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40화 (4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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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성장통

툭.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아이의 금색 눈동자에서 흐른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자신의 뺨을 적신 눈물을 느끼고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노인 이그레트가 흘린 눈물이었다.

그는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아니. 아니다, 아가. 네가 정말 바랐던 건 그런 게 아니지 않누.”

그는 아이의 심정에 이상할 정도로 깊숙이 공명하고 있었다.

언뜻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의 표정 너머로, 실은 뜨겁게 울고 있는 이면이 있었다.

다른 누구도 몰랐지만 그 자신만큼은 알 수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지. 하나 사실은 말이다. ‘죽고 싶다’는 말은,”

“…….”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란다.”

‘쥬다스’는 생각했다.

분명, 생각했었다.

다른 삶이 주어진다면.

내가 이런 ‘실패작’이 아니라면.

―살고 싶어.

* * *

각각 무예전과 연구물 발표회 순번표를 받고 나오던 에단과 바이칼은 교무처 입구에서 서로 우연찮게 마주쳤다.

둘은 잠시 갈등했다. 쥬다스라는 교집합으로 인해 안면도 트고 대화도 몇 번 해본 사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바이칼은 루바흐에서 발이 넓은 편이긴 했으나 이번 학기에 편입으로 들어온 에단과는 딱히 교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늘 중심이 되어주던 쥬다스가 없는 자리에서 둘이 덩그러니 마주쳐 봤자 그다지 나눌 대화도 없었다.

그래도 털털한 편인 바이칼이 먼저 어색하게나마 손을 들어 보였다.

“여기서 보는군요. 그쪽은 무예전 신청?”

“…….”

에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뚝뚝한 반응을 본 바이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어휴, 젠장. 이쪽도 어지간히 사교성 없는 자로군.’

하여간 그 백로황자와 얽힌 인물치고 평범한 사람이 없었다.

정작 그렇게 생각하는 바이칼 역시 다른 학생들 눈에는 충분히 황자와 얽혀 있었지만 본인은 겨 묻은 개 나무라기 바빴다.

“그 왜, 대기 시간이 얼마 정도랍니까?”

“……저녁.”

“오늘 저녁이요? 전 무슨 내일 아침에 오라던데. 일찍 나온다고 온 건데도 사람이 많이 밀렸더라고요. 까딱했으면 참가도 못해볼 뻔했을 정도로.”

“그랬군.”

기껏 어색하지 않으려고 말을 늘어놓은 바이칼이 도로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멋쩍게 한숨을 내쉬며 재차 입을 열었다.

“뭐, 기왕 이렇게 뵌 거 점심이나 같이하시죠?”

“……그러지.”

에단으로서도 딱히 거절할 이유 없는 제안이었기에 둘은 느긋하게 식당으로 향했다.

개인 숙소에서도 따로 메이드를 통해 식사를 주문해 먹을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교내를 돌아다닐 때는 보통 학식을 이용했다.

축제 기간이기도 하니 기존 학교 식당 외에도 요리 명인들이 펼쳐 놓은 간이식당이 추가로 들어서 있었다.

귀족 자제들의 입맛에 맞추어 고급 재료와 엄선된 메뉴만을 골라 내어놓는 이 식당들은 루바흐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였다.

돈도 노동도 필요 없다. 학생들은 전부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게 바로 이 축제의 메리트였다.

“어어, 점심부터 느끼한 건 별론데. 담백한 쪽 어떠십니까?”

“그게 좋겠군.”

두 사람은 의외로 취향이 잘 맞았다.

훈제오리 샐러드와 함께 새우, 전복이 들어간 면 요리를 느긋하게 즐기며 바이칼이 힐끔 에단을 쳐다보았다.

귀족식 식사가 아닌 학식 테이블이었음에도 에단의 식사 예법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같은 귀족이면서도 편안한 자리에서는 딱히 예법을 지키지 않는 바이칼과는 사뭇 차이가 나는 태도였다.

칼같이 절도를 지키는 에단의 모습을 질린 눈으로 쳐다보던 바이칼이 포크를 문 채 탁자에 턱을 괴었다.

“흠. 시비는 아니고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당신은 당최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

“……충분히 시비같이 들리는데.”

“아니라니까. 거 밥상머리에서 깐깐히 굴지 맙시다.”

