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내 몸은 내가 구한다 (2)
소설 마검황.
크게 인기가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망한 작품도 아니었다. 딱 약간 유명한 정도. 중간보다 조금 나은 정도. 그것이 마검황이 소설 시장에서 얻은 성적표였다.
하지만 특이한 점도 있었다.
바로 매 편마다 삽화가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작가가 직접 정성껏 그린 삽화였다. 실사 스타일의 엄청난 고퀄리티를 자랑했다. 덕분에 매번 ‘작가님은 삽화 그린 거 보여주려고 소설 쓰는 거죠?’라는 독자들의 댓글이 달리곤 했다.
주인공 데미안은 물론이고, 수많은 인물들의 삽화가 독자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특히 초반부는 더했다. 아직 작가가 마감 일정에 쫓기지 않던 덕분이었을까. 제대로 혼을 갈아 넣은 일러스트의 천국이었다.
그중에는 초반에 사망한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일러스트도 두 장 정도 있었다. 거의 사진에 가까운 실사풍 풀컬러의, 매우 화려한 복장을 입은 비련의 주인공 같은 모습이었달까.
그래서였다.
마검황의 애독자, 은수는 혼란을 느꼈다.
‘내가 미쳤나.’
처음 든 생각은 스스로를 향한 의심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급한 일이 생겼다고, 빨리 와보라던 원호의 연락을 받고서 병원에 온 마당이었다. 심지어 반차까지 썼다!
그런데…….
‘왜 황태자 라키엘이 저기에 있는 건데. 왜.’
보자마자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원호와 벤치에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은발의 외국인. 암만 봐도 마검황의 일러스트에 나오던 황태자 라키엘과 판박이였다.
물론 약간 다른 점도 있었다. 일러스트의 모습보다 덜 야위었고, 혈색이 좋았다. 화려한 복장 대신 롱패딩을 걸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원작의 일러스트가 거의 사진에 가까운 퀄리티였기 때문이었다.
“…….”
꿀꺽.
은수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출렁였다. 혼란스러움에 이어서 밀려온 감정은 망설임이었다. 소설 일러스트와 똑같은 모습의 사람이 친구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니.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고민이 2번 경추를 사뿐하게 마사지하려던 순간, 때마침 원호가 이쪽을 발견했다.
“어. 왔냐.”
“…….”
대체 뭔데.
왜 넌 태연한 건데.
은수는 거대한 의문과 심각한 호기심을 느끼며 원호에게 갔다. 그리고 라키엘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야, 무슨 일인데. 올라오면서 보니까 한쓰는 아직 자던데.”
“어. 잠깐 앉아봐봐.”
“…….”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이거 대체 무슨 상황인 걸까.
그때, 라키엘과 똑같이 생긴 은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은수야. 오랜만이다.”
“……!”
“나다, 나.”
“…….”
“이한.”
“…….”
은수는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옆에 있는 원호는 태연한 모습이라 더 기묘했다. 하지만 라키엘도, 원호도 그런 은수의 모습에 개의치 않았다.
“은수야. 조금 이상하겠지만 들어봐봐.”
원호가 준비해둔 이야기로 총대를 멨다. 그때부터였다. 원호는 오늘 병원에서 겪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순서대로 말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확인을 다 했는데, 이놈 한쓰 맞더라.”
“허. 하. 하.”
“네가 생각해도 정신 나간 거 같지? 나도 그랬다.”
“허, 허. 하.”
“은수야, 괜찮냐?”
“어. 조금.”
“조금?”
“이거 무슨 소설도 아니고. 만약에 원호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이런 얘기 했으면 절대 안 믿었을 듯.”
은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라키엘을 돌아보았다. 아까 처음 봤을 때도 소설 속 라키엘의 모습이다 싶었는데. 그게 진짜였을 줄은 정말로 몰랐다. 새삼스럽게 또 어이가 없어졌다.
“야, 한쓰야.”
“어.”
“고생 많았겠네.”
“고생은 뭘.”
“근데 있잖아.”
“어.”
“방금 이야기대로면, 네 원룸에 데미안도…… 와 있다는 거지?”
“어.”
“그럼 사인 좀…….”
“어?”
“나중에 데미안 친필 사인 좀.”
“…….”
“그래도 소설 진주인공인데. 시간 되면 같이 원룸 가서 한 번만 만나보고 싶…….”
“아 됐고.”
“…….”
이럴 시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친구의 은근한 팬심은 한 큐에 커트!
‘지금은 진짜로 더 급한 일이 있으니까.’
우여곡절 끝에 친구들의 신뢰를 얻은 라키엘은 병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병상에 누워 있는 자신의 원래 몸을 내려다보았다.
