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뜻밖의 재능 (1)
“우리는 왜 여기서 찬바람을 맞고 있어야 하지?”
“응 시리즈 택시 기다리는 중이야.”
“시리즈 택시?”
“아까 퇴원하고 집에 오는 길에 탔잖아? 그거.”
“…….”
이쪽의 대꾸에 입을 다무는 황태자. 그는 여전히 한국의 거리에 적응이 안 되는 듯했다. 그럴 법도 하지. 온통 시멘트와 콘크리트투성이니까. 수많은 빌라,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아파트의 물결까지. 오늘 처음으로 눈 뜬 다른 차원의 사람에겐 조금은 버겁겠지.
“그런데 택시라는 것 말이다.”
“어.”
“이번엔 그걸 타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아주 중요한 걸 받으러.”
“중요한 것?”
“돈.”
“…….”
다시금 입을 다무는 황태자. 행여나 그가 섣불리 길에서 ‘그걸’ 입 밖으로 말할까 싶어서 재빨리 곁으로 촵 붙어 속삭였다.
“말했잖아, 당첨금. 잠깐잠깐, 쉿. 그거 함부로 남들한테 들리게 말하진 말고.”
“……아, 알았다. 좀도둑이 노릴 수도 있겠군.”
“좀도둑보단 사기꾼이 더 무섭지.”
“사기라……. 이곳 세상에도 그런 이들이 있나?”
“당연하지. 아니, 더 심해.”
“더 심하다고?”
“어.”
뜨악하는 황태자를 향해 어깨를 으쓱여 주었다.
“돈이라면 친구, 친척, 심지어 가족이고 뭐고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니까.”
“그런가. 뭐, 그 정도라면 별로 새롭진 않군.”
“새롭지 않아?”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이번엔 황태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권력 앞에서는 친구, 친척, 가족이 무슨 소용일까. 내가 살아온 황궁도 그러했지. 덕분에 듣다 보니 비슷해서 안심은 되는군.”
“아. 그런가.”
“그렇지.”
“뭐, 그래도 주변인이 사기 치는 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어째서지?”
“난 가족이 없었으니까.”
말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자괴감 섞인 썩소가 피어났다.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형제자매는 없고. 딱히 교류하던 친척도 없고.”
“설마, 결혼도?”
“…….”
“제법 늙은 몸뚱이 같은데, 이 나이가 되도록?”
“…….”
“실로 안타깝군. 하긴. 내가 보아도 빼어난 용모는 아니니 이해가 되는 바이기도 하고.”
“어이.”
“사실이지 않은가. 그쪽이 강탈한 내 육신 쪽이 훨씬 보기가 좋은 것도 사실이고. 게다가 이쪽의 몸은…… 비율마저도 이상하다. 키는 전의 육체와 거의 같은데, 상대적으로 다리가 너무 짧아. 허리는 쓸데없이 길고.”
“미안. 척추 위주로 늘려주다 보니까 그건 어쩔 수가 없었네.”
“…….”
“그런데 잠깐만. 사과해 놓고 보니까 좀 어이가 없네. 그렇게 따지면, 내가 졸지에 들어온 댁의 육체는 90일 뒤면 죽을 신세였는데?”
“하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었다고? 병마에 시달린 것이 본인의 뜻이 아니었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다리가 짧고 싶어서 짧았나? 키가 작고 싶어서 작았나? 얼굴이 그렇게 생기고 싶어서 그렇게 생기고 결혼도 못 했나? 와, 이거 정리하니까 더 빡치네?”
“……미안하구나.”
“미안한 거 알았으면 됐고. 아, 저기 택시 온다.”
마침 어플로 예약한 택시가 도착했다.
라키엘은 황태자와 함께 나란히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부르릉, 오랜만이라 한편으로는 반갑고 조금은 어색한 엔진 소리와 진동. 도로를 덜컹대며 달리는 감각. 나란히 달리는 수많은 차량의 행렬까지.
택시는 일산 마두동 학원가를 지나쳤다. 그동안 라키엘은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옆자리의 황태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은 각자 반대편 창문으로 흘러가는 풍경에 눈길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황태자가 입을 연 것은, 택시가 백석동 홈x러스 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정차해 있던 무렵이었다.
“사람들의 그림자가 이상하게 보여.”
“……음?”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황태자는 이쪽에는 관심이 없는 듯, 창밖만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거리 전철역 출입구 앞 횡단보도에서 파란불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관찰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사람들의 그림자가 두 가지 색으로 구분되어 보여. 왜지?”
“두 가지 색이라니, 어떻게?”
“빨간색과 파란색.”
“…….”
이건 무슨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도 아니고.
