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54화 (5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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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재회

“고맙구나, 욕심내 주어서.”

「이그레트……?」

“나야말로 미안하다. 지금까지 언제나 너흴 내 곁에 가두어두면서 나의 소망만을 요구해 왔지.”

「그게 우리의 계약인걸.」

“아니.”

쥬다스는 손을 뻗어 카니의 동그란 정수리를 톡톡 두들겼다.

“계약은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것. 그동안 나는 너무 당연하게 ‘받는 관계’에 익숙해져 있었던 게야.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내가 정령인 너희를 위한 일을 할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나도 너희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정령의 계약자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카니뿐 아니라 유니와 토니, 루니 모두가 당황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전력을 다할 거란다.”

「…….」

정령들은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수명, 경험, 체력, 무력, 그 외 다방면에서 인간은 확연히 정령에 비해 약체였다.

그래서 보통은 정령과 계약할 때 힘을 얻기를 소망한다. 보다 자신을 강력하게 지켜줄, 보다 편안하고 편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강한 힘을.

하지만 떠올려 보면 ‘이그레트’는 처음부터 그런 걸 바라고 계약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그래? 그럼 부탁할게. 계속 내 곁에 있어줘.’

정령들은 똑같은 눈빛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어떡하죠.」

「응, 원래도 세상에서 제일 좋았지만.」

「헤헤.」

키득대는 불과 바람, 땅의 왕을 두고 푸른 늑대가 쥬다스의 앞으로 다가갔다.

익숙한 듯 내미는 손길에 주둥이를 부빈 루니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올곧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늘 그랬듯, 우리의 모든 것은 네 뜻대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계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게 그대로였다.

그가 바라는 일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지리라.

「‘이그레트’.」

* * *

다음 날 아침, 출발 시간이 되자 쥬다스는 미리 말한 것처럼 말끔한 모습으로 병실을 나섰다.

속은 아직 쓰라린 구석이 남아 있었지만 치유술사의 힘 덕에 망가졌던 내장이 회복되어 운신에는 무리가 없었다.

내심 그의 상태를 걱정하며 일찍부터 나와 기다리던 일행은 안심하며 포탈로 향했다.

출발하기 전 아벨은 먹먹한 눈으로 투르케 사막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예전 모습을 되찾은 사막은 뜨거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일단 땅이 녹고 하늘이 개고 나니 복구 작업은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했다.

낡고 눅눅한 헝겊 대신 깨끗하고 빳빳한 재질로 만들어진 천막이 세워졌다.

사막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생필품이 조달되었으며 전문 관리 인력이 투입되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정령의 축복이 내려진 게 틀림없다.’

사령이 사라지고 본래 모습을 되찾은 땅에 분명 자연계 정령의 힘이 개입했을 것이란 추측이었다.

말마따나 마치 축복이라도 받은 양 사막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조만간 새로운 투르케 사막 주민들이 유입되어 북적거릴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자 아벨은 눈물 대신 미소를 지었다. 이제 모든 미련은 털었다.

그걸 가능할 수 있도록 해준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침 쥬다스 역시 아벨을 쳐다보았던 지라 서로 시선이 맞부딪혔다.

꾸벅.

아벨은 깊이 허리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쥬다스는 조용한 미소로 이에 답했다.

그리고 일행은 묘한 눈으로 그를 좇았다.

“…….”

다른 이들은 몰라도 쥬다스를 알고 있는 에단과 바이칼, 크리스티나만큼은 투르케를 되돌린 기묘한 힘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단순히 자연계 정령들이 나서서 축복을 내려준 동화 같은 일 따위가 아니었다.

‘당신은 대체.’

어떤 원리로 얼어붙은 사막을 돌려놓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건 황실에서 투입한 전문가들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단숨에 해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자질’에 그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당장 그 힘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본인이 먼저 입을 열지 않는 이상에야 소용없었기에 세 사람은 그의 뜻에 따라 알면서도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

각자의 상념을 품고 일행은 포탈에 탑승했다.

이번에도 역시 정령의 힘을 더함으로써 그들은 중간 거점을 거치지 않고 곧장 루바르잔 황궁의 포탈로 이동할 수 있었다.

포탈을 빠져나오자마자 드넓게 펼쳐진 분수대와 정원이 보였다.

황궁의 포탈은 일반적인 포탈 관리실과는 그 규모와 장비부터 질을 달리했다.

