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429화 (428/468)

429화. 연구를 시작합시다아 (1)

[극적으로 쓰러지는 당신의 모습이 모두의 망막에 새겨지며, 당신이 오늘 거듭 선보였던 영웅적 용기와 희생, 업적을 새삼스럽게 일깨웁니다.]

[당신의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한 이들의 가슴에 깃든 감동이, 불굴의 영웅담이라는 풍문으로 이 도시와 인근 지역 전체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그런가.

사실은 잘 모르겠다.

내가 한 일이…… 영웅적이었나.

정말로 사실은 나, 그냥 도망치려고 했는데. 미끼 작전, 조금만 어그러진다 싶으면 데미안이랑 내 사람들 다 데리고서 도시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남의 동네니까.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 같은 거 아니니까. 그저 어쩌다 보니까 얽히게 된, 딱 그 정도 관계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내가 이 정도로 나서게 될 줄도, 날뛰게 될 줄도 몰랐어. 이렇게 쓰러져서 몽롱한 채로 이상한 독백이나 읊조릴 줄도 몰랐고.

그렇지, 꾸꾸야?

“……꾸꺄!”

어디선가 들려오는 대답. 기억 속의 꾸꾸가 꼼틀거리며 가슴팍에 안겨 오는 감촉. 아울러 한쪽 옆구리를 파고드는 까슬까슬한 꼬슴이의 느낌과, 어쩐지 따스하게 하늘거리는 뽀복이의 지느러미 촉감까지.

꾸꾸와 환상종들이 누워 있는 내게 안겨들어 왔다. 그래서 웃음이 나왔다.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래도 악몽이 아닌 게 어디야…….’

꿈이라도 이런 내용이라면 환영이다. 어차피 아파서, 혼절해서 누워 있는 처지에 이 정도 꿈이라면 반가운 사치다.

적어도 꿈을 꾸는 동안은 아프지 않을 테니까. 아픈 건 싫으니까. 어떤 경우에든, 어떤 형태로든. 반갑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본드래곤은 어떻게 됐을까.’

강아지처럼 애교를 부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도 믿기지가 않았다. 어쩌면 녀석은 처음부터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 조금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떠오르는 걱정과 함께였다.

‘혹시 내가 기절해 있다고 또 사람들 말 안 듣고 날뛰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만약 얌전하게 있었던 거라면 나중에 간식이라도 좀 줘야 하나. 그런데 녀석은 무슨 간식을 좋아할까.

감이 안 잡힌다. 어지럽다. 어지러울 때는 산책이라도 하면 좋을까. 산책을 하다가 길에서 동전이라도 줍고 싶다. 이순신 장군님은 로또에 한 번도 당첨된 적이 없으시거든. 그런데도 어쩌면 그렇게 꿋꿋한 인생을 사실 수 있었을까. 역시나 위인다워. 존경스럽다.

“……꾸꺄아!”

응?

헛소리하지 말라고?

그래서 명치를 밟아주는 거라고?

꿈의 내용이 점점 개꿈(?)스럽게 바뀌는 것이 얼핏 느껴졌다. 동시에 명치를 꾹꾹 눌러오는 압박감도 함께 느껴졌다. 아. 이 정도면 압박감이 아닌데. 대놓고 점프해서 밟는 거 같은데.

그러니까.

마치.

꼭.

“꾸꾸꺄!”

당장 좀 일어나 보라는 듯이.

콰악!

“……커억!”

라키엘은 눈을 부릅떴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정말로 명치가 뭔가에 콱 짓밟혀서 뚫려 버리는 건 아닌가 싶은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횡격막이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추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가 않았다. 대신 격하고도 불규칙한 기침만 연달아 터져 나왔다.

“쿠엑, 쿨럭! 콜록! 컥!”

정신이 없었다.

이쪽, 살아는 있는 걸까.

가까스로 기침을 가라앉히며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았다. 그러자니 자그마한 덩어리가 꼬물거리며 이불 위로 기어왔다.

그러고는.

“꾸? 꺄아?”

“…….”

“꾸! 꺄아?”

“……어, 나 잠은 다 잔 거 같긴 한데.”

“꾸꺄! 꺄?”

“어. 좀 아프긴 했어. 쎄게 밟더라.”

“꾸꺄!”

“그게 자랑스러워할 일은 아니지 않아?”

“꾸꾸! 꺄!”

“…….”

이쪽의 무르팍 위에서 폴짝폴짝 한 뼘 점프를 선보이며 뿌듯해하는 꾸꾸. 그 모습을 보자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아직 꿈속이구나, 라고.

물론 그런 착각이 깨지기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꼬스슴! 꼬슴!”

“뽀! 뽀보복! 뽀!”

“……어?”

옆에서 난데없는 꼬슴이와 뽀복이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침대 머리맡, 베개 옆에서 뒹굴거리던 두 환상종 녀석들이 보였다.

“너희가…… 왜 여기서 나와?”

이상한 일이었다.

