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가까이서 보면…… 어? (3)
“이 도시를 저한테 넘기십시오.”
“……예에?”
“그러면 모두가 살 수 있습니다.”
“…….”
안 죽일 거니까?
그래서 살 수 있다는 건가?
테니온 시의 시장, 브레다 테니바흐는 쑴펑쑴펑 샘솟는 물음표를 눈동자에 걸고서 라키엘을 쳐다보았다. 대뜸, 앞뒤도 없이 도시를 내놓으라니. 이건 도시가 무슨 아침 밥상에 올라오는 스콘 조각도 아니고.
하지만 뜻밖에도 라키엘의 표정은 진지했다.
“진짠데.”
사실이다.
명확한 팩트다.
라키엘은 확신하며 혓바닥을 야물딱지게 놀리기 시작하였다.
“아주 완전히 넘기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기간제로 도시의 지휘권을 제게 넘기라는 뜻이지요.”
“일시적? 기간제……라니요?”
“딱 30일. 1개월 동안입니다.”
“……설마.”
시장은 불현듯 떠오른 추측을 되물었다.
“오늘부터 성막이 걷히는 날까지인 겁니까?”
“정확하십니다.”
라키엘이 싱긋 웃었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제게 좋은 계획이 있습니다. 굳이 제 무구를 넘기거나, 이 도시의 사람들이 몰살을 각오하는 커다란 희생을 하지 않아도 저 방사능 본드래곤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지요. 그걸 위해서입니다. 30일 동안 이 도시의 인력을 포함한 모든 가용자원이 제 뜻대로 준비에 임하여 주길 바라는 건 말입니다.”
“대체 어떤 계획이기에 그토록 자신하는 건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아무렴요. 잠깐, 귀 좀.”
시장에게 샤샥 다가갔다.
“그러니까 제가 생각하는 계획은…… 속닥속닥…… 이러저러…… 요러쿵저러쿵…… 블라블라…… 하는 계획인 겁니다.”
“……!”
라키엘의 귓속말을 들은 시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질겁한 표정으로 상체를 뒤로 물리며 이쪽을 향해 되물었다.
“저기, 실례지만 말입니다. 황태자께서는 제정신이십니까?”
“애석하게도 제정신입니다.”
“하지만…… 놈의 도시 진입을 일부러 유도한 뒤에 멀쩡한 광산으로 유인해서 매몰을 시키겠다니요?”
“……어, 그건, 일부러 귓속말로 시장님께만 우선 알려드린 건데.”
“예?”
“혹시나 누군가가 여기서 흘러나가는 말소리를 듣고서 도시에 소문을 퍼뜨리면, 계획을 준비하기도 전에 시민들의 불안감이나 공포심이 고조되지 않겠어요?”
“…….”
“그래서 다들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갖춰 가는 걸 보면서 계획을 공표하는 게 좋을 것 같기에 속닥속닥 알려드린 건데. 행여나 말이 새어나갈까 봐서 말입니다?”
“…….”
“시장님 집무실 방음, 괜찮은 편 맞죠?”
“……어, 크흠! 흠! 아마도 괜찮을 겁니다.”
“정말요?”
“우리 도시의 시민들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습니다. 국경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대개 그렇지요. 언제 전쟁의 화마가 덮쳐올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도 터전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니까 말입니다. 안 그렇소?”
시장의 마지막 물음은 이쪽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길은 이쪽의 뒤에 서 있던 변경백을 향해 있었다.
뒤편의 변경백이 피식 소리 없는 웃음을 머금는 기척이 느껴졌다. 국경지대 책임자의 동병상련(?)이나 공감대, 뭐 그런 건가.
‘하긴. 소설 마검황에서 잠깐 언급이 나왔지. 우리 쪽 변경백과 저쪽 국경 시장인 테니바흐. 둘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앙숙이자 라이벌로 지냈다고.’
지리적 특성이나 입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역설적으로 서로의 고충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사이인 거겠지.
라키엘은 잠깐 떠오른 잡념을 털어내고는 말했다.
“뭐, 알겠습니다. 그럼 계획의 조기 유출에 따를 혼란이나 불안감은 없을 걸로 믿고 자세히 말씀을 드리지요.”