분명 실내 시설이었지만 낮은 키의 꽃밭이나 화로, 분수대 따위가 존재할 수 있을 정도로 면적이 넓었다.

또 금장으로 장식된 포탈은 일반적인 수준에 비해 서너 배가량 크기가 컸으며 포탈 관리실에 놓인 모든 자연물에는 정령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황정의 정령술사 세 명, 마력을 조절해 주는 마법사 다섯에 별도의 포탈 관리자까지 더해 총 9명의 인력이 관리실 내부에 배치된 상태였다.

그들의 방문을 루바흐로부터 미리 전달받아 알고 있던 황실에선 그 인력에 더해 하인들을 보내 마중 나왔다.

“대 루바르잔에 영광을.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용인이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엄숙한 분위기였다.

쥬다스보다 한 발짝씩 뒤에 물러서 있던 아이들은 지금 그가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이 아닌 ‘1황자’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한 시종이 다가와 그 앞에 무릎 꿇고 두 손으로 케이프를 내밀었다. 술장식이 달린 아이보리색 케이프였다.

쥬다스는 이를 받아 교복 재킷 위에 둘렀다. 케이프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이 고급스럽게 수놓아져 있었다.

“세족탕과 오찬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1황자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전하.”

황자라 한들 바로 황제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의 방문이 고해지면 다시 황제로부터 알현 시각을 내려 받게 된다.

그때까지 쥬다스는 자신의 궁에서 대기하며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시종을 바라보며 간단히 지시했다.

“내 학우들과 함께 머물 것이네. 그리 준비해 주게.”

“명을 받듭니다.”

시종의 안내에 따라 6명의 학생이 포탈 관리실을 빠져나갔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령술사들과 마법사들, 포탈 관리인은 그제야 자세를 바로 하며 서로 놀란 눈길을 주고받았다.

황자의 앞이라 절제된 태도를 취하느라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사실 그들은 간이 철렁할 정도로 놀란 상태였다.

“……보았는가?”

“허, 소문이 사실인 모양일세.”

그들은 1황자 쥬다스의 예전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조그맣고 볼 품 없던 황자였다. 좀처럼 입을 여는 일도 없어 조금 전처럼 아랫사람에게 지시를 하는 일 따위는 본 적도 없었다.

작았고, 조용했으며, 그저 숨만 쉬는 황실의 부속품 따위와도 같았다.

그랬던 그가 완전히 뒤바뀌어 나타났다.

만일 제국 유일의 은발과 금안이라는 확연한 특징만 없었더라도 동일인이라 여기지 못할 뻔했다.

제 나이에 맞게 몸이 성장한 것만으로도 황자는 전에 없이 위엄이 흘렀다.

마른 우물처럼 텅 비어 보이던 금안에는 반짝이는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들의 의지로 따라온 것이 분명한 5명의 ‘학우’는 대부분 큰 권력가 자제거나 특별한 재능으로 소문이 나 있는 자들이었다.

누군가와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그 1황자가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어 데려온다니?

예전 같았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다.

마치 기적과도 같은 성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이들은 경탄에 사로잡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고요히 포탈 관리실을 지켰다.

1황자 궁은 황제가 기거하는 본궁과 인접한 위치에 자리해 있었다.

궁의 주인인 쥬다스 본인이 원했기 때문에 일행은 흩어지지 않고 함께 응접실로 이동했다.

쥬다스는 응접실에 일행을 앉혀두고 잠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루바흐에 입학한 이래 처음 귀환한 것이건만 방 안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쥬다스는 뒤를 졸졸 따라온 시종을 의식하지 않고 천천히 방 한가운데에 가 섰다.

‘꿈속에서 본 것과 정확히 일치하긴 하지만.’

황족이 아니라 귀족이라 해도 가지고 있을 법한 가구가 하나도 없었다.

도자기나 값비싼 장식품을 올려놓는 장은커녕 수수한 화분이나 원목 테이블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드라운 카펫이 깔린 넓디넓은 방 안에는 가구라곤 고풍스럽게 휘장이 쳐진 침대가 전부였다.

창문가로 걸어간 쥬다스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네 살던 곳은 다시 보아도 황량하구나.”

“전하, 혹 하명하셨습니까?”

“아니다. 그저 혼잣말을 한 것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손을 내저은 그는 하인들이 세족탕(발을 씻는 용도의 작은 욕조)을 날라 오는 걸 보며 다시금 주변을 훑었다.

