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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시험
고오오오.
본 드래곤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프리드가 정령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엔 충분했다.
쥬다스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어버린 적을 뒤쫓지 않았다.
어차피 프리드의 본거지를 찾아내어 다른 그릇으로 영혼을 옮기지 못하게 완벽히 ‘본체’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에야 지금 그를 죽이는 건 어느 정도 타격은 입힐 수 있겠지만 큰 소용이 없었다.
죽여도 죽지 않는 상대에게 굳이 힘들여 찾아온 목적이라면 이미 달성했다.
쥬다스는 얼어붙은 바위 위에 무릎 꿇고 앉아 음습한 냉기를 몰아내었다.
갈라졌던 바위가 다시 붙고 죽었던 초목이 재생되었으며 냉기가 가득했던 땅에 여름의 온기가 다시금 감돌았다.
완벽히 되살아난 자연 풍경을 두고 그는 남은 한 가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바닥에 떨어진 프리드의 팔을 중심으로 검은 핏자국이 흘러나와 짙게 번져 있었다.
* * *
폭풍 같던 시험이 끝난 루바흐에는 평화가 감돌고 있었다.
시험 성적으로 인해 눈물짓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것도 며칠뿐, 이제 곧 학기를 마치고 ‘하계-자율학습기’, 즉 여름방학에 돌입한다.
루바흐의 방학은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자유 시간이다. 하지만 자유라고 해서 그들이 집에 돌아가 원하는 만큼 놀 수 있는 건 아니다.
학생들이 전원 귀족 이상의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방학 중에는 향후 그들이 맡아야 할 귀족으로서의 소임이나 가훈, 밀린 사교나 예절 등을 교육받는다.
또한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가 아니라면 목표로 하는 직업이 무엇인가에 따라 교육 내용은 천차만별로 차이가 난다.
집에 돌아가기에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엔 아예 학교에 남아 있기도 했다.
학교에선 방학 중에도 계절 학기와 각종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학생들이 배움에 정진할 수 있도록 터를 마련해 주었다.
어디에서 어떤 교육을 받을지에 대한 모든 선택은 학생 스스로의 몫이었다.
어둠이 내린 시각.
검푸른 밤하늘엔 그간 퍼붓던 장맛비가 방랑자가 꾸고 간 꿈결이라도 되는 양 구름 한 점 떠 있질 않았다.
밤이었지만 유독 청명한 하늘에는 별무리와 둥글게 차오른 은빛 달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 밤하늘을 고스란히 비춘 루바흐의 호수는 그날따라 유달리 잔잔했다.
호수에서 태어난 정령 라그리마 역시 오늘만큼은 눈물을 멈추고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평화로이 휴식을 취하던 라그리마를 깨운 것은 호수를 뒤흔드는 갑작스런 파문이었다.
놀란 라그리마가 빼꼼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녹색 바람에 휘감겨 호수를 딛고 서 있는 한 소년이 보였다.
라그리마는 소년의 이름을 기억했다.
「쥬다스구마?」
“……아.”
쥬다스는 홀린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파란 정령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깨운 모양이구나. 미안하다.”
「괜찮구마. 자네라면 언제든 환영이구마.」
라그리마는 흔쾌히 그를 반기며 곁에 다가갔다.
물 밖에 머리만 빼꼼 내밀고 있는 사내의 형상이었지만 쥬다스는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라그리마 역시 정령이었기에 다른 정령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호감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구마?」
“허허. 예민한 아이로구나.”
「아이는 내가 아니라 자네인 듯한데.」
진심으로 의아해하고 있는 라그리마를 향해 그저 부드럽게 웃어준 쥬다스는 천천히 호수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걸음을 따라 라그리마도 느릿느릿 이동했다.
“오늘은 평화로웠던 모양이야. 울지 않는구나.”
「이곳이야, 그럴 때니까. 슬픔보다는 설렘이 가득하구마.」
시험이 끝난 학생이란 대부분 결과야 어쨌든 이전과 같은 스트레스에 휩싸여 있지는 않는다.
꿀 같은 단잠을 즐기고 휴식을 즐기며 다가오는 방학을 기다린다.
때로는 울적해지기도 하고 앞날이 걱정되기도 하겠지만 하루쯤은 다 같이 마음 편히 쉬기도 하는 날이 있다.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하지만.」
라그리마가 물 밖으로 손을 뻗어 쥬다스를 가리켰다.
「여기 자네가 슬퍼하고 있구마.」
“……으응? 딱히 슬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만.”
「그럼 왜 나는.」
훌쩍.
「눈물이 흐르, 흐, 흐어엉―」
“으음…….”
