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저주받은 가문 (1)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작은 촛불이 일렁였다. 어둠에 잠긴 공간의 한 자락이 희미한 빛에 물들었다. 그 속에서 검은 후드를 눌러쓴 흑마법사 5인이 영혼의 뿌리까지 착잡해질 듯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설마하니…… 황태자가 이런 국경까지 직접 올 줄은 몰랐습니다.”
“대체 왜 온 걸까요?”
“왜 온 거냐니. 그걸 모르겠소?”
“보나 마나 뻔하지. 군단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온 것을 보면.”
“…….”
하얀 수염의 노인이 단정하듯 내뱉은 말에 모두가 침묵의 도가니로 빠졌다. 5인의 흑마법사는 거의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토벌.
황태자가 마침내 칼을 뽑은 것이다. 그 끝을 자신들에게 겨눈 것이다.
토벌을 위하여. 흑마법의 뿌리를 뽑아 버리기 위하여. 막대한 규모의 황가 직속군을 이끌고 온 것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태자가 저렇듯 직접 나설 이유가 있을까요? 고작 우리 같은…… 흑마법사 몇 명을 토벌하겠다는 이유 때문에요?”
“단 한 명의 흑마법사가 황도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를 생각하면 충분히 시도할 법한 토벌이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아난샤…… 때문이겠지요?”
“아마도 그렇지 않겠소?”
“제일 큰 문제가 그것이지. 아난샤는 우리 중에 최고의 흑마법사였으니. 한데 그토록 강력했던 아난샤조차도 황태자의 손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니 말이야.”
“…….”
노인 흑마법사의 말이 이어졌다.
“다들 정신 차리자고. 이미 상황은 벌어졌네. 황태자가 군단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서 이런 변방까지 직접 왔어. 십중팔구 우리의 목을 노리고 있는 것이겠지. 최소한 그럴 거라고 각오를 하고서 대비해야 한다는 말일세.”
“그 말씀이 옳아요. 미리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황태자가 대체 어떻게 우리의 위치를 알아차린 건지…… 참…….”
흑마법사들의 표정이 다시금 곤혹스러워졌다. 사실 이곳 아스라한 변경백령은 이름 그대로 외적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변경의 국경지대였다.
그래서 흑마법사들은 생각했다. 이곳이야말로 최고의 은신처가 될 것이라고.
“황도와 멀리 떨어진 데다 군사적인 밀도는 높으니, 설마 이런 곳에 우리가 있을 거라는 짐작은 못 하리라 여겼는데 말입니다.”
“모르지. 아난샤가 최후를 맞기 전에 비굴한 자백을 했던 것일지도.”
“하지만 그는…….”
“나도 아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아난샤는 이미 죽었고, 남은 우리는 황태자와 토벌군을 맞이할 위기에 처했는데 말일세.”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떡하면 좋을까요?”
“역시 맞서 싸워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말도 안 돼요. 황태자는 아난샤를 죽였어요. 그런데 우리 중에 아난샤를 뛰어넘는 사람이 있나요? 없죠.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 다섯이 힘을 합쳐도 아난샤를 능가하지는 못할 텐데요.”
“차라리…… 땅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핥는 개처럼 항복이라도 하자는 말인가?”
“살 수 있다면 해야죠.”
“하지만 그건 조금…….”
“다른 방법이 있나요?”
다섯 중에서 홍일점인 중년의 여인이 모두를 돌아보았다. 항복을 주장하는 그녀의 눈길에 대부분이 곤혹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노인 흑마법사가 반문했다.
“하지만 대뜸 항복한다고 해서 황태자가 우리를 순순히 받아 줄 가능성이 있겠는가?”
“저도 그게 가장 걱정입니다. 차라리 도망이라도 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어디로 어떻게 도망을 간다는 말이죠?”
“그야…….”
“우리, 이제 남은 돈이 없어요.”
“……아.”
여성 흑마법사의 현실적인(?) 지적에 모두가 움찔했다. 그렇다. 돈. 언제나 돈이 문제였다.
그런데 그나마 남아 있던 돈은 이미 다 썼다. 지금 지내는 아지트를 구하는 데에 들어간 임대료 등등으로 말이다.