“경청하겠습니다.”
시장이 앉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라키엘이 말했다.
“예. 계획을 설명하기에 앞서, 저 방사능 본드래곤은 기본적으로 격멸이 불가능한 상대입니다.”
“격멸이…… 불가능하다니요?”
“사실이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교전을 치러서는 방법이 없거든요. 아까 시장께서도 기병대를 손수 지휘하며 느꼈을 겁니다. 놈의 엄청난 열기를 말입니다.”
“……예, 느꼈습니다.”
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십 발짝 떨어진 곳에서도 은은하게 느껴질 정도의 열기였습니다. 마치 태양이 지상에 내려오면 그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지요. 덕분에 전투마가 모조리…….”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부끄럽게도 낙마를 하였다.
기병대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장이 당시의 굴욕적이었던 순간을 애써 기억 속으로 접어두며 물었다.
“그럼, 정상적인 교전을 치를 수 없으니 이 도시의 광산을 이용하겠다는 겁니까?”
“예. 그래야 놈을 제대로 폐기할 수 있을 테니까요.”
“폐기라고요?”
“네.”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알려드렸듯이, 놈에게는 뜨거운 열기 외에도 방사능이라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서는 모든 생물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무시무시한 힘이지요.”
“그것과 폐기가 상관이 있는 겁니까?”
“밀접한 상관이 있습니다.”
라키엘은 문득, 한국에서 살던 시절을 떠올렸다. 당시에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서 방사능 물질의 폐기에 대한 내용을 본 적이 있었다.
다행히 제법 상세한 내용까지 소개되던 다큐멘터리였다.
“놈의 방사능은 가슴에 박힌 코어에서 나오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 코어는 파괴가 불가능합니다. 아니, 파괴를 해도 방사능은 계속해서 나올 테지요. 더 최악의 경우에는 파편과 함께 사방팔방으로 번질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 도시는 통째로 죽음의 땅으로 변모할 겁니다. 최소 수십 년 동안은 사람을 포함한 그 어떤 생물조차 살아갈 수도, 발길을 들일 수도 없는 땅에 될 테지요.”
“…….”
“그래서 깊은 땅속에 통째로 매몰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광산은…….”
시장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라키엘은 충분히 이해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주석 광산은 이곳 테니온 시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자 수입원이지요. 그걸 모조리 포기해야 하는 선택이니, 주저하게 되는 마음도 이해가 됩니다.”
“혹시 다른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예. 지금으로선 애석하게도.”
“…….”
라키엘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광산 하나를 포기하면 도시의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는 따위의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이 도시의 사람이 아니니까. 게다가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시장이 어떤 선택을 할지가 대략 예상이 되었으니까.
라키엘의 그러한 예상은 정확했다.
“……알겠습니다. 수입원, 사업, 다 좋지만 시민이 몰살당하고 유령 도시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요.”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아니오.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다만 어쩔 수가 없기에 내린 결정일 뿐인 거지요.”
“…….”
“하니 괜찮습니다. 황태자께서는 설명을 해 주십시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놈을 유인하고, 어떻게 놈을 깊은 광산 바닥까지 끌어들여 매몰시킬 것인지를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그럼, 시장님? 우선 이 도시와 광산의 구조가 상세히 나온 지도를 볼 수 있을까요? 설명을 위해선 그게 필요할 듯한데.”
“물론입니다.”
시장이 행정관을 불렀다. 사실 지도의 내용은 보안 사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소한 보안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내 커다란 지도가 테이블을 점령하였다. 라키엘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방사능 본드래곤을 도시 내로 끌어들였을 때 피해를 최소화할 대책, 광산 출입구까지의 유인 경로, 갱도 내부의 확장 방안, 미끼 전용 탈출구 마련책과 차폐 갑옷의 제작 방법까지.
“참 쉽죠?”
“…….”
아뇨 전혀.
시장은 한편으로는 경악을, 다른 한편으로는 경이로움을 느끼며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황태자의 설명을 듣는 내내 머릿속을 점령한 생각은, ‘미친놈’이라는 단어였다. 그런데 웃기게도, 다른 한편으로는 감탄이 들었다.
이건 된다.
