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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시험
유령이 스르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다리 없는 유령이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크리스티나는 미동 없이 서늘한 기세를 유지했다.
“할 말이 있어 여길 찾아온 것이냐 물었다.”
유령은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명백한 표시에 아이들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흔들림 없이 유령을 문책했다.
“하면, 너는 누구지? 이름을 대라.”
「나는 이름이 없구마.」
“……!”
심지어 입을 열어 대답까지 한 유령의 작태에 이번에는 질문한 크리스티나마저 살짝 움찔했다.
유령의 목소리는 산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곧고 청명했다.
그런 와중에도 유령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기세가 마치 며칠째 지속되는 장마와도 같았다.
그때까지 유령을 겨누고 있던 에단이 도로 검을 갈무리했다. 유령이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으리라는 판단이었다.
그 판단대로 유령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미묘한 존재였다.
「나는 여기 호수에서 태어났구마. 찾아온 건 내가 아니라 너희구마.」
유령은 스르르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시무룩해 보이는 기색에 떨고 있던 바이칼도 슬쩍 고개를 내밀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왜 울고 있었던 건데?”
「…….」
유령은 입을 다물었다.
“뭐 원통한 일이 있었나?”
“기, 기분 나쁜 일이라도?”
“근데 그걸 왜 하필 내 뒤에서.”
차례로 물어오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쳐다본 유령은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저 대신 울어줄 뿐이구마.」
“뭐?”
「누구나 울고 싶은 마음이 있구마. 내 할 일은 그거구마.」
크응, 훌쩍.
유령은 쉬지 않고 눈물 콧물을 뽑아냈다. 그런 그를 향해 쥬다스가 태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자는 사람들의 소망과 원념 속에서 태어난 존재로 보이는구나. 정령이라 하기엔 그 힘이 미비하고 계약자 없이도 하고자 하는 목적이 뚜렷하니. 그저 유령이라 보아도 틀림은 없으렷다.”
“그냥 유령 말고 정령이라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바이칼의 우울한 항변에 쥬다스는 작게 웃으며 이를 수긍했다.
“그래, 눈물의 정령쯤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
“눈물의 정령?”
“사람들의 애환과 간절한 마음을 대신 담아 울어주는 게 저 아이의 역할이라 하니. 슬픔과 눈물, 그 자체가 계약자인 셈이다.”
그 설명에 아이들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눈물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계약자가 있는 정령만 보다 자연체이면서도 사명을 품고 태어나 흡사 유령처럼 살아가는 존재를 보게 되니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정령이 쥬다스를 향해 스르르 다가갔다.
「당신은 아주 맑구마. 울고 싶은 마음도 느껴지지 않고? 전체적으로 투명에 가깝구마.」
인간의 슬픈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에게 있어 생소한 일이었다.
차갑고 도도해 보이는 크리스티나조차 그 안에 깃든 슬픔과 눈물이 보였다. 하지만 쥬다스의 안에서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여기에.」
정령의 푸르스름한 손길이 쥬다스의 이마를 짚었다.
「새로운 색깔이 물들고 있구마. 영체인 내 입장에서 볼 때는 별로 좋아보이진 않지만.」
후웅.
성난 녹색 바람이 그의 손을 탁 쳐 냈다. 정령왕들의 명백한 거부의사에 눈물의 정령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무, 무섭구마. 훌쩍.」
“이런, 무섭게 해서 미안하구나.”
눈물의 정령은 훌쩍이며 곧장 호수로 걸어 들어갔다. 강아지 제 집 들어가듯 편안해 보이는 행동에 모두 멍하니 그를 지켜보았다.
“그렇지. 내 너에게 이름을 하나 지어주어도 괜찮겠는가?”
「이름?」
“너는 계약자가 따로 필요 없으니 이름을 받을 일도 없겠지. 그러나 다시 너를 찾을 때 이름을 모르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
정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리마’. 사람의 닫힌 마음을 대신하여 눈물을 흘려주는 고마운 정령이니, 라그리마라 함이 어떠할까.”
「그거 좋구마. ……당신의 이름은?」
“쥬다스라 한단다.”
「쥬다스…….」
눈물의 정령 라그리마는 스르륵 물안개 속으로 사라지며 울음소리와 함께 한 가지 당부를 남겼다.
「조심해야 하겠구마, ‘쥬다스’. 요 근래 죽음의 기운이 강하게 몰려들고 있으니.」
푸르스름하게 빛나던 정령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날은 라그리마를 만났던 탓인지 사령을 만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쥬다스를 제외한 전원은 진이 빠진 채 터덜터덜 돌아갔다.
남은 3일간 시험은 무탈하게 진행되었고, 드디어 한 주간의 시험이 마침표를 찍었다.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하늘에 구멍 뚫린 듯 퍼붓던 빗줄기도 그쳤다.
여기저기 고인 물웅덩이와 습한 공기는 여전했지만 그동안 하늘을 뒤덮었던 구름이 걷혀 햇볕이 비추기 시작했다.
