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416화 (415/468)

416화. 어그러진 작전 (1)

가장 짙은 그림자는 새벽에만 드리운다.

“…….”

무슨 개소리 같은 꿈을 꾼 걸까. 라키엘은 가만히 눈을 떴다. 그리고 어둠 속에 잠긴 침실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문득,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쩌다가 여기에 누워 있는 걸까. 여긴 어딜까. 나는 누굴까. 왜 여긴 일산의 내 집이 아닌 거지. 어쩌다가 여기까지 흘러온 걸까.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자신은 그저 평범한 한의사일 뿐이었는데. 험난했던 인생을 좀 펴보려다가 오히려 살짝 꼬여 버린, 그래서 스스로를 한탄하던 보통 사람일 뿐이었는데.

그런데 내가 소설 속 세상에서, 국경을 넘어서, 낯선 도시의 어느 침실에 누운 채로, 잠을 설치며 천장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성막이 걷히고 방사능을 뿌려대는 본드래곤과 대면해야 할지도 모를 새벽에.

“…….”

더 자야 한다.

조금이라도 푹 자두어야 새로운 하루를 맑은 정신으로 맞이할 수 있을 테지. 중요한 날이니까. 뭔가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거나 했을 때 재빠르게 판단을 내려야 할 테니까. 그러니까 더 자야 하는데.

“후우.”

아무래도 더 자긴 틀린 것 같다. 괜히 뒤척일수록 머릿속만 더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얇은 외투를 걸치고는 복도로 나왔다.

여전히 어둡다.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모르겠다. 그러면 가볼까.

슬리퍼를 끌며 걸었다. 어느새 뒤쪽에 인기척이 따라붙었다. 굳이 놀라지는 않았다. 데미안이니까.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깼냐.”

“네, 전하. 덕분에.”

“어쭈. 내 탓을 하네?”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데미안의 대수롭지 않은 듯한 대꾸가 돌아왔다.

“그리고 제 의무이기도 하니까요.”

“……그래. 고맙다.”

내 최고의 근접 호위. 그림자를 자처하는 녀석. 오늘도, 지금도 묵묵히 그 역할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고마웠다. 어쩌면 더 자고 싶을 텐데. 그런데 괜히 뒤척이다가 침실 밖으로 나와 버린 이쪽 때문에 덩달아 강제로 움직여야 하는 처지라니.

“미안하다고는 안 할게.”

“그런 말씀은 딱히 기대한 적 없습니다.”

“어쭈. 기대치가 없었다는 식으로 말하네?”

“그 또한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쯧. 한 마디를 안 져요.”

“전하께 배운 화법입니다.”

“그럼 수강료라도 내든가.”

“대신 24시간 전하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어 드리고 있습니다.”

“어? 딱히 든든한 적이 없었는데?”

“…….”

“왜 그런 표정이야? 혹시 서운해?”

“아뇨, 그냥…….”

“그냥?”

“말씀하시는데 잠깐 입 냄새가 나셔서 말입니다.”

“뭐?”

“자다가 깼는데 양치를 안 하고서 말씀을 하시니까 그런 겁니다.”

“뭐야. 나 진짜로 입 냄새 나?”

“네. 가급적 코로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이. 그럼 너는? 너도 방금 일어났잖아.”

“하지만 양치는 했습니다.”

“언제?”

“전하께서 열일곱 번째 옆으로 돌아누우며 뒤척이실 때쯤에요. 그때 옆방에서 소금으로 이 닦고 헹구고 다 했습니다.”

“어쭈. 거짓말이 살살 늘었다?”

“진짭니다. 하아아.”

“…….”

“어떻습니까, 제 상큼한 입김.”

“어. 순간 스트레이트 꽂을 뻔.”

“감사합니다.”

“감사는 개뿔.”

라키엘은 콧김을 풍 뿜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이쪽을 맞이하는 새벽의 바깥 풍경. 저물어가는 달빛과 별무리. 오묘한 색깔의 구름. 그 아래로 일렁이는 성벽 아래 평원의 광경까지.

물론 그 모든 광경에 희뿌연 색채가 드리워져 있었다. 당연했다. 지금 이 도시는 성막으로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으니까.

“이제 몇 시간 뒤면 저 성막도 사라지겠군요.”

“그렇겠지. 시장이 말했던 30일의 기한이 끝날 테니까.”

