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화. 가까이서 보면…… 어? (2)
터엉!
- ……!
당황스럽다.
그저 희뿌연 막일 뿐이다. 마치 연기처럼 흐릿해서, 물에 부은 우유처럼 엷게만 보여서, 단지 손짓 한 번이면 휘저을 수 있을 듯한데.
그런데.
안 된다.
그게 되지가 않는다.
아니, 온몸을 날려도 뚫지를 못하겠다.
그저 부드러운 반발력에 휩싸였다가 자연스럽게 튕겨 나올 뿐.
터어엉-!
- 쓰하악……!
역병의 권속, 악티누스는 당황감을 머금고서 나뒹굴었다. 머리를 거칠게 흔들며 일어났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 전에 갑자기 나타나 도시를 완전히 감싸 버린 희뿌연 장막. 이걸 도저히 뚫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왜?
아무리 생각을 해도 모르겠다.
그럴수록 다급한 마음이 더욱 커져 갔다.
- 하흐하악-!
희뿌연 장막 너머 성벽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동족, 드래곤의 마나를 지닌 물건. 그걸 소유한 인간이 저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웠다. 원망스러웠다. 저 인간이 동족의 냄새를 앗아갔다. 자신이 품지 못하도록 내내 방해했다.
한편으로는 빌고 싶었다. 제발 동족의 냄새를 맡게 해달라고. 그리워서. 아득해서. 따스한 어미의 품에 안기고 싶어서. 보호받고 싶어서. 애원하고 싶었다. 제발. 내게. 그 물건을. 냄새를. 체온을. 감촉을. 모든 것을. 제발.
그러나 이쪽을 내려다보던 은발의 인간은 금방 눈길을 돌렸다. 언제 시선이 마주쳤느냐는 듯이. 마치 이쪽을 피하듯이.
- …….
아팠다. 원망이 커졌다. 초조함도, 애원하고 싶은 마음도 더욱 커졌다. 그럴수록 희뿌연 장막을 향해 더욱 거세게 달려들었다. 이것만 치우면. 그래. 이것만 없어지면. 그러니까 제발.
터어어엉-!
달려들고. 튕겨 나가고. 나뒹굴고. 일어나서 다시 달려들고. 끝없이. 언제까지고. 쉼 없이. 멈추지 않고서. 그리움의 크기만큼. 계속. 또 계속.
- 쓰아하아악!
억울하게 살해당한 새끼 드래곤의 유골로 만들어진 역병의 권속, 악티누스의 몸짓이 더욱 절박해지고 처절해졌다.
♣
마젠타노 제국.
그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 한쪽이 절박하게 뛴다. 처절하고 비장한 심정이 든다. 당연한 일이었다. 언젠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마젠타노의 대대적인 침공을 목숨 바쳐 막아내는 것. 오직 그것만이 나의 가장 커다란 사명이자 임무이니까.
그런데…….
“반갑습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입니다.”
“……뎃?”
하르미온의 국경 중심 도시, 테니온의 시장인 브레다 테니바흐는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하고야 말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투구를 벗은 신비의 기사. 도시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괴수와 싸워준 영웅. 그의 맨얼굴이 너무나 충격적인 까닭이었다.
‘…….’
지금 내가 보는 이게, 진짜 맞나.
시장 브레다는 기억 속 서랍을 다급하게 뒤지는 심정으로 두뇌를 풀가동시켰다. 곧 결론이 나왔다. 눈앞에 있는 은발의 청년이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맞다고. 그 언젠가 달달 외워두었던 제국 주요 인사의 초상화 목록에서 확실히 본 얼굴이라고.
“하. 하하. 하.”
어쩔 수가 없었다.
웃지 않으려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한쪽 입술로만 웃어 버렸다. 그 외의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적절한 대응이 떠오르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많이 놀라셨을 겁니다. 이해합니다.”
이쪽을 향해 싱긋, 약간은 씁쓸한 듯한 미소를 띠는 황태자. 그가 성벽 바깥의 괴수를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저도 이런 식으로 인접국의 도시를 방문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말이지요.”
