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418화 (417/468)

418화. 희생이라는 이름의 오해 (1)

“차폐갑옷. 바꿔 입읍시다, 당장!”

“……뎃?”

시장 브레다는 흠칫했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귓구멍으로 접수한 멘트가 과연 실화일까. 거대한 의문과 의구심의 세계가 그의 의식을 혼돈의 쌀뜨물로 빠뜨리려던 순간.

“농담 아닙니다. 빨리.”

“…….”

황태자의 후속 멘트가 추가타를 꽂아왔다. 비로소 시장은 깨달았다. 황태자 이 인간, 정말로 농담을 하는 게 아니구나, 라고.

‘당연하지! 지금 상황에 농담이 나오게 생겼어?’

라키엘은 아예 대놓고 투구를 벗었다. 방금 시장에게 건넨 요구는 정말로 진심 순도 100%의 멘트였다. 당연했다. 자신은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생각이 전혀, 1그램도 없었으니까.

‘내가 여기서 미끼가 되어 주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사실 따져보면 그랬다.

이곳 테니온은 타국인 하르미온의 도시다. 그런 타국의 도시를 위해서, 일국의 황태자인 자신이 일부러 나서기까지 하면서 미끼가 되는 위험을 감수해 줄 필요가 있을까.

아니.

전혀.

‘심지어 이번 작전, 100%의 안전이 보장된 것도 아니야.’

저 어마어마한 방사능 괴물의 어그로를 끌고, 지하 깊숙한 막장까지 유인하고, 폭발을 일으키고, 그 틈에 구석탱이의 탈출구로 빠져나와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무사해지려면 얼마의 확률이 필요할까. 50퍼센트? 30퍼센트? 모르겠다. 확실한 건, 자신이 그걸 전부 다 해낼 자신은 그닥 없다는 사실이었다.

‘말 그대로 자살 임무야. 그런데 내가 그걸? 왜?’

아무리 저 괴수에게 간택(?)을 당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물론 이게 살짝 비겁한 태도라는 건 스스로도 잘 알았다. 세상에는 이런 일을 의연히 받아들이는 훌륭한 이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소방관.

산악, 해상 구조대.

타인의 위험을 느끼자마자 기꺼이 몸을 던지는 보통의 많은 사람들. 당연히 존경받을 만한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 더 많아질수록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것이다.

물론 자신도 그런 분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막상 닥치니까, 직접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서우니까.

“어서 투구. 주십시오. 아무래도 저놈, 저를 찾고 있는 듯하니까 말입니다.”

“…….”

이쪽의 단호하고 뻔뻔한 말투 때문이었을까. 얼결에 투구를 벗어 드러난 시장의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거부감은 딱히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시장 브레다는 황태자의 요구가 나름 합당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 사실은 이게 맞지.’

작전을 제안한 이는 황태자였지만, 그걸 받아들인 이는 자신이었다. 실제로 작전 준비를 총괄한 이도 자신이었다. 그러니 작전이 어그러진 책임을 누군가가 져야 한다면? 그건 자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이곳의 시장이니까.’

타국의 황태자에게 미끼 역할을 맡기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러다가 황태자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이번 사태를 넘긴다 하더라도 이 도시는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분노한 마젠타노의 황제가 전 병력을 이끌고서 하르미온에게 선전포고를 할 테니까. 그 분노의 파도를 이곳 테니온이 가장 먼저 맞이하게 될 테니까.

시장은 황태자에게 자신의 투구를 건넸다.

“알겠습니다. 이걸 쓰시지요.”

황태자와 투구를 교환했다.

그러나 갑옷까지 갈아입을 시간은 없었다.

“놈이 감시탑 근처까지 왔습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연락병의 외침.

라키엘이 재빨리 외쳤다.

“시장님! 이거!”

부우욱!

벽에 걸려 있던 태피스트리를 떼어내서 부욱 찢었다. 시장이 어떻게 반응할 틈도 없이 갑옷을 덮어 주었다.

“이거면 갑옷 모습을 가릴 수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저놈, 걸친 갑옷의 모양으로 사람을 판별하는 것 같으니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황태자여.”

“예.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죽지 마십쇼.”

“그럴 생각입니다.”

