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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재회
“죄송합니다. 건방이 지나쳤…….”
“네가 그리 보았다면 그런 것이겠지. 잘못하지 않은 일에는 사과하지 말거라.”
기억에는 없어도 쥬다스는 시종이 왜 이리 유독 살갑게 구는지 알고 있었다.
황족을 모시는 시종은 귀족가에서 특별히 엄선되어 그 곁을 지키도록 되어 있다.
어린아이 때부터 수발을 들며 그가 처한 상황을 전부 지켜봐 온 저 시종이야말로 그의 변화를 누구보다 기뻐하고 있을 테였다.
쥬다스는 정령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름을 그대로 불러주었다.
“로한.”
척박한 황성에서 1황자의 유일한 아군으로 끝까지 자리를 지켜온 시종 로한 갈로티아.
주인이 자리를 비운 동안 청년으로 자라난 충성스러운 시종은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액자로부터 관심을 거둔 쥬다스는 발을 씻고 제대로 복장을 갈아입었다.
이 몸으로 눈을 뜬 이후 죽 신분을 증명하던 루바흐의 교복 대신 새하얀 바탕에 금실을 덧댄 황실 예복을 걸쳤다.
미리 그 체형에 맞춰 준비해 둔 예복은 통이 넓고 살짝 늘어지는 길이였다.
소매가 넓어 팔이 가려지며 걸을 때마다 옷자락이 펄럭였지만 움직임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그 위로 포탈 관리실에서 받은 케이프를 두르고 서자 그야말로 제국의 황자다운 고귀한 태가 났다.
복장 정돈을 마친 그가 응접실로 돌아오자 일행은 일어서서 그를 반겼다.
1황자의 신분으로 황궁에 귀환한 이는 쥬다스뿐이다. 나머지 일행은 루바흐 학생 신분으로 방문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교복 차림이었다.
귀한 황족이 거하는 궁궐에서는 모든 방문자가 발을 깨끗이 하는 예법이 있었기 때문에 다들 그사이 세족을 마친 상태였다.
“잘 어울리십니다, 전하.”
의복이 바뀐 쥬다스를 보고 가장 빠르게 알맞은 태도를 취한 건 마르젠이었다.
학우가 아닌 신하의 자세로 고개를 숙이는 그를 따라 다른 이들도 공손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마르젠. 다들 편히 자리하려무나.”
그들은 원탁에 둥글게 둘러앉았다.
마침 시간이 시간이었으므로 하녀들이 오찬을 준비했다.
은식기에 담긴 송아지 비프와 귀한 버섯을 넣고 끓인 크림스프 등이 차례로 상에 올랐다.
쥬다스는 능숙하게 예법에 따른 식사를 진행했다.
출신은 평민이었으나 전대 황제가 작위를 내려주고자 욕심냈을 정도로 거대한 힘을 가졌던 그에게 정찬을 권하는 이는 많았다.
과거 귀족식 예법을 배워둔 게 이제와 다시 유용하게 쓰인 셈이다.
식사를 마친 후 뜨거운 차를 앞에 두고서도 아이들은 침묵을 지켰다.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대귀족답게 불필요한 말을 배제하느라 조용히 있었고, 마르젠과 아벨은 눈치를 살피는 쪽이었다.
그리고 바이칼은 황자다운 태가 나는 쥬다스에게 적응하지 못해 뻘쭘하게 앉아 있는 상태였다.
결국 쥬다스가 난감한 미소를 매달고 침묵을 깨뜨렸다.
“혹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느냐?”
“……솔직히 많긴 합니다만.”
찻잔에는 손도 안 댄 바이칼이 직설적으로 되물었다.
“기회를 주셨으니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전하께선 왜 힘을 숨기고 계시는 겁니까?”
지난번 루바흐에서 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그리고 이번 투르케 사막에서 이루어진 사건도 함께 연루되어 있었다.
사실 바이칼뿐 아니라 여기 모인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그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최고의 혈통을 타고 태어나 최고의 힘을 가졌다면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서 모든 걸 손에 쥐고 세상을 호령할 수 있다.
그런데 이 12살 난 소년은 왜 그를 바로 쓰지 않고 모욕과 멸시를 견뎌내기만 했는가.
꼭 대답을 듣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 찬 녹안을 마주본 쥬다스가 가감 없이 속내를 이야기했다.
“내게 힘이 있다는 걸 밖으로 내보이면 어찌 될 것 같으냐?”
“그야 당연히, 모두가 존경하겠지요. 위치에 걸맞은 강한 힘을 가지고 계시니 마땅히 받아야 할 충성과 경애를 바칠 것입니다. ……아, 이건 그동안 걸맞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라.”
황급히 부정해 봤지만 바이칼은 그간 아닌 게 아니라 황자가 제 자리에 걸맞지 않다고 여겼다.
비단 바이칼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제국에는 수많은 인재가 존재했고 루바흐에서 양성하는 귀족 자제뿐 아니라 평민 중에서도 걸출한 재능을 보이는 인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제국에 고개 숙인 속국만 해도 사방에 늘어서 있었으며 이를 제어하기 위해 황실에선 최고의 인재를 고르고 골라 수많은 부서와 관리 집단을 구성해 냈다.
