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82화 (381/468)

382화. 호기심 해결 버튼을 눌러주세요 (1)

“변경백이 데미안 카이엔 경에게 멀티 마나하트를 전수해 준다면, 살려는 드릴게.”

“……예?”

“살려는 드린다고.”

“…….”

변경백, 알칸타르 아스라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강골의 무인이었다.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검부터 잡았고, 그 이후의 모든 삶을 검과 전투에 걸며 달려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일편단심 검만 아는 단순한 무부는 아니었다. 가주라는 직위는 그에게 필연적인 정치질과 그에 따르는 눈치를 선사했다. 그걸 갖추지 못하고서는 변경백령을 이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동안 단련된 정치적 감각과 눈치가 그를 당혹케 하였다.

“전하께서 하신 말씀은 곧, 전하의 의술로 저의 핏줄에 새겨진 저주를 지워 줄 터이니, 대신 마나하트의 기예를 내놓으라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맞습니까?”

“맞아. 변경백과는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

라키엘은 두 눈을 반짝이며 화사하게 웃었다. 사실은 변경백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 애매하고도 도발적인 단어를 선정(?)했던 그였다. 이쪽이 일부러 거칠게 고른 어조. 살려는 드린다는 말. 그 속에 진짜로 숨은 뜻을 변경백이 알아차리는지를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내 예상보다 감이 좋은 사람이야.’

눈치가 빠르다.

신중하다.

이러면 이야기가 편해진다. 믿고 함께 일을 추진해볼 만하다는 뜻이니까.

라키엘은 내심 만족하며 말했다.

“변경백 그대의 말대로야. 그대의 가문에 내려진 저주? 나는 그게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고 봐. 질환이지. 원인을 파악하고, 치료법을 탐구하면, 충분히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있는.”

“…….”

“그러니 서로 협상을 해보는 건 어떨까. 나는 그대의 심장 질환을 치료해 주고, 그대는 여기 카이엔 경에게 멀티 마나하트의 기예를 전수하고.”

“…….”

“어떻지?”

라키엘은 변경백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지간하면 ‘예스’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한데 그때였다.

변경백의 미간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뭐?”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변경백. 최소한의 예의를 충분히 갖추었으나, 그 아래에 묻어나는 감정은 뚜렷한 반발심. 혹은, 이글거리는 모종의 울분과 닮은 그 무엇.

그러한 감정을 차근차근 짓씹듯, 변경백이 또박또박 말했다.

“감히 다시금 고하여 드리건대, 멀티 마나하트는 우리 가문에 새겨진 고유의 기예이며, 그것을 지켜나갈 권리를 선대의 세 번째 황제께서 약조하셨습니다.”

“그건 알겠는데…….”

“아니오. 모르고 계십니다.”

“뭣?”

“전하께서 그걸 정말로 제대로 알고 계신 거라면, 우리 가문의 기예를 협상의 도구로 삼을 생각 자체를 하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

변경백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아니, 그보다는 황가의 세 번째 황제가 아스라한 가문에 무엇을 약속했길래 이런 격한 반응이 나오는 걸까.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라키엘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소설 마검황 어디에서도 세 번째 황제와 아스라한 가문 사이의 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 비슷한 것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알 수가 없다. 알 방법도 없다.

하니 입을 다무는 것이 최선이겠다.

‘상황이 애매할 때는 함부로 반응하지 말자.’

그는 과거의 숱한 경험을 떠올렸다. 한의원을 운영하던 시절, 그곳의 가장 주된 고객은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이셨다. 품격 있는 분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그만큼 성격이 비뚤어진 분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다가 저렇게 연세를 드시고도 성격이 배배 꼬일 수 있을까. 왜 사람을 저토록 함부로 대하시는 걸까. 어째서 세 살 아이처럼 떼만 쓰시고도 당당한 걸까. 때로는 답답하고 울분이 터져서 저녁에 깡소주를 들이켠 날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였던가.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성격 배배 꼬인 어르신들. 그분들을 대하는 최선의 방법을 저절로 장착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되도록 반응을 자제하며 상황을 살펴보기’였다.

