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428화 (427/468)

428화. 마성의 황태자 (5)

“헐. 미친.”

세상에는 미친 거 아닌가 싶은 일이 생각보다 많다.

예를 들자면 로또 5등에 당첨됐는데, 틀린 번호 셋이 당첨번호랑 달랑 1씩 차이가 난다든가. 소개팅을 나갔는데 그날 바로 애프터가 들어온다든가. 혹은, 직장인들의 세상에는 평생 방학이 없다든가, 뭐 그런 거 등등.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거 실화인가 싶은 기분.

눈앞에서, 온몸으로, 있는 대로 애교를 부리는 본드래곤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이래도…… 되나?’

처음 든 의문은 이거 맞나, 라는 것이었다.

그토록 무시무시했던 본드래곤이 대놓고 애교를 부리고 있다니. 심지어 애교의 대상이 이쪽이라니. 누군가가 한 시간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해줬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이렇다.

엄연한 실화가 이렇다.

“그럼 다시 한 번…… 빵야.”

믿기지 않는 기분으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마치 총을 쏘듯, 빵야를 시전했다. 그랬더니 본드래곤이 두개골을 쫑긋. 이윽고-

- 꾸항!

쿠콰쾅!

묘하게 꾸잉꾸잉(?)한 소리를 내며, 몸으로는 상반된 굉음을 터뜨리며 웅장하게 쓰러졌다.

총 맞은 것처럼. 정말 가슴이 너무 아파.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아픈데, 살 수가 있다는 게 이상하다고 내 귀에 캔디를 숑숑 집어넣듯이 너무나 리얼하게. 그리고 개구진 모습으로였다.

“헐. 미친.”

다시금 흘러나온 감탄사는 이쪽의 입에서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특근대 세르지오가 얼빠진 듯한 몸짓으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투구를 텅텅, 두어 번 쳤다. 아마 자신이 헛것을 보는 건가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 다른 이들도 혼란에 휩싸인 건 비슷한 듯했다.

“전하? 이건…… 무슨…….”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아스라한 변경백의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검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법도 했다. 아마도 이쪽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비장한 각오를 품고서, 이곳 수직갱도 가장 깊은 곳까지 달려 내려왔겠지.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이런 꼴(?)이다.

10년을 옆집에서 산 멍멍이보다도 더 친근하게 바닥을 구르고, 손을 달라면 손을 내밀며, 심지어 빵야 놀이에까지 기꺼이 동참하는 본드래곤의 모습 말이다.

실제로 변경백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평생을 강직한 무인으로 살아온 그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래 여차하면 황태자를 모시고 이 도시를 탈출하려 했던 그였다.

오늘의 작전이 시작되고, 황태자가 졸지에 본드래곤의 미끼가 되어 버린 상황을 전해 들으며 내심 너무나 경악했던 그였다.

제국의 영토도 아닌, 타국인 하르미온의 도시였다. 그런 도시를 위해 기꺼이 미끼 역할을 맡던 황태자의 모습이라니!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인간적으로는 감탄이 나오고 존경할 일이었지만, 제국의 황태자로서의 책임을 모조리 내던지는 듯한 행동이었다. 절로 욕설이 흘러나올 만큼 화가 났다.

그래서 살려야 했다.

주군을 위한 잔소리도 주군이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게다가 황태자는 자신과 가문 전체의 심장병을 고쳐준 은인 그 자체였다.

하여 황태자가 광산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무장을 챙겼다. 바삐 달려왔다. 나름 죽을 각오도 품었다.

여차하면 황태자를 탈출시키고 대신 죽겠노라고. 두려움 없이 기꺼이 목숨을 던지겠노라고 다짐을 하였다.

그렇게 비장한 심정으로 내려온 것인데…….

‘설마.’

옆집 멍멍이처럼 애교를 부리고 있는 본드래곤.

그런 본드래곤을 태연하게 대하는 황태자.

그 모습을 보며 아스라한 변경백은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동시에 그는 어쩐지 그럴듯한 가설을 세웠다.

‘설마…… 황태자 전하는…… 이 모든 결과를 계획하셨던 것인가?’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을 돌이켜보자니 더더욱 그런 심증이 굳어졌다.

