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맞춤형 심법 (1)
딩동!
월급 수령 문자만큼이나 상큼한 소리.
더불어 콩닥콩닥 고조되는 기대감.
하지만 정작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의 내용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지옥왕 : 하비엘 아스라한이 당신의 치료법과 성과에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어?’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휘동그레 떴다. 그리고 눈꺼풀을 끔벅끔벅 비비며 메시지를 거듭 읽어보았다.
‘뭐냐. 이건 또 뭔 소린데.’
완치 알림을 예상했다.
보너스 수명을 기대했더랬다.
한데 난데없이 지옥왕이라니?
‘내 치료법에 관심을? 그런데, 그 지옥왕이, 하비엘 아스라한? 설마…….’
300년 전 프론테라 가문의 충신이자, 역사상 유일무이했다는 그랜드 마스터? 아스라한 변경백 가문의 시조인 그가…… 지옥왕이라고?
‘이거 실화?’
당연히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오랜 경험으로 그러한 진리(?)를 체득하고 있던 라키엘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이건 좀 의외인데.’
라키엘은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던 하비엘 아스라한에 대한 내용을 떠올렸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절세의 기사이자, 더없는 인격자였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충심으로 가득한 사내였다고도 하였던가.
‘그랜드 마스터, 국가 하나쯤은 능히 작살낼 수 있는 무력을 갖추었음에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지. 반란은커녕 평생을 충성하며 지냈다고 들었어. 특히 동년배의 주군이었던 로이드 프론테라와는 평생의 우정을 나누었다고도 했고.’
유일무이한 그랜드 마스터이자.
초대 황제의 스승이자.
세기의 미남자였던 자.
말 그대로, 엄친아 그 자체.
‘한편으로는 내 몸, 라키엘의 조상이기도 하고.’
후일, 하비엘 아스라한의 후손이 로이드 프론테라의 후손과 결혼을 하였다고 했다. 그만큼 하비엘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남부러울 것 없을 삶을 살았던 위인이었다.
그런데 왜?
어쩌다가 지옥왕이 되어 있다는 걸까.
‘혹시 말년에 남모르게 사채라도 거하게 땡겨 쓰셨나……?’
잠깐 말도 안 되는 망상이 들어서, 라키엘은 얼른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지금은 망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닌 까닭이었다.
‘집중하자.’
지금은 첫 3단계 통과자가 나온 순간이다. 이때가 중요하다. 3단계를 통과했다는 것은 발바닥 용천혈에서 발휘한 흡인력으로 본인의 체중을 능히 감당했다는 뜻이고, 그만큼 용천혈이 충분히 단련되었다는 뜻이니까.
또한, 마침내 용천혈에 써클을 장착할 모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시나 써클이 자동으로 생성되지는 않는다는 거지.’
하니 이쪽이 나서야 한다.
잡념을 떨쳐낸 라키엘은 갓 3단계를 통과한 아르민에게 샤샥 다가섰다.
♣
아르민에게 해준 써클 장착 서비스(?)는 의외로 쉬웠다. 이미 써클을 탑재할 모든 준비를 마친 아르민의 용천혈이었다. 꾸준한 단계적 훈련 덕분에 주변 발바닥의 근막과 혈맥도 제대로 풀리고 단련되어 있었다.
또한, 이쪽과 아르민 모두 기본적으로 아스라한 심법의 보유자였다. 덕분에 약간의 마나 유도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써클의 핵이 생성되었다.
이후의 과정은 거의 자동이었다.
용천혈에 핵이 생성되는 것을 느끼자마자 아르민이 명상을 시작했다. 이후 두 시간 남짓. 집중의 시간이 끝나고 눈을 떴을 때, 아르민은 양쪽 발바닥에 하나씩의 써클을 장착한 트리플 써클의 보유자가 되었다.
“……라는 설명은 잘 이해하겠습니다, 전하. 한데 어째서 저는 그 과정이 잘 되지가 아니하는 것일까요?”
최초의 발바닥 써클 보유자인 아르민이 배출된 지 사흘이 지났다. 아스라한 변경백 가문의 가주, 알칸타르 아스라한은 곤혹스러운 낯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3단계의 훈련을 통과한 지 이틀이나 지났음에도 그 뒤의 과정이 지지부진한 까닭이었다.
즉, 변경백은 유독 용천혈에 써클을 정착시키지를 못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분명 3단계의 훈련을 통과할 만큼 단련을 거듭하였고, 모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또한, 전하께서 이끌어주시는 경로를 따라 마나를 운행하였습니다. 한데 어째서…….”