그러므로 제국 정상에 설 군주에게는 정치, 외교, 경제, 이능 그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어중간한 머리와 힘만으로는 도리어 뛰어난 인재들에게 잡혀 장기 말로 이용될 뿐이다.
하물며 변화하기 이전의 백로황자는 그야말로 조롱의 대상일 뿐이었다.
장기 말로도 써먹을 수 없는 최악, 최약의 패.
이를 확실히 뒤집으려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만으로는 부족했다.
바이칼은 그리 생각했다.
눈앞의 황자에겐 모든 이의 경배를 받을 수 있을 거대한 힘이 숨겨져 있다.
그것만 제대로 내보인다면 그 누구도 그의 앞에서 감히 이빨을 드러낼 수 없을 테였다.
그리고 쥬다스는 그들의 그런 생각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래, 강한 힘을 두려워하여 존경하고 경애하겠지. 하나 두려움으로 얻어진 자리가 과연 얼마나 갈까.”
“그건!”
“남들 위에 선다는 건 그만큼 많은 걸 짓밟는다는 뜻이란다.”
그리고 밟힌 사람들은 조용히 칼을 간다. 증오로 벼른 날카로운 칼을 꺼내 결정적인 순간 등을 노린다.
경험으로 얻은 지식은 달리는 말의 속도를 늦추듯 그에게 제동을 걸었다.
“하나 숨는 데에 급급해서 더 중요한 걸 놓치고 싶진 않구나. 내 힘이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않고 사용할 게다. 다만.”
파앗!
쥬다스가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자, 그 위로 황토색의 작은 정령이 실체화되었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허용 범위 내에서 말이다.”
「실체화다요! 우왕!」
드디어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된 토니가 잔뜩 들떠 테이블 위를 날아다녔다.
바람, 물과 더불어 대놓고 땅의 정령을 공개해 버린 쥬다스의 과감한 선택에 에단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뭔가 달라지셨다.’
에단이 알고 있던 1황자는 늘 방관하는 자세였다.
힘이 있어도 이를 사용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서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느낌이 강했다.
그 결과 겪지 않아도 될 상황을 몇 번이나 마주했다.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힘을 드러내긴 하였지만 그뿐이었다.
때문에 에단은 황자가 보여주는 적극성에 여러모로 긍정적이었다.
“……이 아이는 땅의 정령인가요?”
반면 크리스티나는 그의 이능에 대해 크게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어차피 그녀가 취할 태도에는 변동이 없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티나는 한 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시원스레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저 찻잔에 내려앉아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는 토니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낄 뿐이었다.
토니는 헤에 고개를 기울이며 감상을 표했다.
「색깔 특이하다요.」
「……여기 너만큼 특이한 애가 또 있을까.」
「에엥, 그치만 인간이 이런 색깔을 타고난 건 처음 본다요. 막 반짝반짝하다요!」
유니가 턱을 괴고 딴죽을 걸었지만 토니는 아랑곳 않고 방실방실 웃었다.
빛나는 걸 좋아하는 땅의 정령은 크리스티나의 머리색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잘 알아봤구나. 토니라 한단다.”
“‘토니’…….”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야.”
정확히는 그녀의 바다 빛깔 머리카락이었지만.
쥬다스의 친절한 설명을 들은 크리스티나가 살짝 손바닥을 내밀자 토니는 그 위로 가볍게 안착했다.
실체화를 한 탓에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보들보들한 감촉이 느껴졌다.
크리스티나는 처음으로 만져 보는 정령을 신기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정령이란 건…….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네요.”
정령술의 자질은 매우 희귀하여 보통 사람들은 한평생 살며 정령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귀족이라 해도 가문에서 비싼 돈을 들여 정령술사를 고용하거나 특별히 주변에 술사인 친구가 있는 게 아닌 이상에는 정령을 구경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쥬다스처럼 3속성의 정령과 계약하여 모두 실체화할 만한 재능을 가진 술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가뭄에 콩 나듯 듀얼 속성을 다루는 이들이 있었고, 트리플부터는 잘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만약 자질을 보인다면 평민이라 해도 당장 귀족 작위를 하사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정령이라 하면 친근한 이미지보다는 인간을 초월하는 신령한 힘 정도로 인식했다.
크리스티나를 비롯해 이 자리에 모인 아이들 역시 모두 이와 다를 바 없었다.
“다들 이렇게 자아가 있나요?”
“물론이란다. 감정도 풍부하고 이성적인 판단도 뛰어나지. 다만 계약한 술사에 따라 그 성질이 조금씩 변한다고는 하더구나. 술사가 이름을 부여하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을 무의식중에 투영한다 하니.”
“……같은 정령이라도 계약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씀이십니까?”
에단의 질문에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지금 이 아이들이 여기서 취하고 있는 형태도 내 무의식이 염원한 모습일 게야.”
그와 계약한 정령들은 주로 어린아이와 동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나마 제일 커다란 카니도 따지고 보면 십 대 후반 소녀의 외형이었다.