“…….”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하다.
가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뭔가 낯설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거울에 비친 저놈은 대체 누굴까, 하는 그런 묘한 기분. 자신의 모습이 타인 같다고 느껴지는 그런 기이한 순간.
병상에 누운 원래의 몸을 볼 때마다 그런 기분을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만끽하는 느낌이 들었다.
‘쯧. 집중하자.’
라키엘은 묘한 기분을 털어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1개월 남짓한 상황. 그 안에 황태자 라키엘의 영혼과 자신의 원래 몸이 싱크로가 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전신의 기맥이 끊어지겠지. 진맥 스킬이 그렇게 알려줬으니까. 종합검진 결과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
결국엔 자신의 원래 몸이 죽을 것이다. 황태자 라키엘의 영혼도 소멸되거나, 운이 좋아봤자 떠돌이 망령 신세가 될 것이다.
그건 싫었다.
이한으로 살았던 자신의 몸이 죽는 것도. 이쪽에게 몸을 빼앗긴 황태자의 영혼이 떠돌이가 되는 것도. 자신이 일부러 일으킨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일단은 원인부터 찾자.’
라키엘은 상황을 분석했다.
황태자의 영혼과 이한의 몸.
둘이 싱크로 고자(?)가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과거 자신이 황태자의 몸에 들어갔던 때에는 싱크로 문제를 전혀 겪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난 멀쩡했어. 아무 문제 없이 황태자의 몸에 들어가서 활동할 수 있었지. 아니, 싱크로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느끼지도 못했어. 그만큼 자연스럽게 정착했다는 거지.’
그런데 이번엔 완전히 달랐다.
‘차이가 뭘까.’
자신의 영혼과 황태자 라키엘의 육신이 만났을 때는 싱크로 문제가 없었는데, 반대의 경우엔 싱크로 고자 사태가 불거졌다. 분명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원인일 테고. 그걸 해결하면 되겠지.
‘그럼, 시작.’
모든 진료의 시작은 진맥과 진단부터.
라키엘은 기본을 떠올리며 병상 곁에 앉았다. 자기 원래 몸의 손목을 잡았다.
‘진맥.’
스킬을 발동했다.
그리고 아까 진맥 스킬을 사용했던 때에는 동원하지 못했던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오장육부들아, 상담 출동!’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이한의 오장육부와 상담을 나누며 상태를 진단합니다.]
[심장 : 어라, 이건…… 과거의 나?]
[허파 : 허…… 파하……?]
[대장 : 제가 저토록 크고 아름다운 괄약근을 지니고 있었지 말입니다…….]
[간장 : 이야. 간세포 탱글탱글한 거 보소ㅋㅋㅋ]
[위장 : 근데 우리 저런 몸 남겨두고 여기로 이사 온 게 맞는 거야?]
[콩팥 : 이사 아니지. 쫓겨난 거지ㅋㅋㅋㅋㅋ]
[비장 : 비루한 현생 컷-뜨!ㅋㅋ]
[오장육부 리포트 : 신체적으로 큰 이상이나 질환이 느껴지지 않음. 솔직히 따지고 보면 나이는 살짝 더 많아도 지금 이사 온 새 육체보다 저쪽의 예전 육체가 더 건강하고 전도유망함. 이건 거의 34평 20년차 구축이지만 나름 튼튼하고 층간소음 없던 강남 초역세권 아파트 버리고 난개발 변두리 공단에 있는 43평 하자 많고 천장에서 물 새는 신축으로 이사 온 느낌인데? 이사 왜 했음?ㅎ]
“…….”
아니, 내가 일부러 이쪽 몸으로 오고 싶어서 들어온 것도 아니고. 그걸 평가질 받으려고 진맥 스킬을 쓴 것도 아니고.
‘일 좀 하자, 일!’
오장육부를 향해 사자후를 일갈했다. 그러자 오장육부들이 한숨을 푹 쉬는 게 여기까지 들려왔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이한의 신체 상태를 점검하는 기준을 바꿉니다.]
[심장 : 어라, 이건…… 늙어빠진 나?]
[허파 : 하…… 팧ㅎ하핳!]
[대장 : 어어? 괄약근이 너무 강해서 변비가 창궐하고 있지 말입니다?]
[간장 : 다시 보니까 간세포가 아니라 복부 지방이 탱글탱글한 거였네ㅋㅋㅋㅋㅋ]
[위장 : 잘 보면 머리숱도 살짝 듬성듬성함ㅋ]
[콩팥 : 머리숱은 중대사항이지 아ㅋㅋㅋ]
[비장 : 이사 잘했네ㅋㅋㅋㅋㅋㅋㅋㅋ 박수ㅋㅋㅋㅋㅋㅋㅋ]
[오장육부 리포트 (2차) : 응 그래 네 말이 다 맞음.]
