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73화 (7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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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시험

「저게 근데!」

휘오오.

산 정상에서 몰아치는 바람은 그 기세가 굉장했다.

바위마저 들썩이는 바람의 분노에 프리드의 앞을 막아선 사령들이 검은 기운을 흩뿌리며 대응했다.

두 기운이 막 충돌하려는 찰나 쥬다스가 손을 들어 바람을 저지했다.

“아니. 내가 하려는 일은 그런 게 아니야, 프리드.”

“흐음?”

“군주가 되는 게 목표가 아니라, 목표를 위해 군주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지.”

비슷한 말 같지만 그 끝이 전혀 달랐다. 답을 들은 프리드는 잠시 침묵했다.

‘이그레트’의 힘은 언제 보아도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지금 당장만 하더라도 그가 다루는 자연계 4속성 힘은 이 바위산을 단숨에 허물고 다시 세울 수도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자연을 통솔한다.

그 힘을 가지고도 늘 초탈하며 매사에 욕심이 없던 강자에게 비로소 욕심이란 게 생겼다.

그가 가진 강대한 힘을 노리고 있던 프리드였으니 이 사실은 그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욕심이 생겼다는 건 즉 이해관계가 생긴다는 것, 바라는 것을 위해 싸우고 고개를 숙이기도 하며 결국 취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으로서 꼭 필요한 원동력이며 동시에.

‘조종하거나 파멸시킬 수도 있지.’

당근을 쫓는 나귀나 불을 향해 뛰어드는 나방, 혹은 먹이를 얻기 위해 주인에게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욕심이란 인간을 움직인다.

이는 사령술에 손을 댄 황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 그렇다면 오늘 나를 찾아온 이유는.’

프리드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나를 이용하겠다는 발상은 기특하군. 당신답지 않은데.”

“…….”

쥬다스는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쿠르릉.

돌연 지진이 일어나며 바위산이 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땅의 정령왕이 다루는 대지의 기운에 의해 바위들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바스러져 절벽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이 참, 또 괴롭힐 셈이야?」

프리드가 부리는 사령 릴리스의 입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등가죽을 뚫고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두 날개가 우득거리며 솟아올랐다.

「이번엔 안 돼. ‘왕’의 힘을 가진 건 너희뿐이 아니라구?」

검은 기운이 부서지는 바위들을 감쌌다. 그러자 바위에서도 그녀와 같은 뼈 날개가 솟구쳐 오르더니 눈이 세 개 달린 까마귀들로 화해 날아올랐다.

릴리스는 프리드를 꼬옥 끌어안은 채 사령을 끊임없이 불러냈다.

바위와 가시나무, 심지어 구름의 그림자를 타고 꾸역꾸역 사령들이 몰려들었다.

마치 하급 정령을 생성하고 다루는 정령왕의 힘과도 흡사했다.

이를 유심히 본 유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건, 설마?」

퍼엉!

잠깐 혼란스러운 눈으로 릴리스를 쳐다보던 유니는 근처에서 터진 폭발음에 황급히 쥬다스의 앞을 막아섰다.

녹색 바람이 방어막을 형성해 오염된 기운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아내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프리드는 즐거이 웃으며 쥬다스를 향해 마주 손을 들어 올렸다.

“자, 그럼 제대로 회포를 풀어보실까. 이그레트 님.”

무너지기 시작한 바위산 정상에서 정령과 사령의 힘이 뒤엉킨 전투가 시작되었다.

팟.

죽음의 기운이 응축된 검은 화살이 쥬다스의 지척을 스치고 지나가 폭발했다.

부서진 돌가루며 마른 낙엽 등이 매섭게 휘몰아쳤다.

굳은 땅이 갈라지고 화염이 치솟으며 다시 그 안에서 죽은 자들이 기어 나왔다.

뼈와 살 대신 마른 나무와 그림자로 구성된 몸뚱이에서는 피로 반죽된 죽은 흙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개미굴에 들끓는 개미 떼처럼 사령은 미친 듯이 날뛰었고 그들을 제압하는 자연의 힘 역시 냉혹하게 사방을 뒤덮었다.

흡사 지옥의 재림과도 같은 장면이었지만 이를 일으키는 두 사람은 재해의 한가운데에 서서 태연히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콰르르 무너지는 바위들에 힐끗 시선을 준 쥬다스가 땅의 힘을 부려 그것들을 한곳에 몰아 쌓았다.

그대로 떨어졌더라면 시야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산 밑에 존재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 산사태에 깔렸을 것이다.

적을 상대하면서도 무관한 이들이 상해를 입지 않도록 배려하는 여유에 프리드가 낮게 웃었다.

“여유로워 보이는군.”