「그치, 쬐끄만 모습도 오래 있다 보니 편안하긴 한데.」
「후후. 귀엽잖아요? 이그레트가 원한다면야 천년만년 이대로 지낼 수 있답니다.」
「……보통 인간은 천년만년 못살거든?」
유니는 행복한 얼굴로 볼을 감싸는 카니를 떨떠름하게 쳐다보았다.
어느 틈엔가 크리스티나의 어깨 위로 날아가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콕콕 찔러보고 있던 토니도 손을 반짝 들며 외쳤다.
「그래도 가끔은 본체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요!」
「토니 넌 어차피 본체로 돌아가서도 울보찡찡이일 거면서.」
「……?!」
결국 유니의 태클에 의해 빼앵 울어 젖히는 토니를 보며 푸른 늑대는 한숨과 함께 바닥에 주둥이를 괴었다. 바람과 땅의 다툼이란 그저 평범한 일상의 일부였다.
“거참, 이제 더 놀랄 것도 없습니다.”
실체화된 정령들을 훑어본 바이칼이 어깨를 으쓱였다.
“언제 전하께서 뜬금없이 자연계 정령 4속성을 전부 다룬다고 해도 이젠 안 놀랄 자신 있거든요. 사실은 대현자 이그레트가 이미 죽었고, 전하께서 그 환생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지경입니다.”
“…….”
“……농담한 건데 표정들이 왜.”
“그가 아무리 대현자라 한들 평민이지 않나. 어린애 티를 내지 않으려면 입방정부터 조심하는 게 좋겠군.”
본의 아니게 정곡을 찔린 쥬다스 대신 크리스티나가 일침을 놓았다.
크리스티나와 바이칼은 둘 다 14살로 같은 나이였으나 그는 거기에 대해서 반박하는 대신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시종 로한이 쥬다스의 곁에 다가가 전언을 전달했다.
“폐하께서 이르기를 내일 만찬을 함께 들고자 권하셨습니다.”
오늘 당장 황제와의 대면은 어렵다는 말이었다.
제국을 통치하는 군주가 황태자로 정해진 것도 아닌 황자와의 면담을 최우선시 할 리는 없음을 알고 있었던 쥬다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는 대답을 들었음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로한을 돌아보았다.
“음? 더 전할 말이 있느냐?”
“……그것이, 실은.”
로한은 해야 할 말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본래 백치라 보아도 무방할 만큼 말이 없던 1황자였다. 심지어 어릴 때부터 곁을 지켰던 시종 로한이 그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불린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런 만큼 로한은 제 주인의 성향이나 포용 범위에 대해 무지했다.
세상만사 벽을 치고 죽은 듯이 살았던 예전과 달리 타인의 접근을 흔쾌히 허용할지, 또 어디까지 포용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이 없으니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시종은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상황을 전달했다.
“3황자께서 대면을 요청하였습니다.”
정령들을 구경하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현재 황자들 간에는 이렇다 할 접점이 딱히 없었다.
루바르잔 황권을 존속시킬 3명의 황자는 각기 어머니가 달랐다.
1황자인 쥬다스는 5년 전 사망한 전 황후 하윤이 낳은 자식이었고, 2황자 카이제르는 정부 소생이었다.
그리고 형제 중 마지막인 세이지는 태어날 당시 제국의 지체 높은 귀족 출신의 황비였으며 현재는 황후로 책봉된 어미에게서 난 3황자였다.
황제는 두 부인과 정부에게서 난 아들을 전부 자식으로 인정했다.
그 말은 누가 황태자위에 올라 후계로 인정받을지 알 수 없다는 뜻과도 같았다.
태어난 나이와 외향은 1황자가 우세했지만 그의 모계는 타국 출신이었다.
반면 어린 나이부터 명석함과 뛰어난 이능으로 명성을 떨친 2황자 카이제르, 그리고 제국 후작가 출신으로 인심을 얻고 든든한 외척을 지닌 현 황후 밑에서 자란 3황자 세이지.
겉으로 봐서는 영 결과를 알 수 없는 판세였다.
그런 와중에 부름을 받고 잠시 귀가한 1황자를 찾아온 3황자라니, 쥬다스를 따라온 아이들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바이칼 코난설.
(물론 농담일 뿐입니다ㅎ)
아참, 그리고 지난 화 후기에서 말씀드린 내년 계획은... 1부완결은 내년 여름 안으로 낼 생각이고, 수능시즌에는 아마 2부(or차기작)를 연재할 것 같다는 뜻이었습니다.ㅎ
그리고 Sharm님께서 팬아트를!! 보내주셨습니다.ㅠㅠ 헉 저 요즘 이렇게 계속 기뻐도 되나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3번째 팬아트를 받고 나니 저도 독자님들께 뭔가 해드려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약소하지만 이번 주말(토요일이나 일요일 하루) +3연참을 할 생각입니다. 부담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그것뿐이네요.ㅎ 허허허(...)
(참, 그림은 이그레트+쥬다스가 같이 있는 장면입니다. 공지에 추가해두었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사랑과 응원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