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화. 어그러진 작전 (2)
나는…… 그 인간이 훨씬 마음에 들었는데…….
- 쓰하아악……!
악티누스는 낮게 포효했다. 그리고 멀리서 도망치고 있는 인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선에 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다.
다르다.
지금 저 멀리 도망치고 있는 인간은 한 달 전에 나와 놀았던 그 인간이 아니다. 달리는 자세가 다르다. 뒷모습의 체형이 다르다. 갑옷의 모양도 다르다.
그러니까, 아니다.
그 사실이, 실망스럽다.
- 쓰아학……!
쿠웅! 쿠쿵!
하지만 그러한 마음의 실망감과는 달리, 악티누스의 네 발은 착실하게 땅을 박차고 있었다. 대로를 따라 내달렸다. 도망치고 있는 인간. 그에게서 느껴지는 드래곤의 향기. 진동. 공명의 이끌림을 따라서 돌진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투콱! 콰콱!
……!
대로 양쪽에서부터 1미터가량 크기의 바윗덩이가 연달아 날아왔다. 도망치고 있는 인간과 이쪽 앞에 우수수 떨어지며 굴렀다. 순식간에 십수 덩이의 장애물이 생겨난 셈이었다.
그러나 악티누스는 개의치 않았다.
- 쓰카아학!
쿠쿵! 쾅!
달리는 기세 그대로 돌진했다. 걸음을 방해하는 바윗덩이는 거침없이 치우거나 차 버렸다. 도망치고 있는 인간. 그에게서 느껴지는 드래곤의 향기. 진동. 공명의 이끌림을 따라서. 멈춤 없이. 서슴없이. 계속…….
……내달려야 할까?
- 쓰하악……!
악티누스의 마음속에 작은 의문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거침없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느려지는 걸음의 속도만큼 마음속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갔다.
- ……스하악.
사실은 그때 그 인간이 궁금하다.
악티누스는 문득, 지난 30일 동안의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외로웠다. 고독했다. 답답하고, 초조했다. 삽시간에 앞을 가로막던 희뿌연 장막.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바로 근처에서 드래곤의 체취와 공명이 느껴지는데. 그런데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하염없이 울었던 것 같다. 포효하고 뒹굴며 서성였다. 그럼에도 장막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더욱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놓쳤던 그 인간. 드래곤의 체취가 느껴지는 무구를 지녔던 인간. 그를 다시 만나면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다고.
- ……사흐악.
그래. 그 인간이다.
무구?
물건?
중요하지만, 생각해 보면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는 것 같다. 바로 그 물건을 소유한 존재다. 존재는 물건과 달리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까. 물어보고, 대답을 들을 수 있으니까. 요청을 할 수 있으니까. 어리광을 받아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물어보고 싶었다. 30일 전에 눈앞에서 놓쳤던 그 인간을 다시금 만난다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혹시 당신은 드래곤의 체취가 느껴지는 물건들을 어디서 구한 것이냐고. 다른 드래곤을 만나게 해줄 수 있느냐고. 그도 아니라면 혹여…… 당신이 나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수는 없겠느냐고.
- 쓰하아악!
그런데 지금 도망치고 있는 저 인간은 아니다. 30일 전의 그 사람이 아니다. 비록 드래곤의 체취가 느껴지는 물건을 지니고는 있다지만, 그 기운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 같지가 않다. 그저 지니고만 있을 뿐.
그렇다는 뜻은…… 미끼. 함정. 속임수. 계략. 삿된 유혹. 갈망을 악용하는. 흉계.
- ……!
콰드득!
마침내 악티누스가 완전히 우뚝 멈추어 섰다. 이제 더 이상 그레노 경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예 시선도 주지 않았다. 대신 악티누스는 기괴한 형상의 두개골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사방으로 바쁘게 시선을 던져댔다.
- 쓰하아악! 쓰학!
찾아야 한다. 30일 전의 그 인간을 찾아야 한다. 그 인간, 분명히 근처에 있을 것이다. 30일 전에 도시가 장막에 감싸인 이후로 아무도 도시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 인간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 싸하아아악!
사방을 둘러보는 악티누스의 몸짓이 한결 절실해졌다. 덕분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두는 당황하고 말았다.
“뭐…… 무슨?”
단연코 제일 많이 당황한 이는 미끼가 되기를 자처했던 그레노 경이었다. 이건 예상과 다른 전개였다. 작전에 따르자면, 저 괴물은 무조건 자신이 품은 무구를 쫓아올 것이라 하였더랬다.
한데 현실은 달랐다.
“어이?”
그레노 경은 도주를 멈추었다. 그럼에도 악티누스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봐!”
그레노 경이 소리를 쳤다. 악티누스를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두 팔을 세차게 휘저었다. 무구를 들고서 보란 듯이 흔들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악티누스는 반응이 없었다. 아니, 아예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웅! 콰드득!
급기야 악티누스가 대로를 벗어났다. 그레노 경이 유인하기로 예정되었던 경로를 벗어나, 대로 양쪽에 세워둔 장벽을 몸으로 허물어 버렸다. 그리고 장벽 너머의 시가지로 진입하고 말았다.
“……이, 이런? 안 돼!”
그레노 경이 허겁지겁 악티누스를 따라 달려갔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 쓰하아악! 카하악!
악티누스가 움직일 때마다 치명적인 방사선이 흩뿌려졌다. 핵분열로 생성된 엄청난 고열과 함께였다. 그 고열이 문제였다. 놈이 대로를 따라 만든 장벽 안쪽에 있을 때는 시가지의 건물들이 열기로부터 어느 정도 격리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타드득! 타닥!
