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81화 (380/468)

381화. 저주받은 가문 (2)

딩동!

떠오른다.

진맥 스킬의 결과물이 떠오른다.

항상 이럴 때마다 묘하게 상반되는 기분이 들곤 한다. 상대가 아픈 곳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면서도, 그렇듯 품은 확신이 틀린 것이기를 바라는 묘한 역설. 그러나 끝끝내 떠오르는 결과창을 보며 이쪽의 감이 죽지는 않았다는 확인에 안도하는 이율배반적인 마음까지.

지금 같은, 이런 순간이 꼭 그러하다.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 주세요.]

눈길을 아래로 내렸다.

진맥의 결과가 아래에 있었다.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알칸타르 아스라한]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52세]

[신장 : 187.7cm]

[체중 : 72.8kg]

[혈액형 : Rh+ O]

[종합 소견 : 대체적으로 매우 건강한 신체입니다. 근신경 및 운동신경이 극한으로 개발되어 선천적 한계치에 근접하여 있습니다. 다만 원인 미상의 이유에 의한 비후성 심근증이 감지됩니다. 가급적 무리한 신체활동을 자제하기를 권장합니다.]

“…….”

라키엘은 결과를 보자마자 흠칫했다. 변경백의 안색을 보며 한의사 특유의 촉을 느낀 그였다. 하여 진맥 스킬을 썼던 건데, 설마 비후성 심근증이 뜰 줄은 몰랐다.

‘이건 좀 안 좋은데?’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비후성 심근증(hypertrophic cardiomyopathy). 이건 간단히 말하자면 심장, 그중에서도 좌심실의 벽이 두꺼워지는 질환이다. 두꺼워지는 부위는 심실중격, 중심실, 심실 심첨부 등등 다양하지만, 모두가 심장 기능에 이상을 불러온다는 안타까운 특징이 있다.

‘당연하지. 심장벽이 두꺼워지는 만큼 심장 내부의 공간은 좁아지는 거니까. 그만큼 심장에 들어오고 나가야 하는 혈액의 순환이 방해를 받는 거고.’

신체활동이 조금만 격해지면 호흡곤란이 오곤 한다. 피로감은 기본이고, 앉아서 몸을 웅크려야만 숨을 제대로 쉴 수 있는 기좌호흡(orthopnea) 증상이나 야간의 발작성 호흡곤란이 오기도 한다.

혹은 협심증, 심부전, 부정맥에 의한 어지러움이나 실신이 오거나, 심한 경우에는 돌연사를 당하기까지 한다.

말 그대로 목숨이 오락가락할 수 있는 심각한 질환인 것이다.

‘그럼 조금 더 확인. 다들 상담은 어땠어?’

라키엘은 진맥 스킬에 참여한 오장육부를 불렀다. 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알칸타르 아스라한의 오장육부와 상담을 나누며 진단한 결과를 보고합니다.]

[심장 : 와 씨…… 살다 살다 심장이 근육돼지인 건 처음 봤음ㅋㅋ]

[허파 : 허, 퍼헣?]

[대장 : 그런데 저 인간, 대장도 잘생겼지 말입니다?]

[간장 : 심지어 간세포도 존잘탱임.]

[위장 : 아니 인간적으로 저 정도 미모로 살아가는 인생이면 식도나 십이지장 융털돌기 정도는 좀 대충 생겨먹어도 되는 거 아니냐고.]

[콩팥 : 하지만 잘생겼죠?]

[비장 : 그치만 우리도 자세히 보면 나름 괜찮지 않음?]

[방광 : 응 쌍욕만 듣고 자란 양파 같아요ㅎ]

[오장육부 리포트 : 오장육부가 전반적으로 다 탱탱함. 그런데 심장의 탱탱함이 지나쳐서 오히려 균형이 망가지는 모양새임.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망가질 예정이 확실해 보임. 이대로 두면 환갑잔치는 염라대왕 진로상담 대기실에서 번호표 뽑고 치를 듯?ㅎ]

“…….”

쯧.

혹시나 해서 확인했더니 역시나.

‘비후성 심근증이 맞구만.’

라키엘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변경백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다시 없을 절세의 미남이지만 60세를 넘기기 어려운 신체 상태. 방금 진단한 질환을 어떻게 알려줘야 할까. 혹시 본인은 이미 알고 있을까.

변경백이 질문을 건네어 온 것은, 이쪽의 머릿속이 의료인으로서의 고민으로 복잡해져 가던 무렵이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아?”

불현듯 귓가를 두드려 오는 목소리.

라키엘은 상념에서 벗어나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올라탄 변경백 가문의 마차. 내부는 수수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변경백의 얼굴이 자체발광 다이오드처럼 마차 내부를 화려하게 밝혀주고 있었으니까.