“도주가 공짜인가요? 아니죠. 지금 이 아지트, 임대계약 기간이 끝나려면 1년이 넘게 남았어요.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옮기면 보증금은요? 돌려받을 수 있겠어요?”
“그, 그거야 집주인에게 현혹 마법을 걸면…….”
“아뇨. 제가 미리 알아본 바로는, 집주인은 우리에게 받은 보증금을 시 외곽에서 운영되는 채석장에 투자했어요. 아무리 그를 마법으로 현혹해도 그의 수중에 현금이 없으니, 우리가 돌려받을 돈도 없을 테지요.”
“그래서야 협박도 안 먹히겠군. 쯧.”
“네. 그게 문제죠.”
“미치겠군. 후우.”
모두는 부동산 임대계약의 불합리함을 뼈저리게 체감하며 탄식했다. 돈. 그놈의 돈이 없으면 새집을 구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건 곤란했다. 수많은 마법 물품과 실험 결과물을 숨길 공간이 없게 되니까.
“하지만 차라리 길바닥에 나앉더라도 그냥 도주를…….”
“수많은 스승들이 대를 이어 지켜온 물품들을 모두 버리겠다는 말인가?”
“…….”
노인 흑마법사의 일침에 도주 의견이 격침되고 말았다. 도주를 주장하던 흑마법사가 곤혹스러운 투로 반문했다.
“그럼 정말 어쩌자는 겁니까?”
“후우. 모르겠군. 정말로.”
“이제부터 고민을 좀 해 보도록 하죠.”
“그러도록 하세. 고민하는 사이에 황태자가 우리를 치지 않도록 빌면서 말이야.”
그때부터였다.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간신히 밝힌 작은 촛불 아래에서 다섯 흑마법사가 앞으로의 대응을 심각하게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황태자의 방문 목적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조차 모르고 있었다.
♣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스라한 변경백령의 경계까지 단 10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를 남겼을 무렵, 라키엘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당연했다.
설마하니 황제가 1개 군단급의 병력을 무려 ‘황태자 호위대’라는 이름을 붙여 보낼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
“심지어 황도에서부터 여기까지 일정하게 반나절의 거리를 두고서 따라오고 있었을 줄은 정말로 몰랐는데 말이지.”
“실로 송구합니다, 황태자 전하.”
“송구하다니, 무엇이?”
“그야 물론…….”
“이렇게 날 깜짝 놀라게 해서? 그건 아닐 거 같은데. 변경백령에 거의 도착해서야 우리와 합류하도록 진군 속도를 확 올려서 조절한 걸 보면.”
“…….”
호위 군단을 책임지는 장군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변명을 입에 담지 않겠다는 강직한 무인의 반응에 가까운 것이었다.
결국, 라키엘은 피식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말았다.
“뭐, 그것도 전부 황제 폐하의 명이었겠지. 이해해요. 그러니 표정 너무 굳히진 말고.”
“그 또한 실로 송구합니다, 전하.”
“장군이 송구할 필요까지야.”
물론 없다.
그걸 아는 라키엘은 장군을 책망하기보다는 황제의 철두철미함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후우. 그 양반은 진짜.’
매번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한다. 가끔은 이쪽이 그 양반의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황제를 알현하고 허락을 받는 과정이 번거로워서 일부러 서두른 여정이었는데 그새 그걸 파악했다니. 아니, 이 경우엔 내가 출발하기도 한참 전부터 내 속셈을 미리 꿰뚫고 있었다고 봐야 하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지금 이쪽 일행을 따라잡은 일명 ‘황태자 호위대’의 규모는 실로 엄청났다.
실제로 1개 군단에 필적하는 규모. 보급대를 제외한 순수 전투병력만 해도 6천에 달할 지경이었다.
이런 규모의 부대는 마음만 먹는다고 하루아침에 동네 마트 가듯이 움직일 수 없다. 규모에 걸맞은 보급, 수송, 연락망 유지 계획을 각 잡고 준비해야 한다.
거기에 걸리는 시간만 해도 최소 며칠은 필요할 터. 한데 이들이 보란 듯이 자신을 따라잡았다는 뜻은 황도에서 거의 같은 날에 출발을 했다는 뜻이고, 그건 즉…….
‘내가 황도를 떠나기 최소 열흘 전에는 황제 그 양반이 내 속셈을 간파했다는 뜻인 거지.’