‘마치 모종의 이유에서 가구를 전부 치워 버린 느낌이야.’

주인이 특별히 내린 명이 아닌 이상에야 나올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 침대 맡에 걸린 초상화 한 장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텅 비어 있는 방에 존재하는 유일한 장식이었다. 그는 침대로 다가가 초상화를 집어 들었다.

겨우 손바닥 두 개 합쳐 놓은 정도 되는 작은 크기의 흑백 초상화에는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린 젊은 여성이 그려져 있었다.

이를 본 순간 그는 ‘쥬다스’의 꿈속에서 뺨에 손찌검하던 여성과 동일인임을 알았다.

‘이 아이의 어머니.’

그는 내심 자신의 가정이 틀리기를 바랐다.

꿈에서 본 여인의 표정은 그야말로 실망과 경멸 그 자체였다. 그런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이가 어미라면 그건 황자에게 있어 너무나도 불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어깨에 매달린 유니가 배꼼 초상화를 내려다보며 정보를 알려주었다.

「아, 맞아. 그게 지금 네 육신을 낳아준 생모의 그림이야.」

“음…….”

안타까움이 실린 침음이 잇새로 새어나왔다.

‘한데 어찌 이리도 닮은 구석이 없을꼬.’

그랬다. 쥬다스와 그의 모친은 서로 전혀 닮지 않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간혹 부모 양친을 모두 닮지 않은 생김새로 태어나는 아이도 있다 하니 그나마 부계의 혈통을 빼다 박은 쥬다스는 다행인 편이었다.

하지만 초상화만 놓고 본다면 두 사람이 모자관계라는 걸 아무도 연상하지 못할 정도였다.

털끝 하나조차 비슷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이름은 하윤 리. 자식은 1황자 하나 낳았고, 먼 타국에서 동맹혼으로 바쳐지다시피 한 왕녀였다나 봐. 당시엔 망해가는 나라였다는데 종속국이 된 후로 루바르잔 제국의 원조를 받아 지금은 조금씩 일어나는 중.」

유니는 녹색 기운을 품은 바람을 양손으로 이리저리 공 굴리듯 굴리며 설명을 이었다.

「떠밀려 한 결혼치곤 황제와 사이도 좋았대. 오히려 따지자면 황제 쪽에서 황후를 귀히 여겨 자주 찾았다고는 하는데.」

「우웅? 그럼 지금은 사이가 나쁘다요?」

「죽었어, 5년 전에.」

그 말을 들은 쥬다스는 초상화를 본래 자리에 걸어두었다. 꽃같이 미소 짓고 있는 어미, 하윤이 보였다.

“……그래, 이미 떠났구나.”

그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그레트’를 낳은 부모도 어쩌면 그를 버린 게 아니라 죽어 만나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버려서 떠났든 죽음으로 떠났든 간에 곁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같았다.

그가 내려놓은 초상화 액자를 곁에 있던 시종이 깨끗한 천으로 조심스레 닦아 정돈했다. 그리곤 쥬다스를 향해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전하, 말씀드리기 황송하오나 참으로 많이 성장하셨습니다. 그 힘들다던 루바흐에서 풍파를 이겨내고 훌륭히 자라주시다니, 이를 보신다면 전 황후 마마께서도…….”

그는 쥬다스가 아주 어릴 적부터 말동무로 붙여진 시종이었다.

감개무량한 마음에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시종은 스스로 주제넘었다는 생각에 헛 하고 말을 멈추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지난 화 댓글 읽다가, 이그레트 어원은 아니지만 마가레트도 이미지가 정말 비슷하네요. 뭔가 뽀송뽀송한 게... 마가렛트,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제가 직접 한 번 먹어보겠습...쿨럭.

그리고 오늘 입대하신 독자님도 계시던데, 몸 건강히!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기, 기다리겠습니다!(?)

또, 2016년 수능세대이신 독자님..... ....아마 수능치실 때 즈음엔 1부완결찍고 이그레트2부나 차기작으로 만나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ㅎ 그때도 보러 와주실 거죠? 아니, 꼭 와주세요...ㅠㅠ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오늘도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따뜻한 응원에 기운 얻고 하루를 보냅니다.ㅎ 감사합니다!

* 디스이즈님과 으규귱님께서 팬아트를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헉...! 정말 감사드립니다. 두고두고 간직하겠습니다.ㅠㅠ(혼자 보기 아까워서 공지란에 올려두었습니다.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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