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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사신수-백호
어차피 오래 머물 곳도 아닌지라 쥬다스는 가위라는 괴현상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은 숙소 주인장의 조언대로 등불만 끄고 촛불만 켜둔 채 잠을 청했다.
해동에서 사용하는 초는 특수한 기능이 있어 오래 켜두어도 전부 녹아내리는 일은 없다.
사용자가 불을 끄고자 할 때엔 덮개를 덮어두면 되어 사용이 간편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잠을 청하는 시점에 정령들은 깨어 활발히 떠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느낌이 좀 별론데.」
「네에, 좀 구린 감이 있네요.」
사령을 직접 발견한 건 아니지만 어딘가 마음 한 구석 찜찜함이 떠나지 않았다.
정령이 불쾌를 느낀다는 건 그만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치 방 안 어딘가에서 썩고 있는 상한 우유 냄새를 맡듯이 정령들은 사령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야아. 백호, 안 자는 거 다 알아. 일어나 봐.」
이불 위에 축 늘어져 있던 하얀 호랑이는 여전히 눈은 감은 채 꼬리만 살랑거렸다.
「뭐다냥.」
「물어볼 게 있어.」
「크흥. 귀찮게 굴지 말라냥.」
백호는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짜증을 부렸다.
「자연계인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동물계는 반쯤은 동물이라 밥도 먹고 잠도 자야 한다냥. 지금은 잘 시간이다냥. 나는 잘 거다냐아.」
「카니, 저 녀석 수염 다 태워 버려.」
「그러고 보니 수염이 너무 길게 자랐네요. 으응, 면도해 드릴까요?」
「냐아악!」
화륵 코끝을 스치는 열기에 백호가 눈을 번쩍 떴다. 코앞에서 시선이 마주친 불의 정령이 방싯 웃었다.
백호는 털을 세우며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거, 거, 건드리지 마라냥!」
「어머. 누가 보면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어요.」
「호랑이는 맛 없다냐…….」
백호는 주위를 둘러싼 네 정령을 쳐다보며 귀를 접었다.
승냥이 떼에 둘러싸인 새끼 고양이처럼 달달 떨던 백호는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하다냥?」
「사령한테 공격받기 시작한 지는 얼마나 됐어?」
「그렇게 오래 되진 않았다냥. 한 1년?」
길다하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다. 정령들은 심각하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머지 사방신수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는 모르고?」
「그렇다냥.」
「곤란하네. 걔들이 사령에게 당했다면 문제가 커지는데.」
「뭐가 문제다냥? 힘의 우위로 따지면 우리 동물계는 어차피 자연계인 너희를 이길 수 없다냥.」
그 자존심 강한 백호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모든 정령 체계에서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 존재는 자연계 정령왕들이다.
동물계나 물질계가 존재하기 위해선 자연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생명의 근원이자 환경 그 자체인 자연을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만일 그 녀석들이 사령에게 잠식되었다면.」
백호는 강에서 사령화된 이무기를 보았을 때처럼 간단히 말문을 맺었다.
「죽여라냥.」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거야?」
「안 괜찮을 게 뭐 있다냥? 사령에게 조종당하는 채로 내버려 두는 게 더 기분 나쁘다냥.」
백호가 투덜거리며 꼬리로 바닥을 탁탁 내려치는 순간이었다.
훅!
아무도 초를 건드린 사람이 없었는데 방 안의 불이 전부 꺼져 버렸다.
정령은 어둠에 영향을 받지 않지만 불이 꺼짐과 동시에 전부 흠칫 굳었다.
제 스스로 꺼질 리 없는 촛불이 꺼졌다는 건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했다는 뜻이었다.
그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령들의 감각이 둔해져 있었다.
「뭐야?」
「힝, 모르겠다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요.」
토니가 울상을 지었다. 마찬가지 상태인 유니도 표정을 굳히며 파다닥 날아올랐다.
어두워진 방 안에는 음산한 고요가 가득했다.
밖에서 부는 바람에 의해 창문이 덜컥거렸다. 제국의 창문과 다르게 해동에선 얇은 종이를 창에 발라놨기에 닫아놓은 상태에선 바깥 풍경을 볼 수 없었다.
잠시 동태를 살핀 유니는 백호를 홱 돌아보며 말했다.