급기야 엉엉 울기 시작한 라그리마를 앞에 두고 쥬다스는 난처하게 턱을 쓸었다.
이거야 원, 작게 중얼거린 그가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구나, 라그리마. 내 대신 울어줘서.”
「아니구마. 훌쩍. 그거 아니구마. 아무리 인간이란 알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지만 자네는 좀 심하구마.」
라그리마는 도리질치며 보그르르 물에 잠겨 들었다.
「슬플 때는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거나, 아무튼 그리 웃지 말라는 거구마…….」
흐어어어.
정령의 울음소리가 어둠이 내린 호수를 맴돌았다.
쥬다스는 라그리마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호숫가에 서 있다 이내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날이 밝자 드디어 봄 학기 종강을 알리는 선언식이 열렸다.
선언식은 축제 때와는 다르게 짧고 간결하게 진행되었다.
학생회장이 하는 선언문 낭독과 학원장의 훈화 등이 행사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 뒤를 이어 방학 기간에 지켜야 할 규율과 다음 학기가 시작되는 시점, 유의 사항 등이 전달되었다.
마지막 순서로 한 학기 동안 여타 부문에서 최고의 성적을 보여준 학생들에게 상장이 수여되었다.
여기엔 쥬다스와 에단이 나란히 선정되었다. 문과와 무과를 각각 대표하는 뛰어난 성적이 수상 이유였다.
그리고 양호실에서 늘 치료 업무를 돕던 리이나도 역시 상을 받았다.
이능 계열 재능상이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틈틈이 개발한 힐링 푸드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치유술사로서의 자질 등으로 크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소수 인원에 대한 수상을 끝으로 선언식은 마무리되었다. 나머지 자잘한 상장과 성적표는 개별로 주어졌다.
성적표를 확인한 학생들 사이에서 탄성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음이 연달아 일어났다.
바이칼 역시 성적표를 받고는 괴성을 내질렀다.
“크아! 진짜 이대로 낙제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제기랄!”
‘저놈도 망했나.’
동류를 보는 슬픔의 눈초리가 그를 스쳐 지나갔다. 성적표를 꾸겨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바이칼의 등을 에단이 툭 치며 말했다.
“……축하한다.”
“총 평점 B+! 완전 선방했습니다. 젠장!”
총평이 B+라는 건 중상위권 성적을 기록했다는 의미였다.
완전히 말아먹을 것을 예상했던 바이칼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고득점인 셈이다.
쥬다스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긴 했으나 지도를 따르며 밤새 학업에 매진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의 열의가 불러일으킨 진실로 눈물겨운 스터디의 결실이었다.
「성적이 잘 나왔다는 얘기 아니다요? 왜 화를 낸다요?」
「너무 좋을 때에도 욕이 나오기도 한답니다, 토니.」
카니의 설명에도 토니는 쥬다스의 머리 위에서 짧은 팔을 휘적거리며 재차 의문을 제기했다.
「좋은 걸 좋다고 하지 않고서 어떻게 좋음을 표현할 수가 있다요? 그걸 듣는 사람은 다 구분한다요?」
「그럼요. 좀 더 강조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니까요.」
「우에에, 복잡하다요……. 」
「후후. 과장하거나 이중언어를 쓸 필요 없는 우리와는 다르니까요.」
정령들 중에서 유일하게 욕설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카니였다.
그랬기에 인간들이 표현하는 언어를 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정령들은 과격한 언어는 잘 사용하지 않을뿐더러 복합적인 의미가 담긴 언어를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이는 정령이 계약자가 가진 감정과 바람을 민감하게 읽어낼 수 있어 굳이 다채로운 표현을 익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기우뚱 기울인 토니의 등을 힘내란 뜻에서 토닥여 준 카니는 살짝 고개를 돌려 쥬다스의 어깨 위에 걸터앉아 있는 유니를 쳐다보았다.
「…….」
평소와 다르게 유니는 깊은 상념에 잠긴 상태였다. 풀죽어 있는 녹색 정령의 목선을 따라 양 갈래로 묶어 내린 머리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유니…….」
카니가 작게 불러보았지만 그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카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린 토니가 파닥파닥 유니의 곁으로 내려앉았다.
「유니!」
「까, 깜짝이야.」
갑작스런 땅의 부름에 녹색 바람이 화들짝 놀라 흔들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유니의 옆에 선 토니가 뚫어져라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빠안.
「……뭐야, 뭔데. 왜 그렇게 봐?」
「어제 그 릴리스란 사령 때문이다요?」
「그, 그런 거…….」
투닥거리긴 했어도 오랜 세월 형제처럼 함께 지내온 자연계 정령들이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 무엇에 신경 쓰고 있는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황토색 앞머리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또랑또랑 빛나고 있을 토니의 눈을 마주보며 유니는 끙 하고 날개를 늘어뜨렸다.