당연했다. 세상 어느 황족이, 그것도 황태자가, 타국의 도시를 위해 목숨이 걸린 미끼 역할을 받아들이겠는가.

그러니까…….

‘전하는 이걸 다 계산하고 계셨던 거야. 그러니 그토록 불합리해 보이는 결정을 내리고, 친히 미끼가 되어 위험한 광산으로 뛰어드셨던 거지. 그리고…….’

남들이 보지 않는 곳.

볼 수 없는 장소.

이곳에서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방법을 동원하여 사상 최악의 괴수를 길들여 버린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신빙성이 있어.’

……꿀꺽.

황태자를 바라보는 변경백의 목울대가 저도 모를 감탄으로 출렁였다. 동시에 그가 파는 오해의 우물이 실시간으로 깊어져만 갔다.

‘그래. 전하만의 비밀스럽고도 파괴적인 방법이 있는 거였어. 그건 측근이라 할 수 있을 특근대나 근위대원에게도 함부로 보일 수 없는 종류의 것일 테고. 그러니 미끼가 되는 수고를 들여가면서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여기까지 내려오신 거겠지.’

그렇다면 그 방법이란 게 뭘까.

마법?

저주?

혹은…… 압도적인 무력?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추측이지만…… 어쩌면, 오히려 그래서 더욱 진실인 것인지도.’

변경백은 노련한 무인의 눈길로 황태자의 면면을 살폈다. 덕분에 격전(?)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황태자의 차폐갑옷 곳곳이 손상되어 있었다. 찌그러지거나 칠이 벗겨진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게다가 데미안 경이 쓰러져 있고…… 저쪽은, 그래. 그레노 경을 기습하여 차폐갑옷을 강탈했다던 의문의 실력자로군.’

한데 모두가 쓰러져 있다. 저마다 차폐갑옷 곳곳이 손상된 모습으로. 주위의 박살 난 지형지물 사이로. 엉망진창이 되어서 말이다.

‘그렇다는 말은, 전하께서 저들을 대동하여 저 괴수와 격전을 벌였고, 이내 압도적인 힘으로 괴수를 제압하여 길들이기에 성공하셨다는 뜻이로군.’

결론이 나왔다.

덕분에 문득, 변경백은 예전에 얼핏 들었던 풍문을 떠올려야 했다.

접했던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치부했던 풍문. 잠깐이나마 머나먼 황도에 퍼졌다던 흥미로운 가십. 바로 그것은…….

‘황태자 패왕설. 그것이 정녕…… 진실이었단 말인가?’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가능성은 있겠다.

황태자를 바라보는 아스라한 변경백의 눈초리가 살짝 변했다. 그것은 무인으로서의 순수한 존경과 호감이 담긴 눈길이었다.

그런 기색은 다만 아스라한 변경백만의 것이 아니었다.

‘전하는 어떻게 이런 일을 해내신 거지?’

‘내가 보는 이게…… 현실인가.’

‘마젠타노의 황태자는 대체…….’

변경백과 함께 이곳까지 내려와 상황을 목격하게 된 근위대의 프란델 경, 시장 브레다, 시장의 호위기사들이 한결같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미증유(?)의 사태에 혼란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꼈다.

물론 라키엘도 그런 주위의 기색을 다 눈치챌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갓 추출한 에스프레소 같은 진한 뻘쭘함을 느꼈다.

‘그래도 일단은…… 살았네.’

아까까지만 해도 본드래곤에게 밟혀서 죽을지, 물려서 죽을지를 고민해야 했던 처지였다.

한데 지금은 180도 달라졌다. 설마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은 몰랐다.

‘그냥,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해서 만년필을 쏜 거였는데.’

원래는 코어를 깨뜨리려고 했다.

한데 만년필의 고열이 코어의 균열을 용접하듯 메꿔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덕분에 본드래곤이 분출하던 방사선이 싹 사라지게 될 줄은 더욱 몰랐다.

‘코어의 제어가 완전해진 탓인가.’

정확한 이유는 짐작할 길이 없었다. 다만, 아까까지 미친 듯이 울리던 방사선 피폭 경고창이 눈앞에서 사라진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서였다.

“후우.”

라키엘은 너스레를 떨었다. 모두의 감탄한 시선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한 척, 사실은 처음부터 노렸던 것이었던 척,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힘껏 가다듬은 목소리로 모두를 돌아보았다.