「상황이 이상해. 다들 깨우는 게 좋겠어.」
백호는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실체를 가지고 있는 동물계 정령이다. 자연계 정령들은 계약자가 의식이 없는 동안에는 실체화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는 반면 백호는 그런 면에선 한결 편했다.
폴짝 이불 위로 뛰어간 백호가 잠든 사람들을 앞발로 톡톡 건드리며 울었다.
냐아아―
그러나 영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새끼 호랑이의 말랑말랑한 발바닥에 볼을 맞은 세이지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으…….”
「틀렸다냥. 전부 행동 불능 상태다냥.」
방 안을 한 바퀴 돌아본 백호가 사람들을 깨우는 걸 포기하고 털퍼덕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는 사이 바람 소리는 점차 조용해지더니 흔들리던 창문이 잠잠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 유니는 더욱 불안한 표정으로 조용해진 방 안을 날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급하게 쥬다스의 머리맡으로 휙 내려앉았다.
「적이야, 이그레트!」
그 외침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검은 형체가 나타나 비호같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막 칼을 내리 꽂으려던 순간 붉게 번뜩이는 긴 검이 가로질러 나타났다.
채앵!
습격자를 막아선 건 에단이었다.
신체형 이능력자 중에서도 최고라 불리는 헤이가의 핏줄은 검술 천재일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상태 이상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는 백호가 잠든 사람들을 깨워 보겠답시고 어기적거리는 동안 이미 깨어 있었다. 그리고 적이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회심의 습격이 허무하게 가로막힌 적은 당황하지 않고 반대 손을 휘둘러왔다. 악단의 연주처럼 검이 다시 한 번 쩌엉 울렸다.
검은 로브로 모습을 가린 적이 양손에 각각 초승달처럼 구부러진 단검을 쥐고 속공을 해왔다.
에단은 침착하게 상대가 공격을 전부 막히고 물러날 때쯤 역으로 치고 들어갔다.
“……!”
빠른 속도로 아래에서 위로 그어오는 도를 발견한 적이 흠칫 자리에 멈춰 섰다.
서걱!
한 발짝만 더 물러섰어도 배에 꼬치구이처럼 칼이 꽂혔을 터였다.
본능에 가까운 현명한 판단 덕에 죽음을 면했다. 대신 습격자의 정체를 가려주고 있던 로브가 찢어져 나풀거렸다.
흐트러진 옷자락 사이로 코코아색 단발과 눈동자가 보였다.
“너는.”
에단도 최근에 한 번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그는 투르케 사막에서 바이칼을 납치했던 사령술사들 중 ‘할더’라는 어린아이와 그 아이를 구해 그림자 너머로 사라졌던 소녀를 기억했다.
‘사령의 날개를 달고 있었지.’
사령에게 잠식당한 소녀, 레이야였다.
목표를 놓친 레이야는 찢어져 흐느적거리는 옷 따위엔 신경 쓰지 않고 에단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지금은 날개를 감추어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고 있었다.
“악연이군. 우리에게 원하는 게 있나?”
레이야의 시선이 자연스레 어딘가로 향했다. 그 끝을 따라간 곳엔 잠든 쥬다스와 털을 바짝 세운 백호가 있었다.
“백호…….”
레이야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리고 초승달 모양의 단검을 들어 백호를 가리켰다.
“살리든…… 죽이든……. ‘홈’에 데려가야…….”
앞서 쥬다스가 예상한 대로 백호를 쫓는 건 프리드였다.
백호뿐 아니라 사신수를 전부 손에 넣으려 하는지도 몰랐다.
프리드에게 필요한 건 힘이다. 그는 오로지 강한 힘만 있으면 세상이 정의로워질 수 있다고 늘 주장해 왔다.
우득! 우드득!
레이야의 등에서 흉물스런 날개가 피부를 찢고 튀어나왔다. 뼈로 이루어진 날개에선 피와 살점이 뒤섞인 끈끈한 액체도 줄줄 흘렀다. 흰자 없이 검은 색으로만 가득한 눈이 스산하게 백호를 쳐다보았다.
「크르릉, 대체 언제까지 따라다닐 생각이다냥! 엄청난 집착이다냥.」
백호는 잔뜩 긴장해서는 입만 살아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리만치 끈질긴 추격이었다.
에단은 백호를 힐끗 쳐다보곤 다시 검을 휘둘렀다.
‘백호만을 노리는 게 아니다.’