「……맞아. 걔 때문에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 녀석이 본래 정령이었던 게 사실이라면.」
학생들 사이에 섞여 아이들의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던 쥬다스도 유니의 말에 시선을 내려 정령들을 훑었다.
「‘사령’이란 건 대체.」
자연계를 유지하는 축으로서 존재하는 정령이라지만 그들도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다 인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정령의 계약이란 무엇인가’, ‘사령은 어디서 태어나는가’.
요컨대 저런 질문에 대해 대략적으로는 답할 수 있었지만 자세한 원리까지 설명할 수준은 못되었다.
「있지, 이그레트. 만일 사령의 모태가 정령이었다면, 우리 정령은 어째서 그런 모습으로 변하게 된 걸까.」
“…….”
올곧게 내려다보는 금색 눈동자를 견디지 못하고 유니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냥……. 그 애가 우리와 동족이었다면 왜 그렇게 된 걸까 싶어져서.」
잠자리의 것처럼 얇은 날개를 축 늘어뜨린 채 웅얼거리는 유니를 가만 바라보던 쥬다스는 양손을 모아 그녀를 담았다.
어깨 위에서 손바닥으로 옮겨지게 된 유니는 올망졸망한 눈으로 연둣빛 원피스 자락을 꾸욱 쥐었다.
「나, 너무너무 궁금한데, 이해하고 싶진 않아.」
“유니.”
「그 애가 가여워. 그치만 그뿐이야.」
후웅.
바람이 울었다.
강하지 않은 세기로 그의 주변을 휘감은 바람은 그저 조용히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도 그 앤, 아주 소중한 걸 잃었다고 생각해. ‘릴리스’가 되기 전 지키고 있던 자연의 힘을 놓을 정도로. 어쩌면 자연 따위 아무 의미 없었던 게 아닐까. 모든 걸 부수고 깨뜨려 버리고 싶을 정도로 슬펐던 거야.」
쥬다스는 칭얼거리는 아기를 돌보듯 유니를 천천히 품에 끌어안았다.
따뜻한 심장 소리를 들으며 유니는 처음으로 계약자를 향해 자신의 소망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이그레트, 언제까지고 우리가 너의 정령일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줘.」
쥬다스는 긍정하지 않았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지금은 어떤 복잡한 인과에 의해 두 번째 삶을 전승했지만, 이 역시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정령들과 약속할 수 없었다.
「……제발.」
언제나 활기찼던 바람의 정령답지 않은 애잔함이었다.
“쥬다스 님?”
쥬다스가 실체화된 유니를 품에 안은 채 돌아보자 그를 부른 크리스티나가 바로 곁에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을 살피던 크리스티나는 짐승의 여린 새끼처럼 안겨 있는 유니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혹여 지난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가 걸음을 멈춤과 동시에 다른 아이들도 전부 멈춰서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뿐 아니라 에단과 바이칼 역시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챈 상태였다.
선언식이 끝난 직후 크리스티나와 에단, 바이칼 세 사람은 제일 먼저 쥬다스의 곁으로 모였다.
발이 넓은 마르젠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여러 학생과 무언가 대화를 나누기 바빴고, 얼마 전 학생 신분에서 벗어난 아벨은 선언식과 상관없이 연구소에서 잔일을 돕는 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렇습니까.”
서로 잠깐의 공백을 두고 내놓은 대답이었다.
쥬다스가 말을 아낀 이상 그를 따르는 세 사람도 더 이상 억지로 캐물을 수 없었다.
대신 크리스티나는 흘러내린 긴 바닷빛 머리카락을 모아 하나로 묶으며 단호히 말했다.
“혹, 무언가 말씀하실 일이 생기시거든.”
투톤의 머리색처럼 깊이 있게 빛나는 눈동자가 모처럼 서늘함을 죽이고 상냥함을 담았다.
“언제든지 알려주십시오. 듣겠습니다.”
그녀 스스로도 어색했을 용기를 알아본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마.”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공교롭게도 지금 연재시기가 딱 학생분들 시험기간인 모양이네요. 화..화이팅! (..)
오늘 좋아하던 작품 중 하나가 완결이 난 걸 보니 뭔가 제가 다 뿌듯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장르가 코믹로판이었는데, 아마 대부분 좋아하시던 작품일 겁니다.ㅎ)
저도 존경하는 작가님처럼 멋지게 완결을 맺을 수 있도록 힘내야겠습니다.ㅎ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격려에 늘 힘을 얻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