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역병의 권속 (1)
파직!
이것은 결코 복수가 아니다.
황태자 전하에게 굴림을 당하던 때엔 발바닥이 쓰라리고 쑤시고 조각조각 분해됐다가 친절하게 재조립되는 것처럼 아프긴 했지만, 결코 그때의 혹독했던 시련 때문에 지금 이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하를 향한 충성! 절절히 끓는 충정! 일편단심! 오직 전하! 만세!
……라는 심정으로 변경백은 단호한 눈길을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전하. 대저, 데미안 카이엔 경은 전하의 호위로서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칠 사내일 것입니다.”
“뭐, 그렇지.”
“예, 전하. 하오니 제가 데미안 카이엔 경에게 멀티 마나하트를 전수하는 일에 어찌 감히 가벼이 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데미안을 제대로 굴려 주겠다? 나를 위해?”
“그렇습니다, 전하.”
“이건 결코 발바닥 훈련의 복수가 아닌, 순수한 충성이자 충절일 뿐이다?”
“물론입니다, 전하.”
“그러니 데미안이 괴롭게 구르는 만큼 그대가 즐거워질 것이다?”
“정답입니다, 전하.”
“왜 즐거워?”
“그야 물론 카이엔 경이 괴로워지는 만큼 전하의 미래가 더욱 안전해질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어유. 그렇지. 그렇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런 미래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것이고 말입니다.”
“아이고. 참말로 고마워라. 나도 웃음이 나오네.”
“제 마음을 알아주셔서 다행입니다, 전하. 아하하하하하.”
“그렇지? 하하하.”
“예, 하하하하하.”
“…….”
좀 그만해, 미친 자들아.
라키엘과 변경백의 대화를 곁에서 지켜보던 데미안은 나직한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솔직히 이제 더는 못 보겠다. 두 인간의 속이 빤히 보여서였다.
결국, 그는 반쯤 체념한 심정으로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바로 훈련을 시작하면 되는 것입니까?”
“왜? 우리 카이엔 경, 벌써부터 잔뜩 괴롭힘을 받고 싶어진 것이야?”
“그야 물론…….”
“아. 해야지. 당연히 바로 시작해야지. 마침 변경백도 그걸 원하는 듯한데. 그렇지?”
“물론입니다, 전하.”
변경백이 복수심…… 아니, 굳은 충성심을 이상한(?) 방향으로 활활 불태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면 전하. 저희는 지금부터 바로 멀티 마나하트 기예의 전수를 시작할 터이니, 괜찮으시다면 모쪼록…….”
“아, 자리를 비켜달라고? 물론이지.”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까지나 멀티 마나하트는 아스라한 가문의 기예. 그걸 전수받기로 한 사람은 데미안. 하니 자신은 이쯤에서 물러나 주는 것이 옳으리라.
“그렇잖아도 아침 먹다가 달려온 참이라서. 식사는 흐름이 중요하잖아?”
“전하의 배려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대신 우리 카이엔 경, 확실하게 키워달라고.”
“맡겨만 주십시오.”
라키엘은 변경백의 인사를 받으며 연무장에서 물러났다. 변경백은 황태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데미안도 황태자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했다. 나도 아직 아침 못 먹었는데.
하지만 배움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며, 때로는 피도 눈물도 아침밥도 없는 법.
“데미안 카이엔 경? 배움의 준비가 되었는가?”
엄숙하게 들려오는 변경백의 목소리.
데미안은 대답 대신 검자루를 쥐어 보였다.
변경백과 데미안.
서로를 향하여 부딪치는 두 남자의 시선에서 소리 없는 거친 불꽃이 튀었다.
♣
콰측!
불꽃이 튀었다.
격렬한 명멸의 섬광을 망막에 담기 위해 애를 쓰며, 흑마법사 케노스는 두 눈을 부릅떴다.
‘나……나는…….’
그러나 보이는 것이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온통 흐려지고 뭉개진 시야 속에 비치는 것이라고는 절망적인 실루엣들의 춤사위뿐.
검고 푸른.
붉고 검은.
때로는 살색의 덩어리가.
잿빛과 금발을 애처롭게 휘둘렀다.
아니. 사실은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경련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겠지. 나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온몸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에 휩싸여. 어찌할 수도 없이 죽음의 길을 밟아가는 것이겠지.
‘나는…… 흐, 끄흐…… 나는…….’