“…….”
이놈들, 빈정 상한 건가.
라키엘은 나름 열심히 오장육부를 어르고 달랬다. 건강 상태 외에 다른 이상한 점은 없느냐고. 혹시 뭔가 비정상적인 부분은 없느냐고.
하지만 돌아오는 오장육부의 상담 리포트에선 별다른 이상이 감지되진 않았다.
[오장육부 리포트 (3차) : 현재 상담 대상의 육신과 영혼이 싱크로 고자 상태인 것은 맞음. 그러나 그 원인은 우리도 모르겠음. 저쪽 오장육부한테 물어봐도 모르는데 우리라고 어떻게 알겠음? 암튼 화이팅 :D 예이-]
쓰읍.
얘들도 알아낼 수가 없는 거구나.
라키엘은 씁쓸해지는 입맛을 다셨다. 진맥 종합검진에서 원인을 알아낼 수 없었다. 오장육부의 상담도 신통치가 않았다. 경혈 스캐닝으로 살펴도 뚜렷한 원인이 보이지 않았다.
뜻밖의 벽에 부딪힌 기분.
조금 막막해졌다.
‘이거, 은근 큰일인데.’
영혼과 육신의 싱크로를 이어주는 일. 이건 자신도 처음 해보는 치료였다. 그런데 원인을 모르는 채 어떻게, 무슨 치료를 하겠는가. 솔직히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어떡하지.’
뭐라도 찾아야 한다. 없는 이유라도 만들어서 지지든 볶든 굽든 해야 한다. 라키엘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 아니, 급하게 아랫배를 붙잡고 달려간 공중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찾는 애타는 심정으로 황태자의 영혼을 불렀다.
‘어이, 이봐? 황태자 씨?’
- ……무엄하다!
‘무엄은 개뿔. 여기가 마젠타노 제국도 아니고.’
- …….
‘게다가 난 지금 댁을 도와주는 입장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쓸데없는 예의범절이나 허례허식은 좀 뺍시다. 동의?’
- ……좋다.
‘잘 생각하셨어. 그럼 내가 좀 물을게. 지금 댁의 영혼과 내 원래 몸이 싱크로가 안 되는 거, 그래서 1개월 후에 죽을 예정이라는 거, 아까 내가 알려줬지?’
- 그랬지.
‘혹시 댁은 그 이유를 몰라?’
- 모르겠군.
‘어째서?’
- 난 거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 그저 이 비좁은 육신에 내팽개쳐지듯 던져진 것이 불과 나흘 전이었다. 그 황망함과 막막함이 가시지도 않았단 말이다.
‘아니, 그러니까 뭔가 위기감과 함께 스멀스멀 느껴지는 모종의 쌔하거나 불쾌한 감각 같은 게 없냐고요.’
- 모르겠다. 그저 비좁고 불편할 뿐.
‘비좁아? 불편?’
- 그렇다.
‘…….’
이거 뭔가 있는데.
묘한 촉이 왔다.
라키엘은 황태자의 영혼에게 물었다.
‘좁다니, 내 원래의 몸이 댁한테 비좁게 느껴져?’
-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야 알겠는가. 혹시 말귀가 어두운가? 내 시종과 시녀들에겐 이렇게 같은 소리를 반복할 일이 좀처럼 없었는데. 쯧쯧!
‘아 예. 시종 시녀가 아니라서 죄송하긴 개뿔. 지금 문진 중이잖아. 까칠하게 굴지 말고 협조 좀 합시다. 다 같이 잘 살자고 이러는 건데.’
- …….
‘그러니까, 내 원래 몸이 비좁게 느껴진다는 게…… 어떤 뜻이지?’
캐물었다.
황태자의 영혼이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 키가…… 작다.
‘뭐?’
- 이 새로운, 그쪽이 지녔던 육체 말이다. 키가 작아서 허리와 다리를 펼 수가 없구나. 불편하다. 너무 짧은 껍질 속에 강제로 갇혀 있는 기분이랄까. 그 점이 너무, 너무 불편해서 심히 괴롭단 말이다.
‘……뭐어?’
황태자의 영혼이 진심을 담아 내뱉는 불평. 그걸 들으며 라키엘은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과 황태자 라키엘의 차이.
그건 바로…….
‘이한이었던 내 키는 168cm. 반면에 황태자 라키엘의 키는…… 176.3cm. 그러니까…….’
약 8cm의 설레는…….
아니, 제법 확연한 키 차이.
그게 싱크로 고자 사태의 원인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