시가지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건물들은 불행히도 목조 건물이었다. 기둥이며 지붕의 패널이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시커멓게 그을렸다. 급기야 불이 붙고 말았다. 한번 붙은 불길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번져갔다.
“부, 불이야!”
그레노 경이 외쳤다.
대로와 거리를 두고서 작전을 지켜보던 예비대 병사들이 혼비백산하며 움직였다. 이러한 돌발사태를 대비하여 마련한 소화용 물이 바쁘게 날라졌다. 뿌려졌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예비대 병사들이 물을 뿌리며 화재를 진압하는 속도보다, 악티누스가 태연하게 이동하며 퍼뜨리는 열기 때문에 생겨나는 화재의 규모가 더욱 컸다.
“이런…… 망할 괴물이여!”
그레노 경이 다급한 마음으로 악티누스를 따라 달려갔다. 바닥의 돌을 들었다. 악티누스를 향해 힘껏 던졌다.
따악!
- …….
악티누스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악티누스는 여전히 그에게는 관심도 주지 않고서 다시 움직였다. 30일 전에 놓쳤던 그 인간을 찾아서. 애타는 간절함을 담아서. 하염없는 눈길을 사방으로 던져대며.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를 발견한 듯이 우뚝, 고개를 멈추었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감시탑이 있는 방향이었다.
한데 그곳에는…….
“……!”
사태를 깨달은 그레노 경이 다급한 심정으로 외쳤다.
♣
“……우와이, 씨!”
악티누스와 눈길이 마주쳐 버린 순간, 라키엘은 감시탑 난간 아래로 확 주저앉았다. 심장이 철렁한 심정을 담고서 쿵쿵 뛰었다.
‘미친. 방금 눈이 마주쳤어.’
차폐갑옷 투구를 쓰고 있었지만 직감할 수 있었다. 귓구멍 속에서 둥둥둥 맥박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잖아도 작전이 초반부터 빠그라지는 쌔한 느낌을 받던 차였는데. 갑작스럽게 그레노 경의 유인작전을 쌩까면서(?) 시가지로 진입한 본드래곤 때문에 기겁하던 참이었는데.
그래서 시장과 함께 심각한 눈길로 상황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한편으로는 급변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하여 시장과 함께 갖가지 명령을 내리고 있던 참이기도 했다.
한데 그 순간, 본드래곤이 멀찍이서 여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확실하다. 느낄 수 있었다. 눈길이 맞닿는 순간 놈의 텅 빈 안구에 떠오르던 까닭 모를 환희의 감정을.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
아니.
그보다는 마치…….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 같았어.’
어째서?
왜?
알 수가 없었다.
대신 확실하고도 선명한 쌔한 감각이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추며 3번 경추의 위기의식 버튼을 촵촵 난타해 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본드래곤의 어쩐지 반가워하는 듯한 포효성과 함께였다.
- 쓰하아아악!
‘와나, 미친.’
놈의 포효성을 귓구멍으로 접수하는 순간, 너무나 불길하고도 그럴듯한 가설이 좌르륵 세워졌다.
‘설마 나, 저놈한테 간택(?)당한 거야?’
그렇게 가정하니 지금 사태가 설명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레노 경의 유인에 잘 말려드는 것 같던 놈이 갑자기 우뚝 멈추어 버린 것도. 그레노 경에 대한 흥미를 급격하게 잃어버린 것도. 마치 무언가를 애타게 찾듯이 대로를 벗어나 시가지로 진입해 버린 것도. 모두.
‘어째서? 도대체 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늘의 작전을 위해 귀한 만년설과 만년필을 그레노 경에게 맡기기까지 했던 터였다. 자칫 그레노 경이 광산 막장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무구들도 함께 매몰될 것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기꺼이 무구를 내놓은 자신이었다.
그래야 작전이 성공할 테니까.
무구가 아까워도.
설령 잃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름의 큰 손실마저 각오하며 진행한 작전이었는데…….
‘그레노 경이 대놓고 근처에서 무구를 흔들어도 반응하지 않았던 놈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저렇게 반가워하면서 방방 뛰어?’
그렇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답은 하나다.
간택됐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은데, 더 솔직하게는 아예 부정하고 싶은데, 나는 놈에게 간택됐다. 확실하다. 그러니까 무구마저 무시하면서 놈이 이쪽을 향해 쿠당탕 달려오고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꿀꺽.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 터.
머릿속 계산이 팽팽 돌아갔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 앞으로 예상되는 파국. 그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들. 각각의 결말. 손해와 이득의 가능성. 저울질. 신중하게. 대담하게. 뒤섞고. 계산하고. 가늠하며. 마침내 결론을 얻어냈다.
그 순간, 라키엘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시장 브레다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터억!
“엇?”
그렇잖아도 돌연 감시탑을 향해 달려오는 괴수의 모습에 다급한 명령을 내리려던 시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명령을 입 밖으로 꺼내보기도 전에, 얼결에 감시탑 안쪽 복도로 이끌려 오게 되었다.
“시장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잘 들으십시오.”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황태자여.”
긴장감을 느낀 시장이 주먹을 꽉 쥐었다.
공들여 준비한 작전이 어그러진 상황이었다. 도시에 들어온 괴수가 예상과 다르게 날뛰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한데 이 상황에서, 황태자가 비장한 표정으로 긴히 할 말이 있단다.
절로 가슴이 뛰었다.
‘설마…… 황태자 당신은…….’
이 모든 위기 앞에 의연하게 나서려는 것인가. 자신이 제안했던 작전이 어그러진 모든 책임을 지고서. 타국의 도시를 위해 기꺼이 한 몸 바쳐 희생을 하겠다는 영웅적인…….
“차폐갑옷. 바꿔 입읍시다, 당장!”
“……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