동남부를 호령하던 흑마법사였다. 살아 있는 존재의 공포였다. 빙의와 사령술로는 감히 견줄 상대가 없었다. 유구한 학파의 뜻을 이어 검은 야망을 품었던 자신이었다.
한데 지금은 어쩌다 이런 꼴이 된 걸까. 그는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괴로웠다. 전신이 내장부터 피부의 가장 끄트머리까지 한 올 한 올 모조리 타오르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쳐야 하는 이 순간이, 그저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우리는…….’
케노스의 악다문 입술 사이로 선혈이 흘렀다. 방울지며. 턱 끝을 희롱하다가 톡. 떨어졌다. 그 순간, 고통으로 뭉개지는 그의 의식 사이로 최근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그저 자신과 동료 흑마법사들은 제법 긴 시간 골머리를 앓았을 뿐이었다. 황태자 때문이었다. 이런 국경의 변경백령에 황태자가 직접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군단급 병력을 직접 이끌고 올 줄은 더더욱 몰랐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누가 봐도 토벌군이 확실한 저들의 진군 때문에 초조해졌다. 비록 자신이 동남부를 호령하던 흑마법사였다 한들, 회합의 리더로 군림했던 아난샤보다 강하지는 못했으니까. 그런데 군단을 이끌고 온 황태자, 저자가 아난샤를 직접 처단한 존재였으니까.
게다가 설령 일이 잘 풀려 군단과 황태자를 모두 잡는다 한들 뒤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아니. 황제와 제국 전체, 수십 무리에 달할 군단의 분노를 받아낼 자신까지 들지는 않았다.
하여 고민에 휩싸였다.
몇 날을 두고 토론을 벌였더랬다.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맞설 것인가. 도망을 칠 것인가. 어떻게 근거지를 옮길 것이며. 필요한 자금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그 끝에 나온 결론은 하나였다.
- 항복합시다.
엿새에 걸친 토론의 끝에서 자신이 꺼냈던 발언을 케노스는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자신이 생각해도 현명한 판단이었다. 동료 흑마법사들 또한 무거운 고갯짓으로 동의를 표하였다. 만장일치였다.
하지만 곧바로 항복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빈손으로 항복? 군단을 이끌고 온 황태자에게? 아무리 운이 좋아도 의심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고작해야 목이 매달리는 최후가 기다리고 있겠지.
그 사실에도 모두가 만장일치. 그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황태자의 환심을 살 만한 선물이야. 우리 같은 거물의 항복에 능히 어울리고 합당할 규모, 혹은 선전 효과를 지닌 선물.
하면 선물은 무엇이 좋을까.
답은 간단했다.
악티누스.
자신들이 협력하여 만들 수 있을 가장 강력한 흑마술의 권속. 저주받은 피조물. 선대의 모든 흑마법사들이 입을 모아 찬양하고 저주한 흑마법의 결정체이자, 그 자체로서 오롯이 역병이라는 존재.
그 고대의 존재를 전쟁 무기로 만들어 황태자에게 항복의 선물로 바친다면 어떨까. 아무리 황태자라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리라. 기뻐하리라. 악티누스를 수족처럼 부릴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겠지. 덕분에 우리의 항복도 진정성을 인정받을 것이고.
답이 나왔으니 남은 것은 신속한 준비였다. 군단을 이끌고 온 황태자가 이쪽의 아지트를 찾아내기 전에 악티누스를 완성하여야 했다. 서둘렀다. 식사를 마다하고 잠까지 줄여가며 모두가 매달렸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완성의 마지막 과정을 밟았는데.
그런데.
어째서.
나는.
“……끄…… 흐읏.”
잠시 뭉개지며 상념 속으로 빠졌던 케노스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고통이 그를 포옹했다. 찰나지간에 되찾은 이성. 마지막 발악처럼 또렷해진 시야. 참담한 자각.
“으…… 으흐으으! 오, 오지 마! 오지 마아악!”
케노스는 주저앉은 채 뒤로 기었다. 그의 공포에 휩싸인 눈길이 자신 앞에 우뚝 선 기괴한 덩어리를 올려다보았다.
악티누스.
저주받은 흑마술의 결정체. 살해당한 새끼 드래곤의 골격을 기초로 삼아, 다섯 고위 마법사의 가장 음습한 원념을 숨결로 불어넣은 존재. 거기에 각 학파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마정석을 원한의 심장으로 새겨넣은 역병의 권속.