그 방법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어르신을 쓸데없이 자극하는 걸 피하면서, 한편으로는 어르신의 취향(?)을 파악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주로 어르신의 화를 누그러뜨릴 마법의 단어를 찾아낼 시간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답은 생각보다 간단한 곳에 있었거든. 단순히 진료 대기를 5분쯤 해서 부아가 났다거나. 혹은 집에서 아드님 부부와 신경전을 벌이고 와서 언짢은 상태였다거나.’

그런 부분들을 파악하면 다음 과정은 쉬웠다. 그 부분을 달래주면 되었으니까. 자신의 불만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그 자체를 알아주었다는 태도를 보여주면 되었으니까.

그러면 어르신들도 놀라울 정도로 태도를 바꾸어 주시곤 했다.

지금도 상황이 비슷해 보였다.

‘나는 선대 황제와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몰라. 그러니 일단 가만히 있자. 상황을 살펴보자.’

대응법을 정한 라키엘은 묵묵히 침묵을 유지했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이쪽의 대꾸나 반응을 잠시 기다렸던 듯한 변경백은 무안함을 느꼈는지, 살짝 상기된 투로 말했다.

“아스라한 심법의 일부를 포기하고서 가까스로 얻은 권리입니다. 한데 황태자 전하께서는 그 권리를 협상 테이블에 얹으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

“기예를 지킬 권리는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명백히 선을 넘고 계신 것입니다.”

“…….”

그런 거였나.

라키엘은 붉게 달아오른 변경백의 표정을 보며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함부로 대꾸하지 않길 잘했다. 무려 아스라한 심법의 일부를 포기하고 얻은 권리였다니. 듣고 보니 변경백이 이토록 화를 내는 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아스라한 심법은 이 가문의 시조였던 하비엘 아스라한이 창안한 것이라고 했지. 그게 나중에 황가로 흘러들어와 황족 고유의 심법이 되었고.’

마침내 이쪽에게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정작 원래 이 심법을 지녔던 아스라한 가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고 지냈다. 아니, 사실은 관심도 없이 지냈다.

아마도 변경백의 저러한 울분은 이쪽의 무관심한 태도 때문이겠지.

“미안하군. 진심으로.”

“…….”

이쪽의 사과가 뜻밖이었던 걸까. 변경백이 멈칫했다. 라키엘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대의 말이 옳아. 내가 선을 넘었지. 그대가 어째서 울분을 표하는지도 전부 이해하겠어. 그대 가문의 불운한 질환을 인질로 삼아 권리를 내놓으라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겠지.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내가 정말로 그렇게 했지. 인정해.”

“무슨…….”

“하지만 말이야. 그대는 가주이지 않나?”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가문 구성원들의 건강과 행복.”

“…….”

변경백이 입을 다물었다.

라키엘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시도를 해볼 수 있어. 적어도 그대와 가솔들의 심장을 살펴보고, 질환의 진짜 원인을 찾아보고, 치료법을 연구할 수는 있어. 물론 치료에 성공할 거라는 보장은 하지 않겠어. 그건 명백한 기만이고, 사기니까.”

“전하.”

“그러니까 내놔. 멀티 마나하트. 그럼 나는 그대와 가문의 구성원들에게 건강해질 기회를 주지.”

“그러나 전하.”

“알아. 분노해.”

“……예?”

“분노하라고.”

“무슨 말씀을…….”

“나를 원망하고 분노해도 탓하지 않겠어. 조금 전에 말했듯이 내가 선을 넘었으니까. 누구든, 누구를 상대로 하든, 선을 넘을 때는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각오는 해야지. 그러니까 괜찮아. 나는 그대에게 원망을 들을 각오가 되어 있어.”

“…….”