자연을 거스르는 사령의 힘은 서로에게 천적이었다. 부서지고 토막 나는 사체와 더불어 생기를 빼앗긴 하급 정령들은 비실거리며 역소환되기 일쑤였다.

“하긴, 이 정도로 당신을 당황하게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

쥬다스는 당황하지는 않았어도 어느 정도 절망감은 느끼고 있었다.

젊은 날 만났던 친우의 모습 그대로 프리드는 무수한 사령을 부리고 있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사령의 수만 헤아려 보아도 저들을 부리기 위해 필요한 목숨값이 얼마나 무거울지 상상조차 힘들었다.

“사람을 죽여 얻은 힘으로 대관절 무엇을 하고 싶은 게냐.”

“글쎄……. 어떨 것 같나? 당신처럼 큰 힘을 손에 쥐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반드시 거창한 목표가 있어야만 사는 건 아니라고.”

가라앉은 금안을 즐겁게 바라보며 프리드가 제 속내를 이야기했다.

“나는 그저 매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야.”

단순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답을 내놓은 프리드는 이어서 손을 뻗어 검은 파장을 내뿜었다.

콰앙.

다시금 폭발이 일었다.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으며 사령의 기운을 삼켰다.

검은 연기와 함께 녹아내린 기운에 프리드가 쯧 혀를 차는 순간이었다.

우르릉.

천둥이 울었다.

청명하던 하늘에 어느 틈엔가 시꺼먼 먹구름이 뒤덮고 있었다. 물의 정령왕이 불러온 우기였다.

번쩍 사위가 새하얗게 물들며 벼락이 꽂혔다. 물과 바람이 합쳐져 위력을 뿜어낸 동조술, ‘낙뢰’였다.

‘……과연, 당신도 진심이란 뜻이로군.’

무릎까지 찢어진 로브 자락이 지직거리는 스파크와 함께 펄럭였다.

릴리스가 곁에서 비호하고 있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낭패를 볼 뻔했다.

프리드는 찢어진 로브를 벗어 던지고 제대로 전투에 임했다.

로브 자락이 펄럭이며 바람에 날려 사라지자 로브 속에 감추어져 있던 흑색 제복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루바르잔 장교복과 흡사한 디자인이었는데, 정작 루바르잔의 군복은 아니었다.

그 어떤 나라도 정식 제복을 검은색으로 짓지는 않았다.

은장이 달린 검은 옷은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일반적으로 검은색은 죽음을 상징했다.

장례식에 입고 가는 상복이 주로 검은색인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격식과 위엄을 나타내는 색은 주로 하얀색이나 군청색 등 각 나라에서 중요시 여기는 색깔이었으므로 제복의 색으로 검은색을 쓰지 않았다.

사령술이 걸린 은장식과 붉은 술이 검은 제복에 달려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출전한 장교라도 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릴리스-”

쿠우우.

곁을 지키던 사령 릴리스가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그녀는 곧 젤리처럼 흐물흐물 녹아 거대한 형상을 이루어냈다.

릴리스의 본체는 다름 아닌 찢어진 가죽과 뼈로 이루어진 본 드래곤이었다.

죽은 드래곤의 시체에서 다시 태어난 사령이라 할지라도 지닌 힘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거대한 뼈 날개를 펄럭인 릴리스가 육중한 꼬리를 들어 쥬다스를 향해 휘둘렀다.

콰앙!

음산한 사령의 기운이 맴돌고 있는 본체였기에 쥬다스는 막기 보단 피하는 쪽을 택했다.

돌무더기가 우수수 떨어지는 꼬리를 들어 올린 릴리스가 이번엔 주둥이를 열어 브레스를 준비했다.

몰려드는 검은 기운을 보며 유니가 설마 하던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역시 저 애는…….」

콰과과과―

바위산을 통째로 얼리는 냉기가 몰아닥쳤다. 물의 왕인 루니가 다루는 힘과는 그 성질이 달랐다. 그저 차갑기만 한 냉기가 아니었다.

투르케 사막의 생명력과 모든 기운을 앗아가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얼음이었다.

순식간에 주변이 얼음 조각으로 뒤덮였다. 폐허 위를 감싼 얼음은 깔끔하게 모든 것을 그 안에 파묻었다.

그 안에서도 얼어붙지 않고 멀쩡히 서 있는 건 쥬다스가 유일했다.

냉기로 가득한 바위산에서 유일하게 생기로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을 보며 프리드가 허탈한 한숨을 흘렸다.

“좀 힘든 척이라도 해보시지 그래. 나름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기운 빠지는군.”

그러면서 그는 본 드래곤의 형체를 갖춘 릴리스를 어루만졌다.

그때, 유니가 쥬다스의 옷깃을 죽죽 잡아당겼다.