머리 높이 10미터의 기괴한 골격 조합체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악티누스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단지 서 있을 뿐. 그저 서 있기만 할 뿐.
하지만 자신의 창조자인 케노스를 비롯한 흑마법사 전원을 죽음으로 인도하기에는 그것으로 이미 족하였다.
“……흐, 끄흑! 흐끅!”
케노스의 눈이 하얗게 뒤집혔다. 심장이 분당 200회를 웃돌며 격렬하게 뛰었다. 반면 혈압은 비정상적으로 떨어졌다. 혈액 내의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이 모조리 실시간으로 파괴되었다. 기초 조직부터 파괴된 골수는 적혈구를 생산하지 못하였다.
그의 신체가 급속도의 다발성 장기부전 상태로 접어들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의식이 아득해졌다. 마치 쇳가루를 혓바닥에 뿌린 것 같은 기분. 전신이 말단부터 내장까지 모조리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죽음과의 포옹.
단말마조차 내지르지 못할 그 순간에 케노스는 생각하였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나는, 모두가 성공의 희망에 부풀어 있었는데. 악티누스는 말 그대로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었는데. 오직 마정석을 새겨넣는 작업만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래.
마정석.
흑마법의 각 학파가 선대로부터 나누어 받은 힘의 결정체.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돌덩이. 손에 쥐면 이유 없이 따스한 돌멩이. 하지만 이것이 모이면 능히 일개 군단과 견줄 힘을 낼 것이라 하였지.
그래서 악티누스의 몸에 박아넣었다. 다섯 학파의 다섯 마정석을 악티누스의 심장 대신 새겨넣었다. 한 덩이씩 차례대로. 차근차근.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상의 징조도 보이지 않았는데. 실패의 조짐도 느끼지 못했는데.
그런데.
마지막 다섯 번째 덩어리가 악티누스의 가슴에 끼워지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다섯 갈래의 마정석이 마침내 하나로 합쳐지던 때였던 것 같다. 돌연 시야 가득 새파란 빛이 차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던 것도…… 같다.
그때부터였다.
입안에 신맛이 느껴지며 전신에 벼락을 맞는 듯한 작열감을 느낀 것은. 현기증과 구토. 내장마저 게워낼 기세로 토악질을 하다가 선혈마저 토하고.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가 똑같은 꼬락서니인 동료들을 보며 절망하고.
그리고 이렇게. 죽어가고.
“나…… 나는…… 끄흐읍…… 나는…….”
수십 갈래씩 터진 안구의 실핏줄에서 출혈이 일어났다. 피눈물이 케노스의 얼굴을 적셨다. 그러나 적혈구가 모조리 파괴된 그의 피눈물은 차마 붉지조차 못하였다. 그저 싯누런 진액처럼 뚝뚝 흘러내릴 뿐. 마지막 생명의 한 방울처럼. 뚝. 뚝.
뚜둑…….
누런 피눈물을 흘리며 단말마처럼 중얼거리던 케노스의 목이 아래로 꺾였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한때 대륙을 흽쓸던, 그러한 야망을 꿈꾸었던, 음험하고 위험한 흑마법의 마지막 계보가 이 땅에서 헛된 미련처럼 끊겼다.
그 직후, 내내 가만히 서 있기만 하였던 악티누스의 거대한 몸체가 움찔거렸다.
……쿠그극.
첫 울음처럼 흔들린 악티누스의 몸체. 그 위에서 목과 고개가 묘한 각도로 틀어졌다. 아래를 향하여. 방금 죽음과 포옹한 케노스를 지켜보며. 알 수 없을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리고 자각하였다.
- …….
창조자가 죽었다.
오직 살기 위해 나를 창조한 이들이, 나로 인하여 비가역적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슬픈가.
혹은 공허함을 느끼는가.
모르겠다.
어찌하여 내가 존재하여야 하는지도. 이러한 숨결을 내뱉는 이유와 목적조차도. 물어볼 이마저 없으니, 더더욱 모르겠다.
그러면 찾아야 할까.
답을 알려줄 대상을.
세상 어느 곳인가엔 존재할 그런 이를.
쿠구구구구……! 콰득!
탄생의 혼란을 홀로 수습한 피조물, 악티누스가 창조자들의 시신을 고즈넉이 지르밟으며 저택 밖으로 향하였다.
미증유의 재난이 아스라한 변경백령에 강림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