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56화 (156/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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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사신수-백호

많은 것이 변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로부터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노인은 소년이 되었고, 소녀는 악마가 되었다.

변하지 않은 건 그의 눈에 담긴 따스한 빛뿐. 외형도 색깔도 전부 달라졌지만 그 빛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레이야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닿을락 말락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결국 그에게 닿지 않는다. 아니, 부족한 건 거리가 아니다. 도무지 떨리는 손끝을  진전시킬 수가 없었다.

‘피.’

옆구리에서 새어 나온 검은 피가 잔뜩 묻어 가느다란 손목을 타고 흘렀다.

그에게 닿기엔 너무나도 더러워진 손이다.

“보, 보지 마세요.”

레이야는 황급히 손을 등 뒤로 숨겼다. 흉측한 날개도 몸 안으로 집어넣었다.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더러워지고 타락해 버린 추한 모습을 그에게 보이는 건 싫었다.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정작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끄집어내었다.

“저, 이그레트 님께는 착한 아이이고 싶었는데…….”

쥬다스는 그녀가 진정할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이런 괴물이 되어버려서…….”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까마득한 기억 너머에서도, 그는 한 번도 레이야를 혼낸 적이 없었다. 그에게 미움받고 혼날 거란 생각은 레이야를 떨게 만들었다.

“잘못…… 했어요.”

“괜찮단다.”

“죄송해요. 정말. 정말로.”

“괜찮아.”

괜찮다는 대답을 들을 때마다 레이야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온통 검게 물든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사령이 된 영혼은 울지 못한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건 살아 있는 자뿐이기 때문이다.

“미워하지 마세요…….”

“미워하지 않아.”

즉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레이야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레이야는 비로소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늘…… 함께 있고 싶었는데.”

그리곤 뒤로 숨겼던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프리드 오빠와 할더. 그리고…….”

소녀는 자신의 피가 잔뜩 묻어 더러워진 손으로 살며시 자신을 겨누고 있는 얼음검을 붙잡았다.

정령의 힘으로 만들어져 순수한 얼음 그 자체인 검에서 피어오른 하얀 냉기가 손바닥에 가득 달라붙었다.

‘가장 소중한 사람.’

흩날리는 눈송이가 레이야의 코코아색 머리카락에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검을 붙들어 자신의 심장을 향해 똑바로 그 끝을 맞추었다.

“이그레트 님, 알아요? 사령은 심장을 찌르지 않으면 죽지 않아요.”

“…….”

“계속 살아서. 몇 번이고 상처를 재생해 내니까. 한 번에 심장을 파괴하지 않으면.”

지금은 일시적이지만 사령의 본능보다 레이야로서의 자아가 앞선 상태였다.

거기까지 말한 레이야는 문득 쥬다스의 표정을 확인하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그를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다시 찾아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지옥 같은 세상에서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다쳐서 울고 있을 때에도 어김없이 이그레트는 그녀를 찾아주었다. 찾아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그 따스한 품에 꼭 안아주었다.

‘그게 좋아서. 너무나도 좋아서.’

당신은 나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하지만, 그래도 결국 이렇게 찾아주었으니까.

레이야는 속으로만 중얼거리고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저, 먼저 잘게요. 더 깨어 있으면 다시 전부 잊을 것 같으니까…….”

푹!

뜨거우리만치 지독한 냉기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정령의 힘으로 이루어진 얼음검은 소녀의 까맣게 물든 심장을 파괴했다.

검에 심장을 꿰뚫림과 동시에 레이야는 아기처럼 쥬다스의 품에 안겨 들었다. 가슴은 차가웠지만 그의 품안은 따뜻했다.

하얀 눈송이와 함께 바스러지기 시작한 몸이 점차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코코아빛깔의 찰랑이는 단발을 꾸욱 힘 있게 쓰다듬어준 쥬다스가 눈을 감은 그녀를 향해 나직하게 인사했다.

“잘 자렴. 레이야.”

파사삭-

레이야는 반짝이는 검은 가루로 화해 공중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껴안을 것이 없는 두 팔은 허공을 휘젓고 스스로를 안다시피 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난 속삭임이 그의 귓가를 흰나비처럼 맴돌았다.

‘―사랑해요.’

귀족가에서 태어난 프리드와 할더의 경우와는 다르게, 날 때부터 빈민가에서 태어나 버려져 홀로 자란 레이야는 부모에 대한 정을 모른다는 점이 이그레트와 같았다.

그래서 레이야는 유독 ‘가족’이라는 단어를 동경했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고 그 집에서 함께 사는 세 사람을 가족이라 부르며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다.

모르는 사람 열이 죽는 것보다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는 걸 견디지 못했다.

