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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시험
찌륵, 찌륵, 찌르르륵―
여름 벌레가 울었다. 습한 장맛비가 그리워질 만큼 푹푹 찌는 햇살이었다.
이제 막 방학을 맞이한 루바흐에서는 학교를 떠나는 이보다는 아직 시기를 두고 보는 학생이 더 많았다.
루바흐는 재능 개발 학원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또래 아이들과 정을 쌓을 수 있는 사교의 장이기도 했다.
수업이 종강하여 여가 시간이 주어진 지금 학생들은 다른 가문 아이들과 친해질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때문에 계획적으로 친분을 만들든 이미 친해진 무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든 학교는 방학을 맞은 후에도 제법 북적였다.
쥬다스는 세 아이와 함께 중앙 호수를 다시 찾았다. 라그리마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맑은 수면 너머로 큼직한 자갈돌과 관상용 물고기들이 자리할 뿐이었다.
점심시간이 막 지난 시점이라 호숫가에는 다른 학생들도 여럿 자리를 차지하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예 돗자리를 펴고 앉은 무리도 있었다. 같은 교복을 입고 재잘거리는 학생들은 십 대 소년소녀답게 쾌활하고 명랑한 분위기였다.
돗자리에 둘러앉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무리를 향해 잠시 시선을 준 쥬다스는 다시 자신과 함께하고 있는 세 아이를 가만 쳐다보았다.
“……해서, 그때까진 남아 있으려고 합니다.”
“하긴. 어차피 즉위식에는 황족이 아닌 이상에야 참관할 수 없을 테니.”
“아니, 그럼 쥬다스 님 혼자 황궁에 다녀오셔야 하는 겁니까?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거?”
에단, 크리스티나, 바이칼 순으로 이어진 대화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함만이 깃들어 있었다.
그들은 현재 조만간 있을 황태자 즉위식에 관련된 일정을 계획하고 있었다.
즉위식은 앞으로 열흘 후, 포탈을 이용해 이동할 예정이므로 왕복에 걸리는 시간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었다.
그렇다 한들 즉위식에는 미리 익혀두어야 할 식순이나 예법 등 준비과정이 어느 정도 필요했다.
게다가 의복 치수도 다시 맞춰야 했고 즉위식 이전 교황청을 먼저 들러 몸과 영혼을 정갈히 하는 예식을 치르는 게 순서였다.
그러니 넉넉잡아 3일 후에는 먼저 교황청으로 이동해야 시간 분배상 알맞았다.
그가 즉위식을 무사히 치르고 오는 동안 아이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각각 무언지를 정해두고 있었다.
“일단 우린 황족이 아니니 쥬다스 님을 따라 입궁할 수 없지. 차라리 이번 시기를 기회 삼아 집안에 스스로 정한 뜻을 정확히 밝힐 필요는 있겠군.”
“……동의합니다.”
여전히 진지한 회의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쥬다스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집에 돌아가는 건 오랜만이겠구나. 혹 형제들이 있느냐?”
“……독자(獨子)입니다.”
에단이 먼저 대답했다.
크리스티나는 지난 축제 때 얼굴을 비추고 간 오라비 알시오스 C.델피아를 언급했고, 바이칼은 머리를 긁적이며 세 손가락을 펴보였다.
“어, 저는 형님과 남동생, 여동생이 있습니다.”
바이칼은 드레이크 백작가의 차남이었다. 장남인 레이칼 드레이크는 열 살 때 루바흐에 들어와서 우수한 문과 성적을 기록하고 열다섯에 졸업한 엘리트였다.
학생부에서 곧장 입부 제의가 올 정도의 인재였지만 이를 거절하고 드레이크가의 장남으로서 가문을 이어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바이칼은 허심탄회하게 속사정을 밝혔다.
“어차피 가문은 형님이 이을 거고, 원래 저는 학파에 가입해서 이능 연구 활동이나 좀 해보려고 했었죠. 정치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고 집안엔 동생들도 있으니 뭐 저 하나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견문 좀 넓혀도 되겠구나 싶었는데.”
그의 녹안이 쥬다스를 향했다.
“저도 이런 제가 루바흐에서 주군을 만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지 말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움 좀 될 수 있게 정치 수업도 미리 들어둘 걸 싶고…….”
멋쩍게 말꼬리를 흐리는 그에게 에단이 툭 끼어들었다.
“딱히 네게서 정치적 견해를 듣고자 하는 이는 없어 보이는데.”
“뭐요?”
“그래도 교양으로 정치 수업 정도는 들어두면 좋긴 하겠군.”
“아니, 이 양반이. 뭐, 솔직히 말해 우리 나이에 다들 정치에 대해 별로……!”
거기까지 말한 바이칼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곧 황태자로 즉위할 쥬다스는 그렇다 치고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모두 공작가 출신이었다.