「이그레트, 저거.」

“……유니?”

의아함을 담은 금안을 향해 휙 고개를 들어 올리며 유니가 슬픈 눈으로 웅얼거렸다.

「정령이야, 원래.」

“…….”

「있지, 저 릴리스란 사령 말이야. 전부터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은 했었는데. 지금 보니 알 것 같아.」

쥬다스는 내렸던 시선을 도로 들어 프리드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뒤에 포효하는 거대한 본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정령이었어. 우리들과 같은, 아니, 좀 더 오래된 과거를 살아온. 그건 아마도.」

유니가 날개를 바르르 떨며 쥬다스의 소매에 매달렸다.

「……자연계의 정령왕 중 하나.」

유니의 말에 다른 정령들도 동조했다.

「익숙한 느낌이 든다요.」

「나도 본 적은 없지만 알 것 같아요.」

「…….」

크르렁.

푸른 늑대가 위협적으로 목을 울렸다.

정령들이 하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도 변한 분위기는 알아차린 프리드였다. 그는 피식 웃으며 릴리스의 등에 올라탔다.

“뭔가 알아차린 모양인데.”

“……사령이란 건, 정령이 타락해서 태어나는 존재인가.”

“자아가 있는 건 전부 변화 의지를 가지고 있지. 어찌 타락이라 단정 짓는 것인지 모르겠군.”

쿵!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날개를 펼친 릴리스를 향해 펄펄 끓어오른 물줄기가 내리꽂혔다. 냉기를 품은 사령인 릴리스는 화기에 취약했다.

검은 기운을 뿜어 물의 힘에 대응했지만 해일처럼 덮쳐 오는 불의 파도에 날개를 접고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공격은 봐줬다는 듯이 몰아닥치는 자연계 정령들의 힘에 프리드는 진땀을 흘리며 사령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정령들의 합공은 그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기다란 뱀처럼 주변을 휘감은 녹색 바람이 그를 옭아맸다.

물러서고자 했지만 사령의 기운과 함께 통째로 발을 묶는 강한 힘이 하나 더 있었다.

땅의 중력이었다.

땅에서 작용하는 중력과 주변을 감싼 바람에 옴짝달싹 못하게 된 프리드를 향해 타오르는 불로 만들어진 검이 작살처럼 꽂혔다.

콰득.

왼쪽 어깨를 뚫고 지나간 후끈한 일격에 팔이 뚝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구르는 팔을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던 프리드가 큭큭 실소를 터뜨렸다.

고통은 있었으나 어차피 제 것이 아닌 육신이었다. 재료만 충분하다면 팔 하나 떨어진 것쯤이야 사령술로 금방 복구가 가능했다.

“이젠 내가 질문할 차례지. 이그레트 님, 당신이 보았을 때 나는 악인인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여유롭게 물어오는 프리드를 보며 쥬다스는 차분히 대꾸했다.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글쎄. 민간 거리에 성행하는 살인, 강도, 죄인임을 알면서도 눈감아주는 법관, 뒷배를 두고 자신보다 약자를 마음껏 희롱하고 폭행, 강간하는 지배층……. 그리고 그들을 죽여 힘을 얻는 ‘나’.”

“…….”

“어느 쪽이 더 악한가?”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비웃은 프리드는 그대로 손을 뻗어 사령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주하라.”

쿠우우.

사령이 가진 힘은 물리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이 가진 영혼 깊숙이 숨겨진 부정적인 원념을 끄집어내 폭주하게 만드는 저주 또한 사령의 힘이다.

미리 그려놓았던 흑주술의 진이 그들이 밟고 있던 땅에 번쩍 빛나면서 나타났다.

찰나였지만 쥬다스의 정신에 접촉한 사령이 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끌어냈다.

‘이그레트 님.’

‘당신을 친우로 섬기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누가 손가락질 한다 해도 절대 등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친우로 여겼던 세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가까이 두고, 누구보다 믿었었던 셋이었기에 이는 마냥 고통스러운 기억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부드럽게 웃던 입가에 핏물이 튄 건 머지않아서였다.

‘……죽어주셔야겠습니다.’

기억 속 옛 동료들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웅웅 귓가를 맴돌았다.

그러나 정령왕을 다루는 이그레트의 정신력이 그 정도 저주에 쉬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사령은 더 깊게 침투하지 못하고 곧장 내면세계에서 쫓겨났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쿨럭. 지금 졸려서 완전 비몽사몽입니다. 혹 오탈자나 비문 발견하시면 살포시 옆구리를 쿡 찔러주시면 됩니...다.ㄷㄷ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애정과 응원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특히 지난 화 코멘트에서는 유독 기운을 많이 얻었습니다.ㅠㅠ 꾸벅!)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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