학원 밖에서야 깍듯이 대해야 할 사이였지만 지금은 둘 다 학생이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 해도 바이칼은 그 정도가 늘 조금씩 과했다. 귀족이면서도 허례허식을 싫어하고 진솔한 성품을 가진 탓에 나오는 결과물이었다.

이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적도 있었으나, 그래도 루바흐에서 사귄 대부분의 친구는 바이칼의 이런 태도를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

그가 깐죽거리거나 툭툭 내뱉는 말들이 전부 신분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대해 준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정말 기분 나빠할 상이거나 그런 낌새를 보이면 바이칼도 태도를 고쳤다.

허물없는 말투는 그에게 있어 나름 친밀감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선 에단도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재미라. 확실히 무(武)에는 흥미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향후 짊어질 것들을 위해 다방면적인 능력이 필요해. 여기선 이를 마련할 뿐이다.”

“흐으음.”

바이칼은 물고 있던 포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짊어질 것들? 알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데. 혹, 거기엔 쥬다스 님도 포함된 겁니까?”

“……무례하군. 그분은 짊어져야 할 대상으로 볼 수 없다.”

“예이, 뭐 그러시겠죠. 솔직히 그분이 요즘 많이 달라지신 거야 저도 인정합니다. 여러 모로 뛰어나신 듯도 싶고. 그 많은 재능을 전부 숨기고 있었다는 게 소름 돋을 정도…….”

“해서, 묻고 싶은 건?”

탁.

에단이 식기를 단정히 내려놓으며 바이칼의 말을 잘랐다.

솜씨 있게 단면이 잘린 오리고기처럼 싹둑 말이 잘린 바이칼은 그를 따라 포크를 상에 내려놓았다.

“아직 우린 주인을 선택하기에 어립니다. 또한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고작 열두 살의 작은 태양일 텐데요. ……그런 쥬다스 님께, 당신이 충성하려는 진짜 이유는 뭐지?”

“…….”

그간 황자에 대해 별 생각 없어 보였던 바이칼이었으나 지금의 그 녹색 눈동자는 찌르듯 에단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에단에겐 별로 감흥을 주지 못했다. 에단은 아무에게나 자신의 결의를 흘리고 다닐 정도로 녹록한 이가 아니었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네 응석은 실컷 받아주었으니, 이제 내 차례인 것 같군.”

대귀족 특유의 고압적인 말투에서 위압감이 흘렀다.

에단 헤이가는 무예를 숭상하는 공작 가문에서도 그 자질을 칭송받으며 자라난 소년이었다.

강도 높은 훈련에 익숙해진 육체는 강인했고 몸 곳곳 자리 잡은 근육 탓에 교복으로도 그 탄탄한 체형이 가려지지 않았다.

당연히 키도 또래에 비해 월등히 큰 편이었다.

그런 그가 일어선 탓에 바이칼은 앉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며 왠지 모를 굴욕감을 느껴야만 했다.

“아니, 제가 언제 응석 따윌.”

“너는 그분의 적이 될 생각이 있나.”

“허?”

바이칼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무심히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에 짜증이 돋은 바이칼이 상대를 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누굴 반란 분자로 아나. 무슨, 쥬다스 님께 적? 그럴 힘도 없고, 또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별로 관심 없다고요. 나중에 루바흐를 졸업해서 성인이 된 후라면 모를까 뭘 벌써부터. 제가 물어본 건, 그냥 이 학교란 바닥이 워낙 하이에나 같은 족속이 많다 보니 그게 좀 신경 쓰이기도 하고 해서……!”

“……꽤나 솔직한 성정이군. 쥬다스 님을 위해 신경 쓰는 충심은 잘 알아들었다.”

“무, 무슨. 제가 언제 또 그렇게 말했다고!”

바이칼이 버럭 부정했지만 에단은 이를 귓등으로 흘린 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에서 손을 내렸다.

특수한 재능을 발굴하여 키워주는 인재 양성 학교인 만큼, 루바흐에서는 학생들에게 무기 소지를 허용했다.

어차피 날붙이가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남을 해할 수 있는 신분과 재능을 지닌 아이들이었다.