대체 황제의 정보력은 어디까지 뻗어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양반의 똘끼(?)는 어디까지인 걸까.
‘쯧. 아무리 그래도 호위대로 1개 군단은 너무한 거 아니냐고.’
확실히 이건 좀 부담스럽다. 이쪽에게만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이쪽을 맞이할 상대에게도 엄청난 부담, 아니, 압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규모의 병력이다.
지금, 이쪽을 마중 나온 변경백의 굳어 있는 표정이 증거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아스라한 변경백령의 변경백, 알칸타르 아스라한이 이 땅의 유일하고도 합당한 후계자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는 변경백의 얼굴은 완전히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그런데 잘생겼다. 이쪽을 보는 그의 눈빛은 경계심과 긴장이 가득해 보였다. 그런데 잘생겼다. 나이는 50을 조금 넘겼을까.
그런데…… 잘생겼다.
어느 정도로 잘생겼느냐면 저절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LED 다이오드급 자체 발광이라는 말이 너무나 어울렸다.
딱 영화 타이타닉 시절의 레오나르도 데카프리오만큼?
보는 순간 저 사람이 나랑 같은 인류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저쪽이 사람이라면, 이쪽에겐 인류의 굴레에 포함될 자격이 없는 건 아닐까 싶은 자괴감마저 새록새록 피어났다.
한데 그토록 잘생긴 것은 비단 변경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땅의 유일하고도 합당한 후계자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변경백을 따라 한쪽 무릎을 꿇는 20여 명의 사내들. 모두가 아스라한 변경백 가문의 핏줄인 걸까. 아마도 그렇겠지. 모두가 할리우드 배우 뺨치게 잘생긴 걸 보면 말이다.
“…….”
변경백과 가문 구성원들의 미모를 보자니 문득 떠오르는 설정이 있었다.
아스라한 변경백 가문의 시조라 불리는 하비엘 아스라한. 전설의 그랜드 마스터. 야사에 따르면 그는 견줄 존재조차 없는 절세의 미남이기도 했다지.
‘설마 그 존잘 유전자가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희석이 안 된 거야?’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가문 전체가 세기의 존잘러들이라니. 설마 저들은 얼굴 미모로 국경을 지키는 건 아니겠지. 저런 얼굴로 살아가는 인생은 어떤 걸까. 보고 있자니 괜히 아랫배가 살살 아팠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라키엘은 얼른 잡념을 접었다. 변경백의 잘생김에 눈을 빼앗기고 있다 보니 문득, 한의사로서의 본능이 슬쩍 눈을 뜬 까닭이었다.
‘어? 잠깐.’
뭔가 좀 이상한데.
라키엘은 변경백의 얼굴에서 뭔가 쌔한 느낌을 받았다. 인상이 안 좋아서? 구린 기색이 느껴져서? 아니. 어쩐지 묘하게 안색이 나빠 보여서였다.
그는 변경백의 얼굴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자니 미모에 감탄만 하던 아까보다 많은 것들이 보였다.
은근히 낯빛이 균일하지가 않았다. 얼굴 군데군데에 희미한 열꽃이 붉게 피어나 있었다. 눈동자에도 묘한 열감이 느껴졌다.
귓바퀴가 특히 더 그랬는데, 반대로 눈썹 끄트머리와 미간 주위는 은근히 창백하였다.
‘이건…… 전형적인 심장에 이상이 있는 사람의 안색인데?’
묘하게 느낌이 왔다.
오랜 시간 한의사로서 쌓아온 촉이 발동했다.
‘그럼 살짝 확인부터.’
이제부터 당분간 신세를 지게 될 변경백이다. 그런 변경백의 건강 상황을 파악해두어서 나쁠 것은 없다.
라키엘은 변경백의 인사에 화답했다.
“이토록 먼 곳까지 나와서 이런 환대라니. 변경백의 뜨거운 환영에 감사를 표하노라.”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변경백의 어깨를 툭, 툭, 두드리며 일으켜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변경백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진맥.’
딩동!
스킬이 발동되었다.
한데 뒤이어 떠오르는 진맥 결과는, 썸녀한테 톡을 보냈는데 1초 만에 답장이 돌아오는 상황만큼이나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