변경백이 이쪽을 묘한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키엘은 자신의 할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진심? 그런 건 담지도 않았다. 감정에 대한 호소? 그럴 생각도 없었다.

지금 꺼내놓을 것은 냉철한 현실에 대한 진단과, 그걸 통해 서로가 얻을 수 있는 이득. 그것보다 솔직한 대화가 어디에 있을까.

‘특히 환자의 건강에 대한 것이라면.’

오히려 감정과 진심을 호소하는 설득이 기만질이 된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여 최대한 냉철하게, 냉정하고 건조하게 설득을 이어갔다.

“하니 그대도 각오를 품는 게 어떨까.”

“어떤, 각오를 말씀이십니까.”

“가문의 구성원과 후손들에게 욕을 먹을 각오.”

“…….”

“나와의 협상에 임해서 권리 일부를 잠깐만 포기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 그대 한 사람만의 건강? 그 정도라면 나도 이런 설득은 안 해.”

“우리 가문 전체의 심장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고칠 수 있다고는 안 했어. 그럴 기회를 가져보자고는 했지만.”

“…….”

“그러니 한 사람인 알칸타르 아스라한이 아닌, 아스라한 변경백 가문의 가주로서 잘 생각해보도록. 내가 그대에게 원망을 받고, 그대가 가문의 후손들에게 욕을 먹으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도 있는 협상이니까.”

여기까지면 됐다.

할 말은 다 했다.

용건을 모두 밝힌 라키엘은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았다.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만 던져두고 응접실에서 나왔다.

“대답은 천천히 듣도록 하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변경백은 대꾸 없이 굳은 표정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알 도리가 없었다.

속내를 알기 어려운 건 이쪽의 안내를 맡은 소년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아스라한 가문의 아르민 아스라한이 이 땅의 유일한 후계자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은발에 가까운 청회색 머리칼. 나이는 갓 15, 6세쯤 되었을까. 어디 화보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매끈한 용모의 미소년이었다.

“저는 본 가문의 가주인 알칸타르 아스라한의 손자이며, 전하의 안내와 시중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오니 황태자 전하께서는 원하는 것이나 궁금한 것이 있으실 때마다 저를 편히 불러 말씀을 해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

이 녀석, 어째 대사와 표정이 좀 따로 노는 타입인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저토록 극진한 말투와는 달리 이쪽을 보는 눈길은 냉랭한 얼음 그 자체였다.

단순히 무뚝뚝한 성격이라서?

‘그건 아닌 듯한데.’

딱 봐도 억하심정이 담긴 눈빛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기 머리를 대폭망 시킨 미용사를 쳐다보듯이, 혹은 탑라인에서 3연속 솔킬을 당한 탑라이너가 자기팀 정글러를 대하듯이 이쪽을 쳐다볼 리가 없잖아.

이유가 뭘까.

혹시…….

라키엘은 가주의 손자라고 스스로를 밝힌 소년의 태도를 보다가 무언가를 문득 떠올렸다. 제국의 3대 황제와 아스라한 가문 사이의 비화. 아까 가주가 말했지. 아스라한 심법의 일부를 ‘포기했다’던가.

‘그건 분명 자발적으로 포기한 게 아닌 뉘앙스였어.’

분명 뭔가가 있다. 3대 황제와 아스라한 가문 사이에 뭔 일이 있었던 거다. 그런데 그게 뭐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가주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 아까는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답답했다.

뭔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그에 맞춰서 대응하든 어르고 달래든지 해볼 텐데, 아는 것이 없으니 뭔가를 섣불리 제시하기도 조금 그랬다. 하여 변경백을 설득할 때도 생각만큼 강하게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지금 눈앞에 그걸 물어볼 딱 적당한 녀석이 나타났네?’

아이고 기뻐라.

빵긋.

라키엘의 입가에 호기심 해결 버튼을 발견한 사냥꾼의 미소가 보람차게 쑴펑쑴펑 떠올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