“허어, 하. 동감입니다.”
시장은 졸지에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추며 증발할 뻔한 멘탈을 가다듬었다. 간신히 황태자의 말에 대답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마젠타노의 황태자를 반길 수밖에 없겠노라고.
“…….”
눈앞의 은발 청년은 잠재적 적국의 황태자이기 이전에, 영웅적 용기와 행동으로 이 도시를 구해준 은인이었다. 그 활약을 도시의 거의 모든 이들이 지켜보았다.
게다가 황태자가 투구를 벗기 전에 이미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사실에 감사를 표하였으니, 이제 와서 황태자를 해코지할 수는 없게 된 노릇이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자신은 도시의 시장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기사 가문의 후예가 아닌가. 명분 없이 은인을 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다. 바람직하지 못하다.
생각을 정리한 시장 브레다가 말했다.
“우선, 폭풍 앞의 촛불 같았던 우리 도시에 도움의 손길을 건네주신 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니…….”
“아무래도 자리를 조금 옮기는 편이 좋겠지요?”
이쪽의 속내를 짐작한 걸까.
황태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물어왔다.
시장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따라오시지요.”
주위의 눈과 귀가 없는 곳으로. 시장은 황태자와 일행을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그곳에서야 비로소 허심탄회한 질문을 건넬 수 있었다.
“묻고 싶습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께서, 대체 무슨 연유로 이곳에까지 모습을 나타내신 겁니까?”
궁금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일까. 혹은 마젠타노의 국내 권력 구도에 급박한 변고라도 생긴 것일까. 설마 황태자가 망명을 요청하러 온 건 아니겠지. 오만가지 생각과 짐작이 다 들었다.
물론 그의 짐작은 모조리 틀린 것이었지만.
“아까 그 괴수를 잡으러 왔습니다.”
“……예?”
황태자의 대답을 듣는 순간, 시장은 귀를 의심해야 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종류의 대답이었다. 황태자의 말이 이어졌다.
“그 괴수 말입니다. 본드래곤을 닮은. 놈을 잡으러 왔습니다.”
“설마, 황태자께서, 직접 말입니까?”
“예.”
“…….”
어째서?
왜?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태자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요. 그럴 겁니다. 일국의 황태자가 이런 소수의 인원을 이끌고서, 정체도 모를 위험한 괴수를 잡겠다며 타국의 국경을 제멋대로 넘어온 상황이니까요.”
“예, 그렇지요.”
“거짓말이라 의심하지는 않는 겁니까?”
“예.”
“어째서요?”
“정말로 거짓말을 하려 했다면, 훨씬 그럴듯한 말을 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거 참. 믿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라키엘은 그만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겪은 일들. 아스라한 변경백령의 국경 지대가 초토화되었던 초유의 사태. 흉수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시간들. 그리고 방사능 피폭에 대한 정보까지.
“……그래서 피폭이라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런 갑옷을 소량으로 급히 제작할 수밖에 없었고, 피해의 확산을 최대한 빠르게 저지하고자 직접 저 본드래곤을 추격해 이곳까지 왔다는 뜻입니까?”
“시장께선 요약에 재능이 있으시군요.”
“황태자님의 설명이 친절했던 덕분이지요.”
시장이 힐끔 집무실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솔직히 살짝 소변도 마려웠다. 그렇다. 황태자의 설명이 친절한 만큼 자세했고, 자세한 만큼 길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너무 지나치게. 귓구멍에 피가 맺히진 않았을까 염려가 될 정도로.
하지만 어쨌건, 덕분에 현재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더욱 커다란 위기감이 느껴지게도 되었다.
“어쨌건, 황태자께서 말씀하신 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이건…… 실로 큰일이로군요. 어쩌면 우리는 30일 뒤엔 모두 죽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라키엘의 미간도 덩달아 굳었다.
“30일 뒤엔 다 죽는다니, 무슨 뜻입니까?”