“다들 날 돕기 위해 여기까지 내려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가장 먼저 대답한 이는 별궁 근위대장 프란델 경이었다.

라키엘은 엉망진창으로 질린 자신의 안색이 투구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피식 웃었다.

“고맙군. 그대의 충성과 헌신에 눈물이 나올 지경이야. 그런데, 날 도우러 내려왔는데 왜들 그렇게 멀뚱히 서 있는 걸까.”

“예?”

“지금이 한가하게 멀뚱거릴 때인가?”

“……아!”

프란델 경의 갑옷이 흠칫.

그가 황급히 이쪽으로 달려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일찍도 물어본다.”

“그, 그게…….”

“됐고. 데미안부터.”

라키엘은 프란델 경의 부축을 받으며 데미안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데미안은 의식이 완전히 끊어지진 않은 듯했다.

“……전하.”

투구 사이로 흘러나오는 녀석의 낮은 읊조림.

“다, 끝난 겁니까?”

“그래. 다행히.”

“그럼…….”

“내 걱정은 됐고. 우선 이거부터 먹자.”

품속에서 저혈당 대비용 꿀사탕을 꺼냈다. 녀석의 투구를 살짝 열어서 밀어 넣어 주었다.

옴뇸뇸, 데미안이 사탕을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혈당을 밑바닥까지 다 긁어내지는 않았나 봐?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기력도 있고?”

“예.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혈당을 끌어서 쓰는 데에 요령이 붙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음번엔 세 번은 쏠 것 같다?”

“더 늘려야겠지요.”

“당연하지.”

툭툭, 녀석의 흉갑을 두어 번 쳐주었다. 사실 가장 답답한 이는 당사자인 데미안일 것이다.

그토록 펄펄 날아다니던 녀석이, 마계왕의 1형 당뇨라는 저주에 걸려서 2~3회용 검기 셔틀(?)로 전락해 버렸으니까 말이다. 그런 자신의 신세가 얼마나 답답하고 원망스러울까.

“쯧.”

어쩌면 이게 다 소설 속 내용과 다르게 지금까지 멀쩡하게 살아 버린 이쪽 때문인 걸까.

원래는 죽었어야 했을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육신이 나로 인해서 생존해 있는 덕분에 스토리가 꼬여서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걸까.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스토리대로 죽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니 앞으로 이쪽도 살고, 데미안도 다시 건강해질 방법을 더 찾아봐야겠지. 겸사겸사 마계왕의 강림도 저지해야 할 거고.

그러니까.

“……어?”

참 할 일이 많기도 하다며 투덜거리려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갑작스럽게, 세상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아니, 전신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온몸에서 힘이 쑥 빠졌다.

마치, 잔뜩 품고 있던 긴장감이 스르륵 풀리듯이. 하여 다리가 풀리듯이. 전신이 허물어지듯이. 그렇게. 하염없이.

‘나, 기절하는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눈앞에는 어느새 떠오른 메시지가 시야 한쪽을 채워오고 있었다.

딩동.

[방사선 피폭 누적량이 2.0 Sv (시버트)를 초과하였습니다.]

[수차례에 걸친 물리적 충격이 가벼운 뇌진탕을 불러왔습니다.]

[거듭된 위기 상황에서 수축되었던 근육과 혈관의 긴장이 풀리며 혈류의 흐름이 갑자기 빨라졌고, 전신의 경혈에 지나친 자극을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 당신의 육체가 감당하기 버거운 스트레스를 소화하기 위하여, 강제적인 셧다운 상태로 돌입합니다.]

[당신은 탈진 상태에 빠져듭니다.]

[당신은 혼절 상태이상에 당첨됩니다.]

[극적으로 쓰러지는 당신의 모습이 모두의 망막에 새겨지며, 당신이 오늘 거듭 선보였던 영웅적 용기와 희생, 업적을 새삼스럽게 일깨웁니다.]

[당신의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한 이들의 가슴에 깃든 감동이, 불굴의 영웅담이라는 풍문으로 이 도시와 인근 지역 전체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메시지였다.

뒤의 내용을 더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어느새 캄캄해지는 눈앞의 세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단잠의 세계.

완벽한 혼절이 전신을 감싸 안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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