그사이 괴담과 관련된 사건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라그리마의 경고와 더불어 지난번 마주쳤던 얼굴 없는 사령을 떠올리면 아무 일이 없는 게 더욱 수상했다.
쥬다스는 의아함을 품고 마지막 시험일과를 정리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학기를 종강하며 방학을 알리는 선언식뿐이었다. 그러고 나면 조만간 다시 황궁으로 가서 황태자 즉위식을 치르게 된다.
‘즉위인가.’
쥬다스는 숙소로 돌아가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날씨는 맑아졌지만 그간 쏟아진 폭우로 인해 가로등이며 벤치 할 것 없이 전부 빗물에 젖어 있었다.
그는 이를 개의치 않고 축축한 벤치에 털썩 앉았다.
“유니.”
「응?」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상대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면 직접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쥬다스는 바람의 힘을 끌어내 소망을 읊었다.
“‘프리드’의 위치를 찾아주련.”
화악.
강한 기운을 담은 바람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교정의 나무를 흔들고 사라진 녹색 바람을 멀뚱멀뚱 쳐다본 카니가 그의 팔에 매달리며 물었다.
「이그레트, 왜 황후가 아닌 프리드 그자를 찾아요?」
“왜 그런 것 같으냐?”
카니는 되려 물어오는 부드러운 금안을 마주 바라보았다.
「모르겠지만…… 난 그 망할 자식이 정말 싫은걸요.」
한 번 정령석에 조종당한 경험이 있는 카니는 혐오스런 눈빛을 드러냈다.
마른 가지에 붙은 불처럼 화륵 기세를 내뿜은 카니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준 쥬다스가 달래듯 대답했다.
“그 둘이 같은 속성이기에 찾는 거란다.”
「에엥, 인간도 속성이 있다요?」
토니가 불쑥 끼어들었다.
“있지. 성질은 다르나 같은 목적, 같은 사령술, 그리고 같은…….”
쥬다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과거에 만났던 동료들, 자신을 죽이려했던 사람들, 그리고 최근 다시 만나게 된 프리드.
무엇 하나 달라진 것 없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리고 아마도 황후 역시 그 끝에 맞닿아 있을 것이다.
쥬다스는 얌전히 적의 흉계를 기다리는 대신 그 매듭을 직접 밝혀내기로 했다.
‘달라진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
마냥 따뜻하지만은 않은 금색의 눈동자가 천천히 뜨여졌다.
오래 지나지 않아 떠났던 바람이 돌아왔다. 바람이 싣고 온 정보를 취합한 유니가 결론부터 입에 담았다.
「찾았어, 이그레트.」
그 말에 쥬다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뜻한 미풍에 반팔 와이셔츠 자락이 사락거렸다.
「그치만 그 ‘프리드’란 자, 자기 위치를 숨길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 일부러 보란 듯이 기운을 흘리고 있었어.」
“……그래.”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직접 찾아가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니 무언가 대비를 하리란 예측은 하고 있었다.
쥬다스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자 도리어 정령들이 의구심을 드러냈다.
「찾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찾게 될 줄은 몰랐어. 어딘가 꽁꽁 숨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일부러 기운을 흘렸다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다는 뜻일까요?」
「그럼 함정 아니다요?」
떠들썩한 다른 정령들 틈에서 루니만이 묵묵히 침묵을 지킨 채 쥬다스의 곁에 섰다.
계약자의 의지를 제일 충실히 따르고자 하는 물의 왕다운 태도였다.
충성스런 푸른 늑대의 머리를 톡톡 다독여 준 쥬다스의 주변으로 한층 거센 바람이 몰려들었다.
「지금 당장 가보려고?」
“부탁한다.”
그가 단호히 뜻을 밝히자 주변을 맴돌던 바람이 돌풍을 일으키며 회오리쳤다.
가고자하는 목적지까지 단숨에 술사를 옮겨주는 ‘바람의 인도’가 발동된 것이다.
바람에 실린 물기가 원을 그리며 파장을 일으켰다. 그 중심에 서 있던 쥬다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시험이 끝나 한산한 교정에선 아무도 그가 사라진 걸 본 사람이 없었다.
그저 그가 앉았던 벤치만이 빳빳하게 말라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바람의 인도에 따라 쥬다스가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어느 산꼭대기였다.
높이는 구름에 닿을 정도로 높았으며 나무는 없고 울퉁불퉁한 바위들로만 그 웅장한 자태를 구성한 바위산이었다.
바위산 주변은 겹겹이 또 다른 바위산이 둘러싼 형태였다. 나무는 없었지만 자잘한 풀이나 작은 꽃 등이 드문드문 산허리를 장식했다.
산의 꼭대기에는 마르고 볼품없는 가시나무 하나만 구불구불 자라고 있었다.
그 한 발짝 앞에는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과 부서질 듯 버스럭대는 바윗돌뿐이었다.