“지금 본드래곤을 저지하고 있는 성막이 30일 뒤엔 사라질 테니까 말입니다.”
“……설마.”
“짐작하셨습니까?”
“저 성막이 30일 한정의 1회용이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안타깝지만, 황태자께서 짐작하신 바가 맞습니다.”
“…….”
“30일 뒤엔 성막이 사라질 테고, 방사능이라는 강력한 저주를 지닌 저 본드래곤이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서 도시로 들어오게 되겠지요.”
“외부로의 지원 요청은…… 무리겠지요?”
“예. 밖에서 못 들어오듯이, 안에서도 못 나갑니다. 전서구도 물론이고 말이지요.”
“하면, 성막이 사라지자마자 다시 발동하는 건 불가능합니까?”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시장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설치 비용이 너무 비싸거든요.”
“…….”
순간 시장도, 라키엘도 숙연해졌다.
“한 번 발동을 하려면 5년 치 도시 예산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게다가 건설 기간 또한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걸 굳이 설치했던 이유는…… 이쯤이면 충분히 짐작하시리라 봅니다만.”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우리 마젠타노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 무기였던 것이로군요. 맞습니까?”
“예. 그 마젠타노의 황태자와 성막 안에서 함께 농성을 벌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요. 심지어 저 작자와도 함께…… 말입니다.”
시장의 눈길이 힐끗 이쪽의 뒤편을 향했다. 변경백이 서 있는 방향이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시장과 변경백은 서로 껄끄러운 사이겠구나 싶었다. 국경을 마주한 채로 사소한 분쟁을 항상 겪는 입장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적어도 앞으로 30일 동안은 아니어야 한다.
시장의 이야기를 다 들은 라키엘은 상황을 정리했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 신세는 독 안에 든 쥐라는 뜻이로군요. 그것도 30일 뒤면 와장창 깨지는 것이 확정적인 독 안에 갇힌 신세. 맞습니까?”
“예. 심지어 저 밖에는 어떻게 맞서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맹수가 으르렁대는 중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황태자께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안이라. 무엇입니까.”
“황태자께서 지니신 무구를 저에게 주십시오.”
“…….”
“농담이 아닙니다.”
그건 충분히 알겠다.
시장의 눈빛은 농담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협박이나 위협을 가하는 사람의 것도 아니고.
“이유가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아까 보았으니까 말입니다. 저 본드래곤을 닮은 괴수가 황태자께서 지닌 무구에 엄청난 집착을 보이는 모습을 말이지요.”
“설마.”
“또 짐작하신 겁니까?”
“30일 후에 성막이 걷힐 때, 무구를 시장께 넘기고 우리 일행은 도망치라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제겐 최선의 선택입니다.”
“어째서요?”
“황태자께서 무구를 넘기고 도망을 쳐야 더 적은 사람이 죽습니다.”
“제가 이 도시에서 당신들과 함께 죽는 사태가 발생하면, 우리 마젠타노와 귀국 사이에 전면전이 일어날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매우 높은 확률로, 그렇게 봅니다.”
“…….”
“그러니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길. 이 도시를 도와준 은인께 간곡히 부탁을 드리는 바입니다.”
“…….”
라키엘은 시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장의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한편으로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시장의 의견은 지극히 타당하며 이성적이었다. 당장 이 도시의 사람들이야 다 죽어나가겠지만, 방사능 본드래곤이 설치는 가운데 두 국가의 전면전까지 터지는 최악의 막장 사태만은 막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방금 들은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라키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수락할 필요가 없으니까.
더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예?”
눈을 휘둥그레 뜨는 시장.
그를 향해 라키엘은 뻔뻔한 역제안을 야물딱지게 건넸다.
“대신 이쪽에서 제안하지요. 이 도시를 저한테 넘기십시오.”
“……예에?”
“그러면 모두가 살 수 있습니다.”
“…….”
“진짠데.”
사실이다.
확신한 라키엘은 혓바닥 8기통 엔진 가득 권모술수의 풀악셀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