하지만 라키엘은 황태자의 말을 쉽게 넘겨짚지 않았다. 긴 시간 부대낀 건 아니었지만, 그동안 상대해본 경험을 통해 황태자의 성격이 보기보다 진중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특히 가벼운 농담 같은 건 거의 하지 않았다.
지금 저 말도 농담을 하는 투는 아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
“할 수는 있다만…….”
황태자가 택시 기사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라키엘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야. 컨셉질 하는데 뭔. 괜찮아. 질러. 어차피 연습하는 거잖아.”
“……그, 그런가?”
“당연하지.”
“알겠다. 그럼-”
다행히(?) 황태자는 이쪽이 주는 눈치를 때맞게 캐치했다. 그가 목청을 살짝 가다듬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까 퇴원을 하고 집에 가던 때에는 이렇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나오던 무렵부터 이랬어. 정말이다. 사람들의 그림자가 붉고 푸른 두 가지 색으로 구분되어서 보이기 시작했다.”
“그 둘 사이의 차이점이 뭔지 느껴지는 건 없고?”
“없다. 다만-”
“다만?”
“붉은 그림자를 지닌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경계심이 든다. 나도 이유는 모르겠어. 위험한 느낌? 그건 아닌 것 같고. 꼭 마치, 음흉한 꿍꿍이를 지니고서 내게 다가와 감언이설을 늘어놓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달까.”
“그럼…… 파란 그림자는?”
“그걸 지닌 이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신뢰할 수 있다는 느낌? 적어도 내게 나쁜 의도를 품지는 않을 듯하다는 그런 기분 말이다. 참 이상하지. 혹시 이곳 세상은 원래부터 이런 게 보이는 곳인가? 그건 아닌 듯한데.”
“응 아니야.”
듣다 보니 라키엘은 알 것 같았다.
아까 퇴원할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 황태자에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그림자의 두 색깔. 그건 바로…….
“돈의 정령 그거, 성능 확실하네.”
“뭐?”
“돈의 정령. 아까 내가 집에서 이상한 거 원샷하다가 뿜을 뻔하고, 참아내고, 그랬던 거 봤지?”
“봤다만.”
“사실은 그게 돈벼락의 정령을 돈과 벼락의 정령 둘로 분리하는 과정이었거든.”
“정말인가?”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거 같아?”
“그건 아니고…….”
“어쨌건, 그 과정 끝에 분리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벼락의 정령은 나한테 남았고. 돈의 정령이 너한테 붙었거든. 그래서 나는 침술에 벼락의 힘을 실을 수 있게 됐고, 넌 사람들의 그림자를 컬러 버전으로 보게 된 것 같네. 너한테 접근해서 사기를 칠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해서.”
“……그, 그런가?”
“아마도. 덕분에 살면서 금융 사기는 안 당하게 됐어. 축하해.”
“사실이라면…… 또 신세를 졌군.”
“고맙진 않고?”
“그건 모르겠다. 이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
황태자는 조금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일을 겪다 보니 선뜻 체감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마찬가지로 운전석의 택시 기사님도 혼란스러운 표정이셨다. 아마도 우리를 원래 목적지가 아닌, 정신병원으로 데려가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하는 거겠지.
하지만 라키엘은 얼굴 가득 철판을 깔았다.
“아아. 오랜만에 보는 강변북로 좋다.”
여전히 1차로의 진출입로로 얌체처럼 끼어드는 차량들 때문에 꽉꽉 막혀대는, 평범한(?) 강변북로였다.
“야야. 저기 저 다리 보이지?”
“보인다. 실로 거대한 다리로군. 이름이 뭐지?”
“양화대교. 내가 저기서 떨어졌거든. 술 마시고 걷다가.”
“설마, 그래서 내 몸을 강탈한 건가?”
“쓰읍. 강탈 아니라니까.”
“술 마시지 말고 잘 좀 걷지 그랬나.”
“……그건 미안.”
택시 기사님은 이제 거의 해탈(?)한 듯한 표정이셨다. 그냥 컨셉질에 미친 이상한 놈 둘을 태우고 있다고 여기는 걸까.
어쨌건 택시는 별 탈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인가?”
“어.”
로또 당첨금을 수령하는 장소.
농x 은행 본점 건물이었다.
“들어가자.”
살면서 로또 당첨금 수령은 처음이라 그런가. 가슴이 엄청나게 쿵쿵거렸다. 차라리 영문을 몰라서 뻘쭘하게 따라오는 황태자가 잠깐은 부러울 정도였다.
그 뒤로의 과정은 정신이 없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금 얼떨떨해서 실감이 나지 않는 상태로 어, 어, 하고 보니 당첨금 수령과 그 밖의 모든 과정이 끝나 버렸달까.
“……이게 끝인가? 정말?”
“어. 그런 거 같네.”
건물 밖으로 나와서도 실감이 잘 나질 않았다. 아까와 달라진 것이라고는 그저, 없던 통장 하나가 생긴 것뿐.