처음 레이야가 찌르려 했던 건 바들바들 떨고 있던 백호가 아니라 그 곁에 잠들어 있는 쥬다스였다.
제대로 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에단은 사령술사가 꿈꾸는 목표에 그가 방해가 되는 모양이라 추측했다.
대충 적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냈으니 더 이상은 쓸데없는 말을 걸 이유가 없다.
그리 여긴 에단의 공격이 매서워졌다. 레이야가 홀로 상대할 만한 적이 아니었다. 근접전에서의 패배를 직감한 레이야는 단검을 버리고 곡예단처럼 유연하게 몸을 뒤로 날렸다.
탁, 창가에 내려선 그녀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
순식간에 그녀를 따라잡은 에단이 코앞에서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핏!
황급히 피했지만 옆구리를 깊게 베여 울컥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검은 피가 후두둑 바닥을 적셨다. 레이야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확인했다.
“방해…….”
살기등등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레이야는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무턱대고 덤비느니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퇴각하는 편을 택했다.
콰앙!
창문이 벽째로 산산조각 났다. 에단의 검이 날아들자 그녀는 그 공격을 비웃기라도 하듯 뼈로 이루어진 날개를 퍼덕여 유유히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에단은 검을 갈무리하고 돌아섰다. 적을 놓친 건 아쉽지만 지금 중요한 건 호위 임무였다.
그리 생각하고 쥬다스의 안전을 확인하려던 에단은 황급히 도로 부서진 창가로 달려갔다.
‘낭패다.’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녹색 기류가 살랑거리며 남아 있었다. 도대체 어느 틈에 깨어 움직인 것인지 쥬다스가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에단은 녹색 바람결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상처…….’
레이야는 여전히 꾸역꾸역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한 손으로 감싼 채 굵은 대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녀가 도망친 곳은 마을밖에 자리한 작은 대나무 숲이었다.
화끈한 통증과 함께 손이 온통 검은색으로 젖어들었다. 사령이 되면서 자가 치유력도 높아졌지만 지금처럼 깊이 상처 입었을 시엔 회복에 시간이 제법 걸렸다.
“아파.”
고통이란 감각도 오랜만이었다. 아득한 옛날엔 넘어져서 무릎만 까져도 엉엉 울었던 것도 같다.
레이야는 아플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흐릿한 기억 속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런, 많이 아팠겠구나.’
아파서 울 때면 머리를 토닥여 주던 손길이 있었다. 그 다정한 말투와 손길이 좋아서, 일부러 더 서럽게 운 적도 있었다.
“레이야.”
“핫……!”
멍하니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누군가 다가온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레이야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많이 아팠겠구나.”
눈앞에 한 소년이 있었다. 쥬다스였다. 생소한 얼굴이지만 레이야는 그 맑은 금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년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느릿하게 토닥여주었다.
“미안하다.”
마치 기억 속에서 튀어나온 듯, 다정한 말투와 손길에 레이야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단검을 꺼내 공격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어.’
사령이 되면서 예전 기억은 거의 의식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녀에게 남은 건 ‘홈’이라 부르는 보금자리와 소중한 오빠 둘. 그게 전부였다. 두 사람을 위해 움직였고 그 명령에만 따랐다.
다른 사람은 아무리 죽어도 상관없었다.
‘내 가족.’
프리드와 할더는 레이야에게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이었다. 그래서 레이야는 두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했다.
“누…… 구……?”
레이야는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고통 속에 내버려 두어 정말 미안하다. 너를, 너희를 그렇게 두고 도망가 버려서.”
그녀를 다독거려 주던 손길이 떨어졌다. 작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레이야를 향해 쥬다스는 전과 같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이제야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서.”
스릉-
허공에 모여든 얼음알갱이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어 검의 형상을 취했다. 봄에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레이야는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아, 당신이구나.’
가뭄이 든 땅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던 레이야의 얼굴 위로 그와 같은 미소가 번졌다.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하면서도 레이야는 만개한 꽃처럼 웃었다.
“이그…… 레트 님…….”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좋은 아침입니다! (...)
어느 틈엔가 3월의 마지막날이 왔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네요.ㄷㄷ
참, 요즘 미세먼지가 어마어마하다고 들었습니다. 미세먼지를 많이 마시게 되면 혈관기능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니 외출 시에 조심합시다.ㅠㅠ!
그럼 다음 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함께 달려주시는 독자님들께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