변경백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가 시키는 대로 다 했다.
한데 그다음으로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다. 혹여나 황태자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자신의 손자인 아르민이 당당히 새로운 써클을 장착하는 데에 성공했으니까. 그 후로도 사흘 동안 무려 스물이 넘는 식솔들이 아르민과 같은 경지에 다다랐다.
한데 자신만 이 모양이다. 가솔들이 멀쩡히 잘 만드는 써클을, 유독 자신만은 만들어내지를 못하는 중이었다.
변경백은 그 사실이 매우 곤혹스러웠다.
“큰일입니다. 제가 이래서는 안 되는 법인데.”
자신은 가주다.
가솔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 존재다. 한데 이렇게 지지부진하다니. 이래서야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있단 말인가.
라키엘은 쓴웃음과 함께 변경백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대가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어. 그대의 잘못이나 모자람 때문이 아니니까.”
“예?”
“사실 나도 처음에는 의아했거든. 상식적으로는 그렇잖아? 가문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심법을 단련한 그대가 가장 먼저 써클을 장착할 줄 알았지. 하지만 며칠 동안 관찰해보니 아니었어. 오히려 반대였달까.”
“반대라고 하심은…….”
“기존의 개량형 아스라한 심법을 깊이 단련한 사람일수록 발바닥에 새로운 써클을 장착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 어린 식솔들이 그대 같은 어른들보다 손쉽게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는 걸 보면 말이야.”
“그, 그런 것입니까?”
“아마도?”
라키엘은 자신의 짐작을 말했다.
“그대가 가슴에 지닌 써클은 가솔들의 것보다도 훨씬 크고, 강력하고, 사납지. 그만큼 완고해. 가슴에 품고서 단련을 거듭한 시간만큼 단단한 거야. 새로운 심법의 숨결이 파고들 여지를 좀처럼 허락해 주지 않을 만큼.”
“그렇다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하니 초조해할 필요가 없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면 된다.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순간이 찾아오는 법이니까. 그걸 믿으며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치료의 과정 또한 그렇다.
‘나 아는 지인인 웹소설가 백경 씨가 그랬지. 위경련이 너무 심하게 와서 응급실에 실려가고, 입원하고, 일주일 가까이 물도 못 마시고, 보름 동안 눕지도 못하고서 앉아서 잠을 자고, 2주 만에 8킬로그램이 빠지는 와중에 자신은 왜 그렇게 아파야 하는 건가를 고민하다가 얻은 결론이 그거라고 했어.’
때로는 내려놓기.
조바심 내지 말기.
지금 변경백에게 필요한 것이 그러한 마음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죽기 전엔 될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
“응? 왜?”
“아니, 아닙니다.”
“방금 눈으로 욕을 한 거 같았는데.”
“착각이실 겁니다.”
“쓰읍. 아닌데. 느낌 왔는데.”
“잘못 보셨겠지요.”
“그런가.”
“완전히 그렇습니다.”
“알았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다시 집중하자고. 눈 감고. 호흡 가라앉히고. 마나의 흐름을 따라서. 후우.”
“……후우.”
변경백이 무아의 세계로 의식을 던졌다. 던지고 또 던지고. 무수히 부딪히고. 다시금 시도하고.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무심히도 흘렀다. 해와 달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자리를 바꾸고. 별똥별이 쿠쾅 떨어지고. 가정이 흔들리고. 사회가 무너지고. 혁명의 불꽃이 피어나……지는 않고. 대신 무수한 써클이 아스라한 가문 사람들의 발바닥을 간질이며 깨어났다.
하나. 둘. 다섯. 서른. 일흔.
라키엘의 예상대로 어린 가솔들이 오히려 손쉽게 써클을 일깨웠다. 어른들은 상대적으로 늦었다. 하지만 꾸준했다.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
먼저 용천혈의 써클을 깨우친 어린 아들이 고사리손으로 엄마의 길을 이끌었다. 딸이 아버지를 인도하고, 조카가 삼촌과 이모를 성원했다.
하루. 이틀. 닷새. 보름. 이레.
마침내 한 달이 지나는 사이, 변경백을 마지막으로 가문의 모든 인원이 용천혈의 써클을 획득했다. 모든 식솔이 트리플 써클의 경지에 오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키엘의 귓가는 내내 잠잠하였다. 딩동, 하고 울리는 반가운 알림도, 그에 따르는 알찬 메시지가 떠오르는 일도, 결코 없었다.