애당초 꾸꾸와 환상종들은 아스라한 변경백 저택에 남겨두고 떠나왔던 터였다. 예상되는 방사선 피폭의 위험을 피하게 해주려던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여기는?

변경백의 저택이 아니다.

심지어 마젠타노의 영토도 아니다.

아예 이웃나라인 하르미온의 국경도시다.

그런데 요 녀석들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걸까. 이거 정말로 실화인가. 아니면 지금도 너무나 현실적인 꿈을 꾸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누우우-!”

“……!”

별안간 침실 창문 밖에서 뜨거운 콧김 한 덩어리가 푸확, 뿜어져 들어오며 커튼을 열어젖혔다. 우렁찬 투레질 소리와 함께였다.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다.

창문 틈새로 이쪽을 워낭소리 터지게 바라보는 촉촉하고도 까만 눈망울을.

“……우루스?”

“누우! 푸르륵!”

우루스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눈웃음을 그렸다.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현실 맞구나. 그러니까…….

“설마, 너희들, 다 같이 여기까지 온 거야? 우루스를 타고서?”

“꾸꺄!”

“꼬슴!”

“뽀보!”

“……헐.”

진짜네.

이제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겠다. 한편으로는 녀석들이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너희는 괜찮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디 아프거나, 어지럽거나 뭐 그러진 않았어?”

혹시 피폭을 당한 건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한데 돌아오는 대답이 뜻밖이었다.

“꾸?”

“꼬?”

“뽀?”

“피폭…… 별거 아니라고?”

“꾸꺄!”

“꼬슴슴!”

“뽀복! 뽀!”

“너희가 피폭을 안다고?”

“꾸, 꼬, 뽀!”

“어떻게?”

“꾸꺄꺄! 꾸꾸! 꺄! 꾸!”

“……뭐? 꾸꾸야? 네가 피폭을 치료할 수 있다고? 정말?”

“꾸꺄!”

“진짜?”

“꾸!”

“…….”

너무 대놓고 얼토당토않은 말을 들으니 오히려 대답이 궁해졌다. 그런데 조금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나, 생각보다 컨디션이 괜찮은데?’

라키엘은 새삼스럽게 자신의 몸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물론 완전한 정상은 아니었다. 혼절의 여파인지 아직은 약간의 어지럼증이 남아 있었고, 몸에도 힘이 조금 없었다.

살짝 몸살 기운이 있는 정도랄까.

하지만 이 정도라도 엄청난 거다. 문득 떠오르는, 혼절하기 직전에 봤던 메시지의 내용을 되짚어보자면 말이다.

그때 메시지의 내용이라면 아마도…….

‘……방사선 피폭 누적량이 2.0 시버트를 초과했고, 수차례에 걸친 물리적 충격이 가벼운 뇌진탕을 불러왔고…… 대강 그랬지, 아마.’

얼핏 보았던 거지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의 몸 상태가 더욱 신기했다.

‘2.0 시버트 이상의 피폭. 그건 절대로 이렇게 가볍게 넘길 수준이 아닌데.’

실제로도 그렇다.

전에 학회에서 봤던 자료에 따르자면 아마, 피폭량이 2~3 시버트만 되어도 1개월 이내의 사망률이 무려 40%에 달한다고 했다. 거기에 탈모와 구토, 면역력 저하 등등의 증상과 함께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급사할 확률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했던가.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2.0 시버트 이상을 피폭당했다는 메시지의 말이 맞다면, 이쪽은 절대로 지금처럼 하하호호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당장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헤매는 처지인 게 맞다.

‘그런데…… 후유증이 이 정도라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약한 몸살 기운 정도의 후유증으로 끝이라니.

이건 비유하자면, 전성기의 마이크 타이슨에게 풀파워 분노 스트레이트를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볼따구의 뾰루지 하나만 뾱, 하고 터지는 피해만 입고 끝난 상황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엉뚱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말이야. 으음, 꾸꾸야?”

“꾸우?”

“혹시 내가 잠든 사이에, 네가 날 치료한 거야? 피폭을 치료할 수 있다는 그 방법으로?”

“꺄아!”

“정말?”

“꾸꺄!”

“어떻게?”

궁금했다.

꾸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꾸꾸 대신 꼬슴이가 자그마한 손바닥을 흔들며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꼬스슴! 꼬슴!”

“으음? 입을 벌려 보라고?”

“꼬슴!”

“……아아.”

시키는 대로 했다.

하면서도 솔직히 이게 뭔가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퉤!”

꾸꾸가 이쪽의 벌린 입안으로 침을 탁! 뱉었다!

“우읍, 뭐한 거야, 지금?”

“꾸꺄!”

“뭐?”

“꺄꾸!”

“……치료? 이게?”

“꾸우!”

“…….”

사람 입에 침 뱉는 게 치료라고?

처음엔 농담을 하나 싶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이 아이들이 좀처럼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 꾸꾸는 어려서, 환상종은 충실해서, 거짓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특히 이쪽의 안전이나 건강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꾸꾸 경이 보인 시범은 사실입니다, 전하.”