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때부터였다. 시장은 자신이 가파른 층계를 어떻게 뛰어 내려갔는지, 전혀 의식하지를 못했다.

다급했으니까. 굳은 각오를 머금기에도 바빴으니까. 그렇게 허겁지겁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감시탑 계단을 다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희뿌옇고 기괴한 형상이 보였다.

- 쓰하아아악!

“…….”

불과 100미터도 남지 않은 곳에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괴수의 모습. 소름이 돋았다. 압도적인 위압감이었다. 실제로도 일순간 저도 모르게 다리가 거의 풀릴 뻔하였다. 하지만 그는 다시금 의지를 되새겼다.

‘정신 차리거라. 이 어깨에 시민들의 목숨이 걸려 있음이니!’

부디 가문의 위대한 선조들이여.

제게 힘을 주소서.

시장 브레다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손을 뻗었다. 연락병들의 휴대를 위한 깃발통이 그곳에 있었다. 깃발을 뽑아들었다. 힘껏 휘둘렀다. 저 괴수가 자신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자신이 미끼가 될 수 있도록.

‘여기를! 제발!’

알아보기를.

날 죽이러 달려오기를.

시장은 바라고 또 바라며 깃발을 흔들었다. 생각 같아선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칫 섣부르게 목소리를 내었다가,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 싶은 까닭이었다.

‘제발!’

그렇게 얼마나 깃발을 흔들었을까.

몇 초도 되지 않는 잠깐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지려던 무렵, 마침내 본드래곤이 이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였다.

- 쓰하악?

“…….”

됐나?

내가 쓴 황태자의 투구를 알아본 걸까.

- 싸하아아악!

콰앙!

본드래곤이 세찬 외침과 함께 땅을 박찼다!

‘……됐다!’

시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즉시 몸을 돌렸다.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감시탑과 재빨리 멀어지고, 인근의 골목길로 뛰어갔다. 대로를 따라 뛰어서는 금방 따라잡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근처의 주민들을 피난소로 대피시킬 잘하였구나!’

본드래곤이 따라오며 집을 부숴도 인명 피해는 없을 것이다. 물론 집을 잃는 안타까운 이들이 속출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의 작전을 성공시켜야 한다. 도시가 살아야 한다. 집은 그 뒤에 다시 지으면 된다.

‘그러니까 제발!’

순순히 따라오너라, 이 악마 들린 괴수여.

시장은 바라고 또 바라며 골목을 따라 뛰었다. 다행히 그는 평소부터 도시민의 실제 생활에 관심이 많았고, 습관처럼 도시의 곳곳을 시찰하곤 했다. 덕분에 어지간한 골목과 뒷길에 대부분 익숙했다. 자신이 붙잡히지는 않으면서, 교묘하게 상대를 원래 계획했던 도주로로 이끌 수 있을 정도로. 딱 그만큼 능숙하게.

물론 그것도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 쓰하아아아악!

콰지직! 콰득! 쿠콱!

괴수의 포효가 삽시간에 가까워지곤 했다. 그때마다 바로 뒤에서 담벼락이 박살 나고, 서까래와 지붕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시각각 쏟아지는 돌더미와 흩날리는 나뭇조각. 귀가 멀 것만 같은 포효성. 갑작스러운 사태에 혼비백산하는 쥐떼. 자신의 모습도 저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 시장은 차폐갑옷 안쪽으로 삽시간에 차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계속 달렸다.

“헉! 허억! 훅!”

아슬아슬하다. 거의 바로 뒤까지 쫓아왔다. 하지만 더 달릴 수 있다. 도망칠 수 있다. 작은 희망이 시장의 달음박질을 이끌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달리면 원래 계획했던 도주로인 광장 대로까지 놈을 유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만 가면!’

미리 대로를 조준한 투석기와 각종 발리스타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놈을 한결 안전하게 유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발.

조금만 더.

조금만.

시장이 염원하며 골목 모퉁이를 내달려 돌아나가려던 순간이었다.

- 쓰카하아악!

“……!”

바로 뒤에서 섬뜩한 포효성이 귓가를 때려 왔다. 열 걸음? 다섯 걸음? 알 수 없었다. 다만 가까웠다. 어찌 반응할 틈도 없을 만큼.

