. 혼란스러웠다. 지금 눈앞의 이놈이 진짜 이한인 거면, 병실에 누워 있는 쪽은? 그건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라키엘은 친구에게 진실을 숨길 생각이 딱히 없었다.

“일단 좀 앉자. 설명할게.”

친구와 벤치에 앉았다.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잠깐 고민했다.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이것저것 재고 숨기고 하기 싫었다.

“사실은…….”

그때부터였다.

모든 걸 말했다. 술에 취해 양화대교를 걷던 밤. 난간을 잡고 소리를 지르던 순간, 저도 모르게 균형을 잃었던 사고. 그리고 소설 속 황태자 라키엘의 몸으로 들어가 버렸던 때부터 시작된,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그동안 원호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한겨울의 화창한 햇볕. 그 아래에서 때로는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때로는 뭔가 대답을 하려다가 망설이며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단톡방 내용 보고 고민하다가.”

“후우.”

“솔직히 말해서, 나 같아도 믿기 힘들 거라는 거 알어. 더 솔직히 말하면 거짓말 이용권, 쓸까 싶은 생각이 백 번도 더 들었고. 그런데 그러기 싫더라.”

“왜?”

“이번에 보는 게 너랑 마지막일 거 같아서.”

“…….”

다시금 침묵하는 원호.

라키엘은 희미하게 웃었다.

“생각해보니까 그럴 거 같더라고. 그 게으름뱅이 용왕이 날 여기로 또 보내줄까? 그건 아닐 거 같고. 그렇다고 내가 오고 싶다고 차원을 건너오는 게 마음대로 될 일도 아니고. 그나마 너랑 이렇게 다시 마주친 거 자체가 기적처럼 느껴지거든, 나는.”

“…….”

“오랜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만남인데. 이러고 내가 돌아가면 이제 너랑은 다시는 못 볼 건데. 친구와 만나는 마지막 기억에 세뇌 같은 거짓말을 새겨놓긴 싫더라고. 솔직히 좀, 그렇잖아.”

정말로 그랬다.

그냥 쓸데없는 감상일 수도 있는 건데, 사실은 거짓말 이용권을 쓰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안전한 판단일 텐데, 그걸 알고 있음에도 그러기가 싫었다.

친구와의 마지막 기억을 세뇌로 더럽히기 싫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며 설득을 시도했고, 가까스로 성공했으며, 이제 모든 걸 허심탄회하게 밝히게 됐다. 참 다행인 일이었다.

“그랬구나……. 허, 참.”

원호는 그만 웃고 말았다. 이건 너무 황당해서 어디 소설로도 못 쓸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적당히 허무맹랑했으면 안 믿었을 건데.”

“그렇지?”

“어. 이건 너무 황당해서 오히려 믿을 수밖에 없겠네.”

“믿어주니까 고맙고. 제수씨랑 애들은? 잘 있냐?”

“범준이랑 승아는 잘 있고. 근데 제수씨가 뭐냐. 형수님이지 인마.”

“아무튼. 다 잘 있지?”

“어. 근데 하나만 물어보자. 이제는 어떻게 되는 건데?”

“나?”

“어. 데미안인가 하는 친구 당뇨는 그렇다 치고, 네 원래 몸은 저기 병실에 있잖아. 거기에 황태자 영혼이 갇혀 있다며.”

“안 그래도 이제부터가 좀 중요하긴 하다.”

라키엘은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은 지금 내 몸이 죽어가고 있거든.”

“……뭐?”

“아마 여기 병원 장비로는 절대 못 잡아내겠지. 기맥이 끊어지고 있는 상태라서.”

“기맥? 그게 진짜 있는 거였나.”

“당연하지. 진맥 스킬로 봤다고 했잖아. 한의사 친구 말을 못 믿냐.”

“어, 으음.”

“아무튼. 황태자의 영혼이랑 내 몸이 싱크로가 안 맞아서. 그래서 기맥이 뚝뚝 끊어지고 있는 상황이더라고.”

“그럼…… 죽어가고 있는 거면, 시간이 얼마쯤 남은 건데?”