그러나 라키엘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역시 이래야 비후성 심근증이지.’
그는 오히려 웃었다.
애초에 심근증은 쉬운 질환이 아니다.
사실상 거의 불치병에 가깝다.
현대 한국에선 삽입형 제세동기(ICD) 등의 기구를 삽입해서 돌연사를 막아내는 정도가 가능할까. 혹은 베타 차단제(beta blocker)나 아미오다론(amiodarone) 등의 불확실한 약물치료가 제한적으로 시행될 뿐이다.
‘혹은 베라파밀(verapamil)로 심실의 이완 기능을 살짝 호전시키거나. 그것도 아니면 심근 일부를 잘라내는 심근 절제술도 있지만 그건…… 좀 위험하지. 혹은 심실중격 색전술을 쓴다거나.’
하지만 그 어떤 치료법도 비대해진 심장 근육 자체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하는 실정이었다. 대개가 일상생활이 가능한 정도로 만들어 주는 임시방편적 치료일 뿐.
‘그러니까 나도 조바심 내지 말자. 그만큼 어려운 질환이야. 이걸 완치? 근원적으로 치료? 그게 쉽진 않을 거라는 거, 이미 예상했잖아.’
어떤 질환이든 그렇다.
하다못해 감기도 마찬가지다.
감기약을 때려붓고 다 나아간다고 방심할 때가 가장 위태롭다. 혹여나 환자가 방심하는 일이 있더라도, 의료인만은 끝까지 예후를 관찰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A/S! 애프터 서비스의 정신!’
라키엘은 그러한 진리를 되새기며 본격적인 치료 A/S(?) 과정에 돌입하였다. 그는 매일 아르민을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발바닥에 새로 장착한 써클이 아르민의 가슴에 있는 써클과 심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면밀히 관찰하였다.
다행히 새 써클의 효과가 보였다.
‘역시.’
양쪽 발바닥의 두 써클이 보조 배터리처럼 마나의 순환에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가슴 쪽 메인 써클의 부담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만큼 심장에 가해지는 부담도 적어지겠지. 장기적으로는 심장의 근육이 덜 비대해질 것이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해.’
아무래도 써클이 발바닥에 장착됐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듯했다. 그럼 무엇이 더 필요할까. 답은 간단했다. 그건 바로 발바닥의 써클을 제대로 활용하는 최적화형, 맞춤형 아스라한 심법이었다.
“……라는 거니까, 아르민?”
“예, 전하?”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봐.”
“이, 이렇게요?”
“응.”
“하지만 전하?”
“응 왜?”
“이건 자세가 조금…….”
“이상해?”
“예.”
“어째서?”
“그게, 조금, 사족보행을 하는 거 같아서요.”
“사족보행 하는 거 맞는데.”
“…….”
“그게 이상해?”
“…….”
이상하다. 매우 이상하다! 아니, 애초에 이상한 게 당연하잖아!
아르민은 황태자를 향해 따지고 싶은 마음이 한보따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상대가 황태자라서? 개기다간 지난번처럼 따끔한 맛을 볼 듯해서?
그건 아니었다.
사실 이제 아르민은 황태자를 남몰래 존경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가문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는 라키엘의 진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건 이상했다.
멀쩡한 몸으로 어기적어기적 사족보행 모드라니!
“음, 그러니까 이건 ‘드라군 심법’이라고 따로 이름을 붙여볼까.”
“…….”
“야야, 리시빙, 이라고 말해볼래?”
“…….”
“어흠흠, 됐고. 아무튼. 그 상태에서 숨을 멈추고. 발바닥 쪽 써클을 최대로 회전시켜.”
“이, 이렇게요?”
“숨은 참으랬지.”
“읍읍?”
“어. 그렇게. 좋아. 잘한다. 다음은 발바닥에서 증폭된 마나 덩어리를 종아리와 허벅지를 이용해서 방출.”
……투콰앙!
라키엘의 말이 끝나자마자였다.
그의 지시에 따라 사족보행 자세로 웅크리고 있던 아르민이, 개구리가 솟구치듯 위쪽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며 천장을 뚫고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딩동!
자욱한 먼지 사이로, 반가운 알림음과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사회인의 생명수이자 활력수인 보너스.
그토록 기다렸던 완치 알림과 보너스 수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