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39화 (3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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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성장통

늘 주변에 돌아다니는 정령을 바라보기만 했던 그가 처음으로 정령을 불렀다. 그 간절한 부름에 응답한 것이 4속성 정령왕이었다.

“정령들도 술사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단다. 아마 만남을 기다리는 것은 아벨 너 혼자만이 아닐 것이야.”

“기다린다? ……저를요?”

어린 황자가 해주는 이야기는 꼭 동화 같았다. 아벨은 설렘으로 심장이 뛰어오는 것을 느끼곤 주먹을 콱 쥐었다.

“기다리고만 있지 말거라. 네가 간절히 부른다면.”

후웅.

녹색 바람이 쥬다스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물결에 파문이 일듯 잔디를 훑는 산들바람에 크리스티나와 아벨은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바람은 금방 멎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 지금껏 보이지 않던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 소리에 이 아이들은 분명 기꺼이 응할 테니.”

「정말이지, 이그레트 넌 너무 친절한 게 탈이라니까.」

「……동감이다.」

그들에겐 들리지 않았지만 유니와 루니가 한숨처럼 투덜거렸다.

대신 쥬다스의 어깨에 살포시 앉아 있는 녹색 정령과 그를 감싸고 발치에 엎드려 있는 푸른 늑대의 형상은 또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술사의 요청에 의한 ‘실체화’였다.

“이것이, 물의 정령…….”

그의 곁에 앉아 있던 크리스티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푸른 늑대를 바로 내려다보았다.

어렴풋이 보았던 기억이 났다. 지난번 쥬다스와 함께 호수에 빠졌을 때, 그들을 건져내었던 정령이 바로 이 푸른 늑대였다.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 제대로 살펴보질 못했었는데 막상 바로 눈앞에 두고 나니 가슴 떨릴 정도로 신비로웠다.

루니가 살짝 살짝 움직일 때마다 허공으로 부유하는 물거품들이 아름답게 빛났다.

「힝, 나도 이그레트 옆에 당당히 있고 싶다요.」

황자가 다룬다고 알려진 정령은 물과 바람뿐이었다.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 토니는 시무룩한 얼굴로 쥬다스의 머리카락에 몸을 폭 묻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누워 꿍얼거렸다.

「맨날 유니만 이그레트를 독점하고.」

「얘가 뭐래? 루니도 같이 실체화하고 있거든?」

「그치만! 그치만! 항상 유니가 먼저 와 있으니까!」

「헤에, 그럼 너도 유~ 능~ 한 바람으로 태어나지 그랬니? 네가 느려터진 땅속성이니까 눈에 안 띄는 거잖아. 그걸 가지고 어린애같이 내 탓하면 쓰겠어?」

「끄앙!」

결국 유니가 떼 부리던 토니를 울림으로써 짧은 공방이 끝났다.

보는 눈이 있어 차마 말리지도 못하고 멈칫한 쥬다스를 두 아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

“……쥬다스 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쥬다스는 난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아벨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한번 불러보겠느냐? 네 정령을.”

“어떻게, 부르면.”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단다. 소리를 내어도 좋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염원해도 좋으이. 아벨 네가 왜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함께 떠올려 보거라. 이는 정령이 너를 알아볼 이정표가 될 것이야. 정령은 인간의 정신에 민감하게 반응하니.”

“이루고자 하는…….”

“그러고 나면 이름을 붙여주는 게다. 먼저 네 소개를 하는 것도 잊지 말고.”

정령과의 계약에 대해서는 아벨도 수업 시간에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보통은 때가 되면 정령이 알아서 찾아올 것이라 하였었다. 찾아온 정령에게 이름을 준다면 그것으로 정령은 술사에게 구속된다.

한 번 영혼과 영혼이 이어진 후로는 술사의 바람을 최우선으로 들어주도록, 정령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술사를 돕는다.

수업을 통해 익힌 정보와 쥬다스의 말을 적절히 머릿속에 정리한 아벨은 눈을 감고 길게 심호흡했다.