쥬다스는 주변을 둘러보곤 가시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그 밑에 새파란 하늘을 이불 삼아 드러누워 있던 한 사내가 느긋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여, 이제 오시나. 이그레트 님.”
“…….”
마치 오랜 친우를 기다린 한량처럼 여유로운 인사말이었다.
쥬다스는 마주 인사하는 대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 황실에 손을 댄 적이 있느냐.”
“‘황실’……?”
쥬다스의 말을 따라 읊조린 프리드가 실소하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큭, 하하하하! 무슨 소리지, 이그레트 님. 이거 서운해지려고 하는데.”
분명 얼음창에 꿰뚫려 바스러진 육체였으나 지금 그는 상처 하나 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했다.
검푸른 머리카락과 이에 대비되는 붉은 안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손을 댄 게 아니야. 그쪽에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든 게지.”
먼저 접촉하지 않았을 뿐 결국 연관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프리드는 소원을 이루어준 램프의 요정처럼 만족스레 턱을 괴었다.
“‘타인의 불행’을 바라는 인간은 넘치고 또 넘쳐서. 내가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말이야.”
“…….”
“결국 제 스스로 불러내게 된다는 이야기다. 사령이란 것을.”
스르륵.
그의 그림자에서부터 검은 기류를 뿜어내는 사령이 기어 나왔다. 매혹적인 여인의 생김새를 한 ‘릴리스’였다.
릴리스는 자신의 계약자에게 매달리다시피 안겨 킥킥거렸다.
쥬다스는 그 사령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장 프리드의 말을 확인했다.
“하면 루바르잔의 황후가 직접 사령술에 손을 대었단 말이냐.”
“질문은 하나씩만 하자고. 페어플레이, 질서. 그런 거 좋아하시잖아?”
그 말과 함께 프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를 신호 삼아 바위산이 순간적으로 흔들거렸다.
투두둑.
단순한 바윗덩어리로 보였던 것들이 기지개를 켜듯 서서히 몸을 세웠다.
가시나무 아래 느긋하게 앉아 있는 프리드의 뒤로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사령들이 병사들처럼 몰려들었다.
갑작스런 위협에도 쥬다스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후웅.
「하여간 저것들은 볼 때마다 기분 나쁘다니까.」
「웅웅, 맞다요.」
이미 쥬다스의 사방은 정령들의 가호로 가득한 상태였다.
프리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묻지. 이그레트 님, 왜 이제 와서 인간의 삶에 욕심내는 거지.”
“이 역시 내 삶이기 때문이야.”
“더러운 권력의 정점에서 피를 보는 것이? 이거야 원, 완전히 난센스로군.”
금안과 적안이 서로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보았다. 이내 한쪽이 비소를 띠고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좀 더 욕심내보는 게 어때. 기왕 후회했다면, 그래서 변할 거라면. 구역질나는 세상을 전부 뒤집는 게 어떠하냔 말이야. 당신이라면 힘들이지 않고 가능한 일 아니던가? 그저 바라기만 한다면.”
이미 쥬다스의 답을 알고 있는 프리드였다. 그래서 그는 권유가 아니라 잔뜩 비꼰 어조로 말문을 맺었다.
“군주가 아니라 신이 될 수도 있는 재목이 아닌가. 자연의 사랑을 받는 위선자여.”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참고로 콜은 마냥 순하고 주책없는 이미지는 아닙니다. 다만 과거의 자신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었던 스승이었기에 무한한 존경을 품고 있을 뿐입니다.ㅎ 힘든 시기를 보냈던 인물인 만큼 적을 만나면 제법 사납습니다.
으음. 동물에 비유하자면 새끼 때 키워준 주인을 잊지 않는 백구랄까...(?)
개, 개같은 캐릭터네요. 쿨럭.
독자님들께서 주시는 코멘트는 하나하나 정독하고 있습니다. 답변을 드리고 싶은 메세지도 많았는데, 괜히 여러 의미로 폐가 될까봐서... ...대신 문득 뜬금없이 쪽지를 받으신다면 이를 애교(?)라 생각해주시고 읽어주시면 됩니다.ㅎ
사족으로 저는... 2번까진 지켜봅니다. 쌍욕이든 악플이든 2번까지는 참습니다. 물론 이것도 도를 지나칠 경우 바로 블랙(댓글차단)하기도 하는데, 어지간하면 일단 두고 보려는 편입니다. 그리고 3번째로 악플을 등록하실 경우엔 참지 않고 블랙을 드립니다.
...음, 바른말 고운말을 씁시다...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이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 '이그레트'는 종이책도 함께 나옵니다. 다만 그 시기가 좀 늦을 수 있다고 하네요.ㄷㄷ 이것도 언제 나올지 확실한 일정을 듣지 못했습니다.ㅠㅠ 책관련 답변을 드리려고 보니 어째 저도 아는 게 없는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