사실이었다.

정오가 되면 성막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저놈이 도시로 들어올 테고, 작전이 시작되겠지.

- 쓰하아아악!

“…….”

놈도 이쪽을 본 걸까.

성막 너머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본드래곤이 처음으로 울부짖었다. 희뿌연 성막 때문에 놈의 동작이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이쪽을 뚫어지도록 쳐다보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겠다.

눈빛이 느껴졌다.

그런데 두렵지가 않았다.

오히려 정말로 이상하게도…….

“안타깝네.”

무의식중에 혼잣말처럼 말했다. 솔직한 감상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참으로 이상한데. 말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자꾸만 저 본드래곤이 울부짖을 때마다 불쌍하다는 느낌이 불쑥 고개를 치켜들곤 했다.

왜일까.

때때로 저 포효가 울음소리처럼 들려서? 혹은 어미를 찾는 새끼 동물의 절박한 외침처럼 들려서?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겠지. 저놈은 국경지대의 수많은 양민과 수비대를 학살한 끔찍한 존재니까. 지금도 도시 전체를 몰살시키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놈이니까.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딱히 데미안이 캐묻지 않았음에도, 제 발이라도 저린 듯한 부연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끔찍하네. 저런 놈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간 것도, 고생을 하고 있는 것도 말이지. 그렇지 않아?”

“그렇긴 합니다만…… 모르겠습니다.”

“어?”

“그냥, 가끔씩 불쌍하다는 기이한 기분이 들어서 말입니다.”

“설마 저게?”

“예.”

“…….”

데미안은 나보단 솔직하구나.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솔직히 저걸 누가 만들어서 보낸 건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 눈빛과 제법 시선이 마주쳤는데도 그동안 살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랬어?”

“예. 제 착각이 아니라면요.”

“……뭐, 그래 봤자 어쩌겠냐.”

저도 모르게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저놈이 불쌍하게 느껴지건 아니건, 모두에게 실제적인 위협이 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제거해야 한다. 그것이 최선일 것이다. 모두를 위해서는 말이다.

“게다가 달밤에 감상을 말하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거 같다.”

“지나치게 감상적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당장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이다. 감상은 사치일 뿐이다. 이쪽의 일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향한 다짐을 머금었다. 남모를 황급함으로 몸을 돌렸다. 성벽에서 내려갔다. 계단으로 걸음을 딛기 전, 무의식중에 다시금 성벽 아래를 쳐다보았다.

- 쓰하아아아악!

이쪽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절절하게 우는 저 녀석. 저 모습이 과연…… 달밤 때문에 느껴지는 착각인 걸까.

모르겠다.

의문을 풀 방법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춥다. 들어가자.”

“네, 전하.”

애써 시선을 거두었다.

이제는, 결전의 하루를 맞이할 때다.

“우리는, 오늘을 위하여 많은 것들을 준비하였다.”

광장에 뙤약볕이 드리워졌다. 그 볕을 받으며 도열한 30인 기사들의 갑옷이 형형색색의 반사광을 머금었다.

보통의 갑옷과는 다른 빛깔. 라키엘의 조언에 따라 의장용 갑옷 외부에 덧바른 각종 방사선 차단재가 내뿜는 반사광이었다.

“그대들이 걸친 무거운 차폐갑옷도, 예상되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넓힌 이 대로와 차단벽도, 광산의 함정과 도주로도, 모두! 그대들의 피와 땀이 서린 노력이 있었기에 준비가 가능하였다.”

왕국 하르미온의 국경도시, 테니온.

시장 브레다 테니바흐의 일장 연설이 광장 구석구석을 힘 있게 채웠다. 특수 제작된 차폐갑옷을 걸친 30인의 기사 외에도, 엄선된 정예 기병대원과 병사들이 미동도 없이 시장의 연설을 들었다.

시장의 열띤 연설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 곧! 오르무스께서 내려주신 은총으로 세워낸 성막의 보호가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터전이자 삶의 무대인 이 도시는 전례 없는 위협과 마주할 것이다. 그때! 그대들의 가족과 이웃인 시민들이 과연 누구를 믿고 의지할 것인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의 투구 속 눈동자가 소리 없는 열띤 함성을 머금었다. 바로 우리라고. 오직 우리, 자신의 힘으로서만 이 위기와 재난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조상 대대로 지켜온 터전을 수호할 수 있으리라고.