수백, 수천이 죽어도 그들을 지킬 수 있다면 레이야는 망설임 없이 그렇게 했다.

그런 그녀가 그들 셋 중 가장 소중히 여겼던 건 당연하게도 이그레트였다.

그를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레이야는 절벽 아래로 추락한 인형처럼 볼품없이 망가졌다. 그 후 상실과 공포의 틈을 파고든 사령에게 완전히 잠식당했다.

냐아아-

쥬다스의 발치에 다가온 백호가 조그맣게 울었다.

쥬다스는 시간이 멈추기라도 하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걱정스런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본 백호가 다시 힘없이 갸르릉거렸다.

그리고 백호의 뒤를 따라 나타난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전하?”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온 힘을 다해 뛰어온 에단이었다.

홀로 대나무 숲 한가운데에 서 있는 쥬다스를 발견한 에단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가 서 있는 자리에는 검은 핏물이 잔뜩 튀어 있었다. 어마어마한 출혈량이었다.

‘아까 그 사령의 피겠군. 죽은 건가.’

정작 쥬다스에겐 상처가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에단이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뱉던 찰나였다.

“잠시만.”

“……?”

꾸욱!

가느다랗게 떨리는 손이 에단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그제야 에단은 제 주인의 턱선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흠칫 굳었다.

“잠시만 기대도 되겠느냐.”

“……예.”

억누를 수 없다. 몰랐을 때라면 모른 척해 보겠지만, 이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아버렸다.

쥬다스는 더 이상 그 모든 것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폭발시키듯 터뜨려서는 안 된다. 그가 바라는 소망은 곧 거대한 힘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범람하는 감정은 혈관을 타고 흘러 온몸을 적시고도 모자라 밖으로 흘러넘쳤다.

휘몰아치는 폭풍을 잔잔한 냇물로 화해 가라앉히는 일은 그에게 있어서 생소한 일이었다.

하늘에 뜬 초승달은 소리 없는 눈물을 미처 비추지 못했다. 가녀린 달빛 아래 검은 가루만 별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자의 슬픔을 감지한 정령들이 몰려들어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

빛은 많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숨 막히게 캄캄한 밤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슬픔’이란 감정을 오롯이 인정했다.

* * *

쨍그랑!

모래시계 하나가 떨어져 박살 났다. 코코아색 모래가 유리 조각 사이로 흩어지는 걸 발견한 할더가 그 앞에 서서 물끄러미 이를 내려다보았다.

“흐음. 깨져 버렸군?”

“……그렇네요.”

의자에 앉아 다른 모래시계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돌리던 프리드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빠른데. 정말로 그 위선자의 손에 피를 묻힐 줄이야. 제법이야, 꼬맹이.”

할더는 허리를 숙여 흩어진 모래를 주먹에 쥐었다. 함께 뒤섞인 유리조각에 찔려 손바닥 사이로 검은 핏방울이 맺혔다.

‘이보십시오, 레이야. 엄밀히 따져보면 내가 너보다 한 살 많습니다?’

‘응. 그게 뭐?’

‘뭐긴 뭡니까. 앞으론 나한테도 오빠라고 불러요.’

‘싫어, 할더 멍청이.’

이제는 멀게만 느껴지는 추억 속에서 두 사람은 꽤나 앙숙이었다.

서로 얼굴을 맞대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큰형인 프리드가 늘 중재를 해주곤 했다.

‘멍청이는 욕이잖아, 꼬맹아. 조금 모자라지만 착한 할더라고 불러주자.’

‘아, 프리드. 정말 이러깁니까!’

깔깔 웃던 소녀의 맑은 얼굴이 아른거렸다. 마치 평행세계에 살고 있는  세 사람을 보듯 이젠 멀게만 느껴지는 추억이었다.

할더는 주먹을 콱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암갈색 모래가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프리드.”

“……?”

“당신은 처음 그분을 만났던 날을 기억합니까?”

사람들의 혐오스런 시선과 손가락질을 받으며 광장에 내동댕이쳐졌던 날이었다.

있지도 않은 반역죄를 뒤집어쓴 가문은 몰락했고 식솔의 목이 차례로 잘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가문의 핏줄인 할더는 광장에 묶여 썩은 달걀과 짐승의 피를 뒤집어썼다.

목이 잘리기 전 뒤늦게 모든 게 누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에게서 죄수의 낙인을 지우지 않았다.

한 번 죄인으로 인식된 자는 사회에서 다시 이전의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다시 사람답게 살게 해준다 하더라도 그 틈에 섞이고 싶지 않았다.

더러워진 그의 머리 위로 시커먼 하늘이 우릉 울었다.