콰아앙-!

“……거흑!”

놈이 지면을 내리친 걸까. 혹은 이쪽을 내리치려다 빗나간 걸까. 바로 옆쪽 지면에 놈의 앞발이 내리꽂혔다. 그 충격에 휩쓸린 시장이 옆으로 날려갔다. 담벼락에 충돌했다. 숨이 턱 막혔다.

그때였다.

“주군!”

뜻밖의 구원의 외침이 귓가를 들려왔다. 그레노 경의 목소리였다. 원래 미끼 역할을 맡았던 그가 어느새 본드래곤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말리고 싶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카캉!

그레노 경의 검격이 본드래곤의 손목을 때렸다. 그리고 일격에 부러지고 말았다.

- 쓰하악!

본드래곤이 귀찮다는 듯이 앞발을 옆으로 털어냈다. 괴수의 손짓에 얻어맞은 그레노 경이 10미터가 넘도록 훌쩍 날려갔다. 그리고 이름 모를 길가의 어느 지붕에 처박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레노 경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기절한 걸까. 설마 죽은 걸까. 알 수 없었다.

“……씨힉! 후욱! 씨힉!”

시장은 자신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세찬 피리소리를 들으며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더 달려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이대로 잡히면 모든 게 끝이다. 오늘의 작전도. 도시의 운명도. 모두. 내 어깨에 달렸다. 그러니까 도망, 쳐야 하는데.

……화륵!

시장의 온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아니, 정확히는 갑옷 위에 둘둘 감아두었던 태피스트리에 불이 붙었다. 본드래곤이 내뿜는 열기와 너무 가까워진 까닭일까. 혹은 주위의 화재 현장에서 날아온 불티가 붙어 버린 걸까.

다만 확실한 것은, 불길에 휩싸인 태피스트리가 너무나 삽시간에 갑옷 아래로 흘러내려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애써 가리고 있던 차폐갑옷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릴 만큼.

“헛?”

예상 밖의 사태에 시장이 기겁했다. 다시 태피스트리를 주워서 갑옷에 걸치려 허둥지둥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음을 그는 깨달아야 했다. 바로 앞쪽에서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는 본드래곤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 쓰하악……?

놈이 이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죽이려는 걸까. 그건 아닌 듯했다. 저건 살기를 드러내고 있다기보다는…….

‘내가 가짜인 걸 알아봤다. 실망하고 있어.’

그리고, 화가 난 것 같다.

- 쓰카하하아악!

“……!”

폭풍처럼 몰려온 음파!

시장의 전신이 허공에 부웅 떴다. 폭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속절없이 날려갔다. 담벼락에 충돌했다. 무너지는 담벼락. 어깨와 등으로 쏟아지는 돌더미. 다시금 숨이 턱 막혔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다리마저 완전히 풀렸다. 그런 이쪽을 향해 괴수가 천천히 다가왔다.

쿵, 쿠웅!

- 쓰하악! 카학!

분노한 걸까. 자신을 속였다고 여긴 걸까. 그래서 밟아 죽이려는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 뒤에 다시 황태자를 찾으려 온 도시를 헤집고 다니겠지, 놈은. 그 서슬에 휘말린 도시는 온통 불타고, 사람들은 몰살을 면치 못할 테지.

나 때문이다.

전부 내가 못난 까닭이다.

‘위대한 선조들이여, 제발…….’

일어날 힘을 주십시오.

시장은 간절히 되뇌며 일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그저 다가오는 괴수의 걸음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것이 다였다. 놈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절망감이 전신을 뒤덮어 왔다.

‘끝인가…….’

탄식이 나왔다.

한데 그때였다.

뒤쪽에서부터, 뜻밖의 그림자가 이쪽으로 드리워져 왔다. 어쩐지 자조적으로 들리는 한탄의 말소리와 함께였다.

“어오 샹. 이래서 갑옷까지 잽싸게 다 갈아입든가, 아니면 갑옷 디자인을 처음부터 통일했어야 했던 건데!”

본인의 사주팔자(?)가 맞이한 오늘의 운세를 한껏 원망하는 투덜거림.

라키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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