“한 달.”

“…….”

“아마 그쯤이면 기맥이 완전히 끊어질 거 같더라. 그래서 치료를 서둘러야 하는 거고.”

라키엘이 정색하며 말했다.

원호의 표정도 굳었다.

“제대로 치료할 방법은 있나? 여기 병원에 알린다든가.”

“그건 별로. 말했잖아. 여기 병원 장비로는 그런 건 죽어도 못 잡아낸다고. 괜히 그런 얘기 꺼냈다가 미친놈이나 안아키 취급받기 딱 좋을걸.”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하다.

현대식 병원 장비들?

뛰어난 것은 맞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를 것이다. 현대식 장비가 아무리 정밀하다 해도 기맥이나 마나의 흐름을 측정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아니, 감지조차 못하겠지. 그러니 제아무리 CT니 MRI니 백 번을 찍어봐야 아무것도 진단하지 못할 것이고.

“이건 나만 가능해.”

이번 경우는 한의학의 영역이다. 이쪽에게는 경혈 스캐닝이 있으니까. 진맥 스킬도 있으니까. 이쪽의 원래 몸의 기맥이 끊어지는 지점과 원인을 찾아내서 적절한 치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직접 붙어야 해. 보호자로.”

“입원실에 있을 거라고?”

“어.”

“보호자 출입용 QR 카드는?”

“받았지.”

원무과에서 받아온 카드를 자랑스레 내밀었다.

원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거짓말 이용권?”

“어.”

“이야. 내 친구 사기꾼 다 됐네.”

“너도 나처럼 저짝에서 2년 정도 굴러봐라. 황제 눈치 보면서 살기가 쉬운 줄 아나. 아무튼 일단 은수도 좀 부르자.”

“은수?”

“응. 너네 도움이 좀 많이 필요할 거 같다.”

사실이었다.

이건 혼자서는 못한다. 자신의 몸에 침을 놓고 별별 난리를 떨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간호사 오는지 망 좀 봐주고. 내가 데미안 봐주러 원룸 다녀오는 동안엔 자리 지켜주고. 뭐 이거저거.”

“아. 그래서 공짜로 부려먹으려고?”

“당연하지.”

“와 진짜.”

“진짜 뭐.”

“은수 꼭 불러야겠네.”

“혼자만 당하기는 싫지?”

“당연하지.”

휴대폰을 꺼내는 원호의 손길이 신속해졌다. 연락을 받은 은수가 온 것은 1시간쯤 뒤의 일이었다.

“……어?”

은수는 도착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중요한 일이 생겼다고.

지금 와서 봐야 할 것 같다고.

원호에게서 톡을 받고서 급히 반차를 쓰고 달려온 은수였다. 그는 사실 한편으로 의아하기도 했다.

병원에 오자마자 병실에 들렀는데, 여전히 의식이 없는 이한의 곁이 텅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호에게 연락했다. 나 도착했는데 어디 있느냐고. 그랬더니 원호가 야외 휴게실로 나오란다. 해서 갔다.

그리고…… 발견했다.

“……어어?”

원호를 발견하고서 걸음을 서두르던 은수가 덜컥, 발길을 멈추었다. 이유? 모르겠다. 이상했다.

원호와 함께 있는 은발의 외국인 때문에? 아마 그런 것 같다. 그러니까, 저 외국인의 모습이 마치…….

‘어어어?’

왜 익숙한 걸까.

왜 어디서 본 것 같지.

은수는 기묘한 착각과 낯선 반가움을 동시에 느끼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불현듯 떠올렸다.

어떤 소설. 작가가 그림에 재능과 욕심이 많아서 직접 그린 실사풍 일러스트를 매 편마다 넣었던 소설.

특히 초반에는 엑스트라나 조연까지 엄청난 퀄리티와 디테일의 일러스트를 보여줬던 그 소설.

그런데 원호와 함께 있는 은발의 남자가 거기서 본 일러스트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러니까 언제? 소설 초반에. 병 걸려서 죽었다는 그 비운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은수는 저도 모르게 기억 속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했다.

그는 소설 마검황의 애독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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