미친놈이나 떠올릴 법한 생각인데, 허무맹랑하기가 짝이 없는 계획인데, 과연 준비가 가능할까 싶은 규모의 작전이기는 한데.
‘준비만 제대로 갖추어지면…… 가능하겠어.’
덕분에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어째서 황태자가 30일 동안 이 도시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했던 것인지가 말이다.
“이래서였던 것이로군요. 이런 작전은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없으면 준비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까.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시간도, 인력도, 자원도, 조금의 낭비도 있어선 안 되지요.”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너무나 빡빡했다. 준비할 것은 산더미인데, 주어진 시간은 고작 30일이 전부였다.
“그러니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시행착오 또한 허용되지 않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해볼 생각이 있으신지?”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겠습니까.”
시장은 그만 너털웃음을 지어 버렸다. 그것으로 협상(?) 완료. 이 정신 나간 규모의 벼락치기 준비를 직접 치러야 한다는 막막함에 행정관 등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가운데, 시장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여전히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물으시지요.”
“이 작전 말입니다. 마지막 미끼 역할은 누가 맡는 것입니까?”
“…….”
“아까부터 설명을 듣던 내내 생각했던 부분입니다. 거대한 규모의 준비. 광산 하나를 통째로 희생하는 과감한 투자. 실패하면 도시 내의 모든 인원이 몰살. 최종적으로는 이 막대한 부담감을 단 한 사람이 짊어지는 것이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라키엘은 순순히 시인했다.
시장이 물었다.
“그래서, 누가 가장 중요한 미끼가 되는 것입니까?”
시장, 브레다 테니바흐는 진심으로 궁금하였다. 아무리 들어봐도 저 미끼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위험했다. 아니, 이건 위험하다는 말로 퉁칠 정도가 아니었다.
숨 막히는 열기.
치명적인 방사능.
가까이 접근하는 것만으로 이미 죽음을 각오해야 할 방사능 본드래곤이었다. 하물며 놈을 계속해서 유인하며 어두운 광산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한다니.
“너무 빠르게 도망치면 유인에 실패하겠지요. 그렇다고 조금이라도 여유를 부리는 순간 저 괴수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할 겁니다. 물론 광산 가장 깊은 곳까지 유인에 성공을 해도, 본드래곤을 뿌리치고 홀로 탈출할 일이 남을 듯한데…… 미끼가 될 사람이 과연 끝까지 살아남을 수는 있는 겁니까?”
“……그건 해봐야 알겠지요.”
정말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는 황태자. 그의 얼굴에 내걸린 초탈하고도 씁쓸한 미소.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각오한 듯한 눈빛. 마치, 책임감이 서린 것만 같은.
그걸 보는 순간, 시장은 작은 깨달음이 벼락처럼 내리치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서, 설마…….”
벌써 각오를 한 것일까, 황태자는.
가장 위험한 작전을 제시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 차마 남을 그런 사지로 밀어 넣지는 못하겠다는 인간적인 사명감 때문에, 당신은 이런 타국의 도시를 위하여, 끝끝내…….
“황태자, 당신이 직접…… 미끼가 되려는 것입니까?”
시장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 떨려 나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자가 이 세상에 있었다니. 더없는 감동이 그의 가슴을 적시……려던 순간이었다.
“예? 제가요? 미쳤어요?”
황태자가 뭔 소리냐는 듯이 빛의 속도로 정색했다.
“……하?”
“하는 무슨. 제가 왜 미끼가 됩니까? 시장님네 도시를 위해서 타국의 황태자인 제가? 어째서요? 왜 때문에?”
“…….”
“아니, 따지고 보면 이거, 시장님네 도시를 살리려고 이 난리 법석을 피우는 건데. 그럼 미끼는 시장님이 하시든가 듬직한 부하를 시키시든가. 그것도 싫으면 가위바위보든 사다리 타기를 해서든 뽑든가 하셔야지.”
“…….”
“이거 참 바라셔도 너무 큰 것까지 바라시네, 진짜.”
“…….”
졸지에 감동을 파괴(?)당하며 뻘쭘함의 수렁에 빠진 시장. 그리고 툴툴거리며 작전의 세부 설명을 이어가는 라키엘. 그렇게, 역병의 권속 악티누스를 격멸하기 위한 30일 동안의 작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