“조금 전부터 뭔가 심란하신 듯한 모습이셔서 말입니다.”

“…….”

역시 티가 났구나.

그런데 그때였다.

“실은 전하에 대한 풍문과 찬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못 살리는 환자가 없고, 얼굴만 보아도 상대가 앓는 병을 알아낸다 하더군요.”

“아, 그건.”

“과장된 소문이라 말씀하시고 싶으신 거겠지요. 하지만 아까부터 저를 꼼꼼히 살펴보시는 눈길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고민에 잠긴 듯하던 전하의 기색 또한 느꼈고 말입니다. 하여 감히 묻는 것인데…… 제게서 무언가를 감지한 것은 아니신지.”

“…….”

변경백의 눈치가 생각보다 빠른 것 같다. 이쯤 되면 더는 못 숨기겠지.

“변경백, 그대는 혹시…….”

“제 심장, 과연 알아보신 것이로군요.”

변경백의 입가에 쓴웃음이 내걸렸다.

“비단 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은 이렇게 언급을 하는 자체가 새삼스러운 일이지요. 아스라한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모든 자들의 숙명과도 같은 일이니 말입니다.”

“설마, 가족력?”

“예. 그렇습니다.”

백작의 미소가 한층 자조적으로 번졌다.

“아스라한 가문의 사람들은 예외가 없습니다. 수 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60세를 넘긴 이가 드물 정도이지요. 해서 세간에서는 우리 가문더러 저주를 받았노라 일컫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

저주라.

유전적인 요인으로 생기는 비후성 심근증이라면…….

‘이곳 사람들에게는 한 가문에 내려진 저주처럼 여겨질 만도 하지. 충분히 그럴 법해.’

라키엘은 한의대에서 배웠던 내용을 떠올렸다.

비후성 심근증은 유전적인 요인이 가장 큰 질환이라 하였다. 특히, 근절유전자(sarcomeric gene)의 돌연변이 중에서도 베타 마이오신 중쇄(beta-myosin heavy chain)와 마이오신 결합 단백질 C(myosin-binding protein C)의 돌연변이가 가장 흔하다 했던가.

그 결과로 심장의 특정 근육이 비대해진다. 그만큼 심장 내부의 공간이 좁아진다. 좌심방에서 심실로 흘러 들어가야 하는 혈액의 흐름이 방해를 받는다. 아예 막히기도 한다. 그러면? 죽는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비대형 폐쇄성 심근병증(HOCM)이지. 젊고 건강하게 보였던 운동선수가 아무런 징후 없이 갑자기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가 가끔 그래.’

사실 이런 심근증을 앓는 사람은 격렬한 운동을 하면 안 된다. 신체활동이 격해지면 그만큼 심장이 혹사를 당하게 되고, 비대해진 심장근육 때문에 문제가 생길 확률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니까.

하지만 아스라한 가문의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제국을 지키는 방패.

그 역할을 수행하고자 평생 격렬한 훈련과 전투를 거듭해야 했을 테니까. 그러한 삶의 방식 자체가 이들이 지닌 비후성 심근증을 더욱 부추기고, 악화시킨 거겠지.

‘이건 예를 들자면 호흡기 질환을 지닌 사람을 평생 광산에서 일하게 하는 것과 똑같은 거지. 혹은 만성 위궤양이나 간염 환자에게 매일 술잔이 오가는 회식을 강제로 시킨다거나.’

아니, 어쩌면 더 나쁜 건지도.

그러나 변경백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것 또한 검을 쥐는 자에겐 영광의 일부이기도 할 터이니 말입니다.”

“영광?”

“그렇습니다.”

어느새 변경백 저택에 도착한 마차. 먼저 마차에서 내린 변경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가닥 불씨로 태어나 스스로를 찬란히 밝히고 불꽃처럼 사라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검을 쥔 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무병장수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

“정확하십니다.”

“어째서?”

“60세면 검을 휘두를 만큼 휘두른 나이일 테니까 말입니다. 굳이 더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검사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죽는 것이니 여한이 없다는 뜻인가.”

“그 또한 정확하십니다. 전하와는 이야기가 잘 통해서 좋군요.”

변경백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순간 라키엘은 보았다.

일견 호쾌하게 보이는 변경백. 그의 눈빛에 희미하게 떠오른 씁쓸함을.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타협을 한 자의 쓰라림을. 차마 그걸 말하여도 소용이 없을 것임을 알기에 끝끝내 속으로 되삼킨 자의 고독함을.

“…….”

그래.

단명하는 운명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심지어 본인뿐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대대로 심장병 때문에 급사하는 운명을 받아놓고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을 누가 즐길까.