끼이익.

침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말했다. 데미안 녀석이었다. 녀석이 이쪽이 뭐라고 묻기도 전에 재차 입을 열었다.

“전하는 닷새 동안 누워 계셨습니다. 그동안 꾸꾸 경과 꼬슴 경, 뽀복 경이 전하를 간호하며 치료했지요. 방금 시범을 보였던 방법으로 말입니다. 저희도 처음에는 저런 게 치료가 맞나 싶었는데, 정말로 전하의 불안정했던 호흡과 들끓던 고열이 가라앉더군요. 그래서 그때부터 믿고 맡겼습니다.”

“어, 그럼…….”

“본드래곤은 광산 가장 깊은 곳에서 얌전히 대기 중입니다. 다행히 그동안 아무런 난동도 부리지 않았고요. 아마도 전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또한, 미끼 작전에 참여했던 인원들 중에 심각한 부상자는 없습니다. 파괴된 시가지의 주택과 시설들은 보수하는 중이고요. 물론 저도 이제는 괜찮습니다. 혈당은 안정되었고, 이따금씩 꾸꾸 경의 치료 또한 받았으니까요.”

“……뭔가 준비된 멘트를 와다다 쏟아내는 것 같다?”

“전하께서 일어나시면 궁금해하실 듯한 항목들을 미리 정리해서 암기해두고 있었습니다.”

“어…… 잘했어.”

“칭찬 감사합니다. 또 궁금하신 점은 없으신지?”

“그러니까 꾸꾸의 침이 피폭 치료에 매우 효과적이라는 거지?”

“지금까지 나온 결과로는 그렇습니다.”

“그럼 쟈빌론은?”

“죽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치료를 받으며 구금되어 있는 중입니다.”

“잘됐네.”

“예?”

멀쩡해진 데미안의 모습을 보니 반가웠다. 비로소 살았다는 실감이 났다. 다른 한편으로는, 쟈빌론이 얌전히 붙잡혀 있다는 사실이 더욱 반가웠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만. 끄응차.”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약간 현기증이 났다.

데미안 녀석이 황급히 부축 겸 만류의 손길을 뻗어 왔다.

“전하? 조금은 더 쉬셔야 합니다.”

“아니. 쉴 때가 아니지.”

절로 새어나오는 웃음 속에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지금 피폭 치료의 혁명을 가져올 신약 물질이 발견됐고, 그 물질로 잘만 하면 대량의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을 거고, 그 개발 실험에 딱 써먹기 좋은 튼튼한 연구 대상이 얌전히 잡혀 있는데, 지금 나보고 누워만 있으라고? 어떻게?”

그건 안 된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데미안의 만류를 뿌리친 라키엘은 룰루랄라 쟈빌론이 감금된 감옥으로 향했다.

……아프다.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다.

내가 왜 이렇게…… 된 걸까.

나는 그저 리한 군의관을 납치하려고만 했던 건데. 그렇게 둘만 빠져나가려 했는데.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이런 꼴이 될 줄은 몰랐다. 그 빌어먹을 괴수의 발길질 한 번에 엉망진창의 꼬락서니가 될 줄도. 이렇듯 치욕적인 몰골로 감금이 될 줄도. 정말로 몰랐다.

그렇지, 리한 군의관?

“……신이 들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음. 낯익은 목소리. 기억 속의 리한 군의관이 싱긋 웃으며 다가오는 듯한 착각.

리한 군의관이 다가왔다. 그래서 웃음이 나왔다.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적어도 리한 군의관, 그대는 무사하구나.’

꿈이라도 이런 내용이라면 환영이다. 어차피 리한 군의관을 잡지 못했으니까. 감옥에 갇혀 비몽사몽인 신세로 붙잡힌 처지에 이런 꿈이라면 반가운 사치가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현실의 그대는 어떻게 됐을까.’

날뛰던 괴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이 쓰러지던 순간도 떠올랐다. 함께 튕겨나가던 리한 군의관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때 붙잡아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하여 많이 다친 것은 아닐지. 이후에도 날뛰었을 괴수에게 짓밟히진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다. 당장 이곳을 박차고 달려나가 확인을 하고 싶을 만큼.

그때였다.

“쯧. 헛소리를 하는 거 보니까 잠이 덜 깼네.”

응?

리한 군의관?

뭐라고?

내가 헛소리를 했다고?

그게 무슨 소리일까.

여전히 멍한 상태에서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리한 군의관이 이쪽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찰싹!

“……!”

가벼운 싸대기에 정신이 확 들었다.

마치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듯한 감각.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었다는 새삼스러운 자각. 정말로 리한 군의관이 눈앞에 있고, 손수 뺨을 때려 왔다는 충격까지.

“어?”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리한 군의관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물어왔다.

“이봐, 정신이 들어?”

“그…… 나는…….”

“들었으면 알려줄게.”

“…….”

알려준다니, 뭘?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리한 군의관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납치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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