텅 빈 눈을 하고 쓰레기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비를 맞았다.

“나는 그때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죽음만을 기다리던 할더에게 가을비는 차라리 따뜻했다. 비는 모두에게 공평했다. 편견도 낙인도 없이 세상을 적실 뿐이다.

“하나는, 세상의 정의란 결국 힘 있는 자가 정하게 된다는 것.”

귀족의 지위도 쌓아온 신의와 명예도 모조리 종이쪼가리처럼 갈기갈기 찢겼다.

더 큰 권력 앞에서 상대적 약자는 철저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선하고 악하고의 개념 따윈 상관없이 말 한 마디에 죄인이 되고 손짓 한 번에 목이 떨어졌다.

할더의 덤덤한 어투에 프리드는 그저 손에 든 붉은 모래시계만 빙글빙글 돌렸다. 그 안에 담긴 모래가 이리저리 휩쓸렸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할더는 주먹을 쥔 손을 털어냈다. 손에 박힌 유리조각만 남기고 모래가 우수수 추락했다.

“힘이 있는 자가 꼭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의 하늘은 공평하고 따스한 자였다. 하지만 그가 바라본 이그레트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따뜻하지만 어딘가 결여된 눈으로, 그렇게 할더를 지옥에서 건졌다. 마치 이 더러운 세상 위에서 가을비를 흩뿌리는 하늘처럼.

그리고 멍하니 내밀어진 손을 잡은 그에게 조그만 여자아이가 키득키득 웃으며 알려주었다.

‘가족이 되는 거야. 우리.’

할더가 입을 다물고 바닥만 내려다보자 프리드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을 받았다.

“세상을 바꿀 힘이 있는 자가 겁쟁이처럼 웅크리고만 있어서야 행복할 리가 있나.”

“프리드. 당신의 방식에는 동의하는 바이나 그분을 욕되게 부르진 마십시오.”

“아아, 그러지. 너나 레이야가 그 위선자의 열렬한 신봉자라는 사실을 깜빡했군그래.”

비꼬는 말에도 할더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무감정한 얼굴로 레이야에 관한 사실을 물었다.

“레이야는 지금 죽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아는 그분이라면 레이야를 죽일 리도 없고요. 정말로 그분의 행방을 찾은 게 맞습니까?”

“물론. 노인네가 아주 팔팔하더군. 까딱했더라면 자칫 못 알아볼 뻔했어.”

프리드는 붉은 모래시계를 손안에 굴리며 큭큭 웃었다.

“잊지 마십시오. 나는 그분을, 레이야를 죽이려는 게 아닙니다.”

“그래. 되찾으려는 거지. 나도 마찬가지야. 그저 힘을 가지고도 사용할 줄 모르는 짜증 나는 성격이 싫을 뿐이지. 그자는 내 오랜 친우가 아닌가.”

“정말입니까?”

“이런, 이런. 의심하는 거냐? 이거 참, 꼬맹이의 죽음이 그렇게나 충격적이었나. 어차피 사령은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해. 재료만 모이면 다시 되살리는 건 시간문제다. 할더.”

할더의 곁으로 다가온 프리드는 실수인 척 손에서 모래시계를 놓았다.

쨍 소리와 함께 모래시계가 깨져 붉은 가루가 쏟아졌다. 코코아색 모래와 붉은색 모래가 뒤섞여 반질반질한 대리석이 지저분하게 물들었다.

“모든 걸 바꾸고 사랑하는 자를 되찾는다.”

프리드는 선반으로 다가가 새 모래시계를 꺼내들었다.

“그 결의를 잊을 리가 있나.”

벽면을 가득 채운 선반에는 무수히 많은 모래시계가 세워져 있었다.

대신할 말은 아직 많다. 한 소녀를 잃고서 얻은 대가는 예상외로 값졌다.

‘도망치지 않았어.’

그 이그레트가, 진심으로 레이야를 죽였다. 그렇다는 건 답답할 정도로 굳건히 지켜오던 그자의 룰이 깨어졌단 뜻이다.

공평한 하늘에 가까웠던 현자가, 감정을 알고 사사로운 일에 전능한 힘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진심으로 사령을 상대하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이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마치 잠들어 있던 신이 깨어나 지상에 강림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이제 세상의 추는 단 한 사람에게 기울기 시작할 것이다. 만인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이 세상의 정의가 바뀐다.

프리드는 그 사실이 기대되어 비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기대하지, 이그레트 님.”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ㅎ

이걸로 18장이 끝났습니다. 다음 화부터 '19장 :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내일부터는 봄꽃이 한창이라고 하네요. 아니, 이미 한창이었던가? (..)

그럼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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