그런 변태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변겸백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라키엘은 변경백의 속내를 알아차린 티를 내지 않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이쪽의 용건부터.’

변경백 가문의 사연은 안타깝지만, 이쪽은 그걸 해결해주러 온 것이 아니다. 설령 비후성 심근증을 치료해준다 하여도 그건 이쪽의 용건이 끝난 이후의 순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쪽의 사정이 더 급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슬슬 이곳으로 온 용건을 밝힐까 싶군.”

변경백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 상석에 앉자마자 라키엘은 입을 열었다. 이쪽의 말에 변경백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게 보였다. 아마 궁금한 거겠지. 황태자가 직접 이곳까지 온 이유가 말이다.

라키엘은 빙빙 둘러가는 대신 스트레이트를 선택했다.

“나는 그대의 가문이 지닌 멀티 마나하트의 기예가 필요해.”

“…….”

“내가 직접 익히겠다는 건 아니야. 대신 이쪽. 내 호위인 데미안 카이엔 경이 멀티 마나하트의 기예를 전수받게 되면 좋겠군.”

“……진심이신 겁니까?”

“물론.”

그러니 여기까지 왔다.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한데 변경백은 한동안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대신 한없이 굳은 표정으로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기만 할 뿐. 그런 변경백의 입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나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전하께서 밝히신 용건은 잘 알겠습니다. 하여 그에 대한 대답을 감히 드리자면…… 전하의 요구를 수락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불가? 거절하겠다고?”

“예, 전하.”

“어째서?”

“이렇게 말씀드리기가 매우 송구하오나, 멀티 마나하트는 우리 아스라한 변경백 가문이 지닌 고유의 기예이고, 외부인에게 전수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황족의 명령이라도 그러한 원칙이 준수되어야 하는 것인가?”

“예, 전하.”

“그건 또 어째서?”

“아스라한 가문은 기예를 관리하는 모든 권한을 그 어떠한 황족으로부터도 간섭받지 아니할 것. 이 원칙을 머나먼 과거의 3대 황제께서 익히 약조하고 보장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

그런…… 설정이 있었나.

라키엘은 순간 대꾸할 말을 잊었다. 자신이라고 해서 이곳 세계의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었다. 당연하다. 소설에서 언급되지 않은 부분은 알 방법이 없으니까.

방금, 변경백이 밝힌 3대 황제의 약속이 그러했다.

‘쓰읍. 이러면 나가린데?’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사실 이곳까지 오면서도 멀티 마나하트를 전수받는 일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다. 데미안의 습득력은 엄청나니까. 천재라는 말을 붙이기에 손색이 없으니까. 그러니 아스라한 가문 고유의 기예라 하더라도 넉넉히 익힐 수 있으리라 보았다.

변경백의 허락?

그것 또한 쉽게 여겼다.

자신이 황태자니까. 황족의 부탁이면 기예 하나쯤은 쉽게 얻어낼 수 있으리라 보았다. 한데 이제 보니 그러한 생각이 오만이었고, 방심이었다.

‘쯧. 이건 내 실수다.’

라키엘은 스스로의 안일함을 인정하며 변경백을 쳐다보았다. 할리우드 배우 뺨치게 잘생긴 변경백의 얼굴은 이미 엄격, 근엄, 진지의 트리플 토핑으로 잘 버무려져 있었다. 즉,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완고한 기색이 충만했다.

가문의 기예를 절대 순순히 내어줄 수 없다는 고집. 혹은 단호함. 변경백의 저 철벽같은 태도를 뚫으려면 어떤 수를 써야 할까.

라키엘은 잠시 고민했다.

맹렬하게 뇌세포를 채찍질했다. 혹사를 당한 뇌세포들이 피라미드 짓는 산업역군처럼 땀방울을 흘렸다. 흘러넘친 땀방울이 전두엽을 자극했다. 새로운 발상과 가능성들이 반짝이고, 부딪치고, 조합되었다.

그 끝에서 마침내 라키엘은 떠올렸다. 상대의 가장 아픈 약점을 쥐고서 짤짤짤 흔드는 야비한 협상의 묘수를.

“후우.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는 미소를 입술 끝에 장착했다. 여유를 되찾은 승자의 눈빛으로 변경백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하나 제안을 하지.”

“제안을 하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가문의 기예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협상과 설득도…….”

“변경백이 데미안 카이엔 경에게 멀티 마나하트를 전수해 준다면…… 살려는 드릴게.”

“……예?”

“살려는 드린다고.”

60세가 넘도록.

아주 벽에 똥칠을 할 때까지.

라키엘이 맑은 눈을 반짝이며 화사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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