대신 서로가 귀한 가문의 후예인 만큼 남에게 상해를 입히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아무리 어린 학생들이라 할지라도 귀족의 긍지와 생존 법칙을 익혔기에 학생도 대부분 그 룰을 어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공공연히 이를 어기며 낮은 신분의 학생을 괴롭히는 일이야 일어났지만 무기를 사용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진 않았다.

“아니라면 됐다.”

“그러면서 검은 왜 잡았던 겁니까? 결투라도 신청하게요? 보다시피 전 학구파라서 몸 쓰는 일은 별롭니다. 마법이라면 모를까.”

에단은 사교에는 감이 떨어졌지만, 지금처럼 상대가 가진 역량이나 의지를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는 굉장히 눈치가 빨랐다.

그가 보기에 바이칼은 정말 황자에게 적의가 없었으며, 오히려 걱정하기까지 했다.

잠정적 아군에게 날을 세울 필요는 없다. 에단은 나름 친절한 어투로 대답했다.

“공부도 체력이 있어야 할 텐데.”

“……이 양반이 진짜.”

둘이 티격태격거리며 식당을 나서는 순간, 하늘에서 무언가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바이칼은 자신의 머리 위로 툭 떨어진 종이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이건, 프리미어 페이퍼?”

축제를 예고했던 종이와 같은 재질이었다. 학원 루바흐에서 전교생에게 보내는 또 한 번의 메시지였다.

이렇게 연달아서 공지를 띄운 적은 드물었기에 바이칼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무슨…….”

“공지 떴다! 공지! 긴급 경보령이래!”

“사령술사가 나타났다는데? 그거 때문에 지금 제국이 온통 난리라나 봐!”

공지를 접한 학생들이 격한 반응을 보이며 순식간에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에단과 바이칼은 프리미어 페이퍼에 적힌 사항을 동시에 눈으로 훑었다.

[긴급] 엑스퍼트~제네럴급 사령술사 출몰 경보령.

-사령술사의 행적이 곳곳에서 보고되고 있음.

-정확한 등급은 미확인 상태. 최상급 사령 ‘본 드래곤’을 다루며 광역 사령술 등을 사용한 흔적으로 보아 최소 엑스퍼트에서 크게는 제네럴급 사령술사일 가능성이 높음.

-2일 전, 투르케 사막 부족민 전멸이 보고됨.

-이달 교황청을 습격했던 자와 동일범으로 추정.

-현 소재지 파악 중. 미확인 상태.

-외출 시 각별히 주의할 것.

“……제네럴급 사령술사라고?!”

사령술은 전 세계에서 금지된 악마의 술법이며, 죽음을 매개로 힘을 얻는다. 그 힘이 크면 클수록 바쳐야 할 제물의 양도 늘어난다.

사령술사들이 다루는 사령이란 정령과 마찬가지로 영혼과 영혼이 이어지는 계약을 나누며, 끝내 술사의 영혼을 놔주지 않고 소유하려 든다.

정신력이 약한 술사인 경우 자신이 부리는 사령에게 잡아먹혀 영원히 노예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엑스퍼트에서 제네럴급은 어설픈 술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엑스퍼트는 정령술사로 따지자면 최상급 정령을 다루는 수준이었다. 이 정도까지만 되어도 어찌 손볼 만 했다.

그러나 제네럴은, 사령왕을 수족으로 부릴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거대한 힘을 소유했다.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이 정도면 루바흐뿐 아니라 제국 전체에 경보령이 뿌려지기에 충분한 사안이다.

에단과 바이칼은 동시에 공지에서 시선을 떼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의 팁 : 정령은 자연계4속성 + 물질계 + 동물계로 나뉘어집니다.

이 중 아벨의 정령은 물질계(거울)입니다.

제국 내에서 알려진 정령은 주로 자연계4속이고, 그마저도 술사가 희귀합니다. 아주 드물게 물질계나 동물계가 출현하곤 하나 아직 연구가 미진하여 그 정체를 '정령'이라고는 생각 못하고 기현상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 함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은 전부 본편안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물론 그리 골치아프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고구마는 초반에 충분히 드신걸로(...)

<이그레트>는 호흡이 느린 장편으로, 함께 느릿하게 걸어주시면 됩니다 ㅎㅎ

(1부 완결 전까지 프리미엄이나 노블 전환은 없을 예정입니다.)

11월의 시작입니다. 이번 한 달도 매일 잘 부탁드립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애정에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꾸벅)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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