이제 겨우 15살, 14살 아이들이라 해도 루바흐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정치, 경제, 예법, 문학 등 모든 분야를 일정 수준 이상 익혀 왔을 이들이다.
이 자리에는 없지만 같은 백작가 출신인 마르젠도 바이칼과는 다르게 처세에 능하며 일찍부터 정계에 드나들어 왔던 정치적 인재였다.
바이칼은 뻘쭘하게 입을 닫고 코끝을 찡그렸다.
“말해주기 전에 스스로 깨달았나. 장하군.”
“……예이, 장하게 봐주시다니 거참 고맙네요.”
투덜투덜거리는 바이칼과 농을 건 에단을 보고 나니 쥬다스는 이제야 눈앞의 이들이 아이들다워진 기분이었다.
정작 무리 중에 제일 아이답지 않은 푸근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였지만, 본인은 몰랐다.
뜨거운 여름 햇살만큼이나 따끈하게 무르익어 가던 분위기가 깨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풀벌레 소리가 사라져 있음을 느낀 에단이 곧장 검을 빼 들었다.
챙!
칼날에 맞고 튕겨 나간 날붙이가 빙글빙글 돌며 바닥을 굴렀다. 길이는 겨우 손바닥만 한 단도였으나 분명 살의가 담겨 있는 무기였다.
암살을 시도한 건 한 여학생이었다. 초콜릿색 단발을 단정히 늘어뜨린 소녀가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쥬다스를 노렸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그녀는 이번에는 등에 차고 있던 장병기를 꺼내 들었다.
길이는 어린 여성 체구에 맞춰 제작되어 다소 짧은 편이었지만 창날이 양쪽 끝에 달려 큰 살상 효과를 낼 수 있는 쌍두창(雙頭槍)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명백한 공격 의사를 확인한 크리스티나도 자신의 검을 빼 들었다.
학원 루바흐에서 대련 상황이 아닌 전투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상대가 먼저 무기를 빼 든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곧장 자리를 박찼다.
슈욱.
넓적한 창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귀 끝을 스쳤다. 그러나 그녀의 공격은 쥬다스에게 닿기 전 에단에게 막혔다.
쩡 하는 마찰음과 함께 창과 도가 허공에서 맞닿았다. 호수 주변에 있던 학생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 웅성거리며 멀찍이서 그들을 관망하고 있었다.
에단이 공격을 막는 사이 크리스티나는 유심히 소녀를 살폈다.
‘뭔가 눈빛이 이상해.’
크리스티나는 예리하게 문제점을 찾아내었다.
단순 원한이나 사사로운 감정으로 달려든 것 같지는 않았다.
중간에 공격이 가로막혔음에도 소녀의 시선은 끝까지 쥬다스를 향했고 그 고동색 눈동자는 살심으로 가득했다.
부자연스러운 살의였다.
‘마치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거기까지 생각하던 크리스티나에게 바이칼이 작게 말했다.
“일단 제압해야겠습니다.”
이대로라면 누군가 다칠 수도 있었다. 공격을 해왔으니 정당방위로 상대하고는 있었지만 상대는 그들과 같은 학생이었다.
황자를 노렸으니 처벌은 받겠지만 이는 그들이 판단할 내용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는 빠르게 둘 사이에 끼어들어 검 손잡이로 소녀의 무릎을 가격했다.
“……!”
휘청이는 소녀의 손을 내려쳐 창을 빼앗은 에단이 그녀를 바닥에 꿇렸다.
제압당한 상태에서도 소녀는 쥬다스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너만 없으면. 어차피 그 누구도 널 원하지 않았을 텐데.”
“…….”
“죽어버려.”
현생의 기억 속 생모가 내질렀던 저주와 같은 말이었다. 혐오하는 눈빛마저도 같았다.
쥬다스는 대응하지 않고 차분히 소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후웅.
얼어붙은 사막을 정화했던 때와 같이 황금색 기운이 주변을 감돌았다. 자연계 4속성 정령 동조술이었다.
그러자 소녀는 괴로운 듯 몸을 뒤틀며 컥 기침을 내뱉었다.
“……!”
소녀의 입을 통해 스르륵 검은 그림자가 빠져나왔다. 이를 본 에단이 무겁게 표정을 굳혔다.
“사령…… 입니까?”
털썩.
그림자를 토해낸 소녀가 정신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
동그랗게 덩어리진 검은 그림자는 그대로 붕 떠서 어디론가 날아가려했다.
그 순간 마력으로 이루어진 화살이 날아와 사령을 퍽 꿰뚫었다.
“하, 유령은 무서워도 남의 몸에 숨어서 입을 놀리는 비열한 그림자 따위를 그냥 보낼 순 없지.”