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대들도, 나도 이미 알고 있다. 하여! 우리는 오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각오를 품고서 모든 작전에 임해야 할 것이다. 특히! 여기 있는 우리의 선임기사인 그레노 경이 그러한 결의를 가장 앞서서 수행할 것인바!”

터억!

시장이 힘 있는 손길로 선임기사의 차폐갑옷을 짚었다. 선임기사가 화답하듯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한 차례 쳤다.

터커엉, 울리는 소리와 함께 시장이 말했다.

“우리 모두는 사전에 숙지한 자신의 역할을 다시금 되새기며, 그레노 경의 미끼 역할이 원활히 수행될 수 있도록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최선을 다하여 움직이고, 싸워야 할 것이다! 알겠는가?”

“오르무스!”

마침내 모든 병력이 신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저마다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광장을 빠져나갔고, 자신의 위치로 흩어졌다.

시장 브레다가 그레노 경을 돌아보았다.

“자네, 괜찮겠는가?”

“물론입니다, 주군.”

그레노 경이 투구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난 며칠의 일을 떠올렸다. 사실 며칠 내내 주군과 전례 없는 말다툼을 벌였던 그레노 경이었다. 다툼의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 작전에서 시장이 직접 미끼가 되겠다고 했다. 자신은 한사코 말렸다. 말도 안 된다고. 절대로 안 된다고.

주군의 고집은 대단했다. 물론 자신도 수긍하지 않았다. 아무리 시장이 도시의 모두를 책임지는 자리라고는 하지만, 가장 위험한 작전의 미끼 역할마저 직접 수행한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여 처음으로 주군에게 대들었다. 처벌까지 각오하고서 얼굴이 붉어지도록 고함, 아니, 호통을 치기까지 했다. 덕분에 간신히 주군의 고집을 꺾을 수 있었다.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이게 어떻게 따낸 미끼 역할인지, 주군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잘 알지.”

“예. 그러니 그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꼭 무사히 돌아올 생각입니다.”

“그런 말은 말게. 더 걱정이 되잖는가.”

“진정으로 제가 걱정이 되신다면, 제가 가장 위험해진다고 생각이 되는 순간에 이 말씀을 혼잣말로 해주시지요.”

“어떤 말을 말인가?”

“……해치웠나? 입니다.”

“좋군. 듣는 것만으로도 죽은 사람마저 살아올 것 같은 말이야.”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러게.”

그레노 경이 차폐갑옷의 투구를 고쳐 썼다. 그리고 광장을 가로질러 성문 방향으로 나아갔다. 작전에 대비하여 대로를 넓히고, 그 가장자리를 따라 시멘트 벽을 세워둔 장소였다.

그곳에서 걸음을 멈춘 그레노 경이 심호흡을 하였다.

그 직후.

태양이 하늘의 꼭대기에 다다랐다. 동시에 30일 동안 도시를 감싸주었던 성막에 변화가 생겨났다.

츠스스스……!

희뿌연 색이 옅어졌다.

마치 안개가 걷히듯.

느린 듯하지만 순식간에.

성막이 사라지고,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두꺼운 성문이 시커멓게 숯이 되며 타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성문 바깥에서 달려오는 무시무시한 포효와 함께였다.

- 쓰하아아아악!

콰드득!

불길에 휩싸인 성문이 양쪽으로 쪼개졌다. 그 틈새로 방사능을 내뿜는 본드래곤, 악티누스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레노 경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 그레노 경이 지니고 있던 큼직한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라키엘이 건넨 두 무구, 만년설과 만년필이 담긴 주머니였다.

- 쓰아아악!

과연 주머니 속 무구의 존재감을 느낀 악티누스가 거칠게 울부짖었다. 예상대로였다. 그레노 경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저 괴물이 무구에 반응을 하였으니, 이제 자신은 작전대로 미끼가 되어 광산으로 달려가면 될 것이다.

타닷!

몸을 돌린 그레노 경이 재빠르게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쳐다보며 악티누스가 생각하였다.

지금, 어른 드래곤의 향기가 나는 물건을 지니고서 도망치는 저 인간, 한 달 전에 나와 술래잡기를 했던 그 인간이 아닌 것 같다고.

나는…… 그 인간이 훨씬 마음에 들었는데……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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