‘……대답해 줘. 내게 정말 정령술의 자질이 있다면.’

그가 루바흐에 입학한 이후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상상했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난하지만 부족민들을 위해 늘 애쓰던 부모와 아직 어린 동생들, 또래에 비해 작고 소심한 그와도 스스럼없이 지내던 투르케의 친구들이 떠올랐다.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대단한 힘을 가져서, 내 힘으로 당당히 그들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을 바라.’

그의 소망은 쥬다스가 곁에 있음으로 증폭되었다.

쥬다스가 가진 인간을 뛰어넘는 강대한 친화력은 다른 술사의 공명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랬기에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존재에게도 그의 내면의 목소리가 닿을 수 있었다.

「…….」

오싹.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느낌에 아벨은 눈을 번쩍 떴다.

“방금, 뭔가?”

그러나 정작 그의 시야에는 다른 정령이 보이지 않았다. 아벨은 얼빠진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무언가를 느꼈었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반면 유니와 토니는 아벨의 곁에 나타난 형체를 눈치채고 반가움에 날개를 파닥였다.

「어라? 저거, 저 녀석.」

「으웅, 나도 봤다요! 완전 오랜만이다요.」

「그러게! 이게 얼마만인지. 저 녀석도 우릴 알아보려나? 왜 숨어 있는 거야.」

나타난 정령은 술사의 부름에 응하긴 했지만 아직 아벨의 친화력이 낮아 소통할 수가 없게 된 상태였다.

「있지, 이그레트. 우리랑은 좀 다르긴 한데 쟤도 정령이야. 인간으로 치면 먼 친척뻘이랄까?」

포로록 날아올랐던 유니는 문득 이상함을 감지하고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이그레트?」

파앗!

쥬다스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던 정령들의 실체화가 그대로 풀려 버렸다.

제 것은 아니었어도 그나마 보이던 정령마저 사라져 버리자 아벨은 더욱 당황해 굳어버렸다.

그런 그의 귓가로 크리스티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쥬다스 님!”

“이게, 어떻게 된.”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쥬다스가 정신을 잃고 크리스티나에게 기대 있었다. 영문을 모르기로는 크리스티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녀는 당황보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언지 빠르게 판단했다.

쥬다스를 휙 등에 들쳐 업은 크리스티나가 아벨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 스승님을 불러와! 어서.”

“네, 넷!”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아벨이 허겁지겁 달렸다. 그의 눈엔 보이지 않았지만 그 뒤를 따라 소환된 정령도 함께 이동했다.

“하……. 정말, 방심할 수 없게 만드시는군.”

쥬다스를 업은 채 일어선 크리스티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힐끗 업힌 이를 돌아보자 창백한 얼굴 위로 흐르는 땀방울이 보였다.

마치 끓어오른 냄비의 뚜껑 단면처럼 식은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건.」

「그래, 조금 늦었지만 드디어.」

푸른 늑대가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굴려 크리스티나에게 업혀 있는 쥬다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멈추었던 ‘성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정령들은 걱정스레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술사가 정신을 잃었으니 힘을 사용할 수 없을 뿐더러, 이는 정령이 개입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눈을 뜬 이후부터 그의 몸은 조금씩 제 기능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몸의 성장이 멈추었던 건 무려 5년 가까이였고, 하필이면 시기적으로 그 5년간은 폭발적인 성장이 이루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다시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한 몸이 미뤄 두었던 성장을 진행하려면 지금 같은 속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간의 것들은 마치 전력 달리기를 하기 직전의 준비 운동과도 같았다. 그의 몸은 비로소 본래 나이에 알맞은 체형을 따라잡기 위해 순리대로 조정을 시작했다.