어느 틈에 품에서 마도서를 꺼내 펼쳐 든 바이칼의 일격이었다. 마력에 감싸인 마도서에서 웅 하며 화살이 몇 개 더 형성되었다.
파팍.
화살에 벌집처럼 꿰뚫린 검은 덩어리는 그대로 산산이 부서져 스르륵 기화해 버렸다.
남은 건 정신을 잃은 이름 모를 소녀와 주변에 몰려든 다른 학생들의 시선뿐이었다.
소녀는 즉시 학생부에서 압송해 갔다. 조사를 한다고 데려가긴 했으나 쥬다스 일행은 아마 그녀로부터 크게 건질 내용은 없을 것이라 짐작했다.
대신 지켜보던 증인이 많았기에 이를 ‘사령’의 소행이라 확증할 수는 있었다.
사령을 부린 술사가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단 루바흐에 금지된 사령술이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겁니까?”
바이칼이 불편한 얼굴로 운을 떼었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런 짓을.”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너무 태연하신 거 아닙니까…….”
실제로 쥬다스는 현재 천하태평 했다.
그는 오히려 이번 습격을 기회로 여기고 있기까지 했다. 무엇이든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이 일은 현생의 생모인 하윤 리를 죽음까지 몰고 갔던 술법과 매우 흡사했다.
황후는 중대한 실수를 두 가지나 범했다.
첫째는 자신을 너무 믿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리와 3황자를 지지하는 권속이 지닌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를 믿고 사령술에 손을 대었다.
제국의 황후가 금지된 술법을 익혔으리라곤 아무도 의심하지 못했다. 그리고 들키지 않을 자신 역시 충만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1황자를 그저 ‘쥬다스’로만 본 것이 그녀의 실수였다.
그는 더 이상 어리고 순진한 12살 소년이 아니었다. 현생의 자아는 이미 5년 전 그날 죽었다.
‘이그레트’라는 전생의 자아가 눈을 뜬 순간 1황자는 사령술 따위로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실수들을 토대로 황후가 보낸 메시지는 간단했다.
‘경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어미와 같은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황태자 즉위를 물리라는 경고였다.
물론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상관없이 황후는 1황자라는 싹을 뿌리째 뽑아버리려 할 것이다.
쥬다스는 그 경고에 겁을 집어먹거나 충격을 받는 대신 그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대로라면 다른 아이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겠구나.’
그는 일정을 좀 앞당겨 황궁으로 이동할 필요를 느꼈다.
권력의 중심에 선 영악한 여인이었으나 아직 불혹도 넘지 않은 젊은 황후가 부리는 간교 따위는 그에게 있어 어린애 장난과도 같았다.
속으로 간단히 상황을 정리한 쥬다스가 아이들을 다독여 주었다.
“사령은 인간의 약한 마음에 파고들어 좀먹는 벌레와 같단다. 이는 정령의 힘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니 내겐 그리 영향을 미치지 못해. 그러니 내 걱정일랑 말고 이에 먹히지 않도록 마음을 굳건히 하려무나.”
“……그렇지만.”
그들은 아직 설마하니 황후가 사령술과 관련되어 있으리란 생각까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흉계를 꾸민 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데다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사령을 다룬다 하니 주변이 온통 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바이칼이 불안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바이칼, 크리스티나, 그리고 에단.”
문득 쥬다스가 그들을 하나하나 부드럽게 호명하며 눈을 맞추었다.
“너희를 믿는다.”
“……!”
별거 아닌 듯 흘러나온 한마디였지만 듣는 이들의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웃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굳어 있지도 않은 편안한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너희도 나를 믿어주지 않겠느냐.”
“……믿고 있습니다.”
에단이 철컥 검집을 심장에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릴 하십니까.”
“……다녀오십시오.”
바이칼이 씩 웃으며 답했고 크리스티나 역시 눈을 살짝 감으며 목례했다.
나름의 신뢰가 담긴 표현을 들으며 쥬다스는 그제야 빙그레 웃어 보였다.
“다녀오마.”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주말 건강히 잘 보내셨는지요?
이제 월요일이 다시 돌아왔네요. 독자님들 모두 힘차게 한 주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시험보시는 분들 좋은 컨디션으로 잘 치르고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화에 언급했던 로판은 많은 분들 예상대로 구들이 맞습니다.ㅎ
...이것은 팬밍아웃?(...)
사실 저는 판타지, 무협 뿐 아니라 로판 장르도 무척 좋아합니다. 영지, 성장, 조직물도 좋아하고...
단, 현대나 과학에 기반을 둔 장르는 조금 읽기 힘들어하는 편입니다.ㅎ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에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아참, 지난 편 '미생물'(...) 및 여러가지 비문 지적 감사드립니다. 부, 부끄럽네요, 아하하;; 덕분에 잘 수정했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