“…….”
라키엘은 멍하니 통장을 펼쳐보았다.
[4,435,888,926 원]
통장에 찍힌 숫자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묘한 기분이 치밀기도 했다. 양화대교에서 떨어지기 전에 이 통장을 손에 쥐고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겠지.
하지만…….
“이젠 네 거야.”
잡생각이 들기 전에 통장을 황태자에게 내밀었다.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아무한테도 보여주면 안 돼. 이런 게 있다는 말도 하지 말고.”
물론 이젠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것도 안다. 황태자에게는 돈의 정령이 붙었으니까. 아마도 이쪽보다 사기꾼을 훨씬 잘 가려내겠지. 그러니 안심하고 통장을 넘길 수도 있는 것이고.
“아무튼, 집에 가자.”
긴장했던 탓일까.
피곤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한 눈길로 흘러가는 창밖 풍경만 바라볼 뿐.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도, 느껴볼 수도 없을 이 세상의 하늘과 탁한 구름만 올려다볼 뿐.
한데 그러던 도중이었다.
“아이고. 젊은 외국분이랑 한국분이 나란히 택시 타시는 건 또 처음 보네요? 한국에는 언제 오셨어요?”
택시 기사님이 이쪽을 향해 물어왔다. 여차하면 ‘헬로우?’라고 질문 추가타(?)를 날려올 기세였다.
“아. 제법 됐습니다.”
태어난 때부터 따지면 42년쯤?
솔직히 지금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살갑게 나눌 기분은 아니었다. 그저 홀로 생각에 조금 잠기고 싶었다. 성가셨다. 하지만 이어지는 택시 기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성가시다는 기분이 쑥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요? 허허. 불쑥 물어서 미안해요. 그쪽을 보니까 우리 아들 생각이 나서.”
“……아드님이요?”
어째서?
의문은 곧 풀렸다.
“아아. 우리 아들도 타지에 나가 있거든. 캐나다, 거기 유학 갔다가 취직까지 했어요. 그래서 영어도 아주 잘해.”
“그렇습니까?”
“내가 막귀라서 잘은 모르겠는데 그런 거 같더라고요. 손님도 한국말 엄청 잘하니까 뭐, 비슷한 느낌 아닐까요? 허허허.”
“네. 그렇겠네요. 아드님이 많이 보고 싶으시겠습니다.”
“안 보고 싶다면 거짓말이지요. 그래도 아들놈 생각이 날 때마다 이거, 이거 보면서 내가 마음을 달랩니다. 허허.”
기사님이 웃으며 손목을 슥 들어 보였다.
금색 손목시계가 보였다.
“이 시계 말입니다. 이게 바로 룰렉스입니다, 짝퉁 룰렉스.”
“짝퉁……이요?”
“예, 허허헛!”
기사님의 웃음이 소탈하게 번졌다.
“아들놈이 취직하고 나서 글쎄, 지 나름 돈을 모았나 보더라고요? 그걸로 샀다면서 캐나다에서 바리바리 가져온 물건입니다. 그러면서 그놈이 뭐랬는지 아세요?”
“아드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아부지, 제가 아직 돈이 없는 바람에 짝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다음엔 꼭 진짜로 사드릴게요, 라고 하더만요. 허허헛!”
“그, 그렇습니까?”
“예.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짝퉁 룰렉스인지 아세요?”
“아뇨. 모르겠습니다.”
“내가 글쎄, 젊은 시절부터 나중에 성공하면 저거 꼭 사봐야겠다, 하고 벼르던 게 이놈이었거든요. 근데 결국엔 못 샀어.”
“아…….”
그래서였구나.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택시 기사님의 목소리가 흐뭇해졌다.
“그래도 나야 고맙지. 아무리 짝퉁이라도, 그래도 그놈이 아부지 소원 풀어주려고 노력은 해본 거잖아요? 그 마음이 얼마나 기특해. 그래서 나한테는 이 짝퉁이 세상 하나밖에 없는 진짜 룰렉스여. 이젠 진짜를 준다 해도 난 이게 더 좋아. 허허허.”
“그렇겠군요.”
흐뭇하게 웃는 기사님. 그 마음을 이해하며 함께 웃었다.
한데 그때였다.
“혹시 짝퉁이 가짜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그 팔찌 비슷한 물건, 짝퉁이 아닌 듯한데.”
지금껏 묵묵히 있던 황태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평생 최고 수준의 귀금속과 세공품만 접하며 살아온 내 안목으로 보건대, 마부, 당신의 아들이 선물한 물건은 절대로 가짜가 아니야.”
기사님의 손목시계를 향한 황태자의 눈빛이, 지금껏 보지 못했던 뜻밖의 영민한 색채로 날카롭게 번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