「이그레트가 깨어났으니까. 당연한 일이지.」

「으응. 그렇지만 루니, 우리가 알고 있는 걸 정말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을까? 나쁜 뜻은 아니라지만 어쩐지 속이는 것 같아서 찜찜해.」

「어차피 곧 스스로 알게 될 거다. 먼저 말해서 혼란을 가중시킬 필요는 없어. 아니면, 그 이상 잘 설명해 낼 자신이 있는 건가? 바람이여.」

「……그렇게 부르지 마, 바보. 지금 난 ‘유니’라고.」

유니는 원피스 자락을 꾹 쥐며 웅얼거렸다. 그리곤 휙 날아올라 쥬다스의 어깨에 내려앉아 그 창백한 뺨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희미한 바람이 일어나 열이 오른 체온을 식혀주려 감돌았다.

「괜찮아. 언제나 곁에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그레트.」

―조금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다 괜찮을 거야.

놀란 얼굴로 달려오는 이사벨을 향해 쥬다스를 업은 크리스티나가 다가갔다.

교사를 불러온 아벨은 숨을 몰아쉬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눈치채지 못한 자연계 정령들이, 주변을 가득 메운 채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쥬다스의 의지가 아니더라도, 정령은 오로지 그를 위해 움직였다.

그는 전무후무, 자연으로부터 사랑받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 * *

정신을 잃은 사이 쥬다스는 다시 꿈을 꾸고 있었다.

아니, 이번에는 꿈속에서나마 ‘이그레트’ 본래의 모습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의 모습으로 그는 처음 보는 방 안에 서 있었다.

방은 천장이 매우 높았으며 면적 또한 넓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 그 안에서 달리기 시합을 펼쳐도 될 정도였다.

그러나 방 크기에 비해 가구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커튼이 내려진 창문과 침대 하나, 바닥에 깔린 고급스러운 카펫이 전부였다. 그 흔한 탁자 하나 없었다.

평범한 사람은 꿈도 못 꿀 크고 좋은 방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삭막했다.

그리고 창문과 제일 멀리 떨어진 벽 구석에 작은 아이가 하나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

이그레트는 아이를 가만 바라보았다. 지금 그에게 있어 익숙한 얼굴이었다.

‘쥬다스.’

그가 알지 못하는 12년간의 쥬다스였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작고 말라 있는 아이는 벽에 등을 대고 웅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그레트는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가 섰다.

“얘야.”

“…….”

“아가, 바닥이 차단다.”

아이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텅 빈 눈을 한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그레트는 안타까운 마음에 함께 그 옆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실제로는 말 한마디 나눠 본 적 없는 사이였어도 벌써 한 달 가까이 그 몸으로 살아왔다.

‘쥬다스’가 자신의 환생이든 그저 빙의된 몸이든 상관없이 정을 줄 수밖에 없는 아이였다.

이그레트는 주름진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토닥토닥.

그는 느린 박자로 고운 은발을 쓰다듬었다. 그 순간, 아이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으면.”

“으응?”

“……내가…….”

이그레트는 가만 귀를 기울였다.

아이의 목소리는 자신이 내던 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생기라곤 없었으며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듯 형편없이 갈라졌다.

아이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다시 중얼거렸다.

“……내가 사라졌으면.”

멈칫.

이그레트는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가만히 아이의 눈을 응시했다. 눈물 한 방울 고이지 않은 금안 너머로 아주 작은 감정의 싹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것은 황자가 아무도 모르게 어린 가슴속에 품고 있던 소망이었다.

최고의 혈통을 타고 태어나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던 아이의 입에서 나온 것치곤 소름 끼치도록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바라는 건 오직 단 하나였다.

“처음부터 없었던 듯이.”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Lv1스킬 ‘독자의 부름’이 성공하여 야생의 [공든탑]이 소환되었다!

[공든탑]과 계약하여 마법소녀(년)가/이 되시겠습니까? (Yes . No)

...는 위험하니까 진짜 계약하진 마시고... 흠흠;

농담이었는데 정말 원하시는 독자님들이 계셔서 부랴부랴 들고 왔습니다.

내일은 정말로 쉬고 오겠습니다. ㅎㅎ

점점 추워지는 계절, 건강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아. 이그레트 독자님들, 해피 할로윈. ^-^

그럼 월요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정성과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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