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57화 (157/252)

0157 / 0240 ----------------------------------------------

19장. 소망

쥬다스는 낯선 감정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잠시 구름에 가렸던 초승달이 다시 빠끔 고개를 내밀었을 즈음 그는 작게 한숨을 뱉으며 에단에게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처음 보는 주군의 눈물에 적잖이 놀라 있던 에단은 그렇게밖에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통 무엇이 미안하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 단발머리 소녀와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하지만 에단은 쥬다스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그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알아야 할 일이면 말을 꺼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단 특유의 충직하고 간단명료한 사고방식은 의도치 않게 쥬다스를 한결 편하게 해주었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자.”

“예.”

슬슬 자리를 떠나려던 쥬다스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닫고 시선을 내렸다.

“이건…….”

레이야의 심장을 찔렀던 얼음검이 아직 손에 쥐어져 있었다.

본래는 하얗게 냉기를 폴폴 뿌리던 얼음조각이었는데 지금은 까맣게 변색되어 검은 기운을 뿜어냈다.

그 모습은 이젠 단순히 얼음덩어리라고 볼 수 없었다.

백호가 코를 킁킁거리며 중얼거렸다.

「희한하고냥. 정령이 만든 검에 사령의 힘이 깃들 수가 있다냥?」

“사령의 기운을 흡수한 모양입니다.”

곁에서 그 검을 살펴본 에단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그 추측대로 레이야가 죽으면서 그녀의 기운이 얼음 결정 안에 흡수된 상태였다. 사령의 기운이 얼음을 통해 응집되면서 더욱 견고하게 달라붙었다.

루니가 검을 유지하고 있는 얼음을 흩어버리면 남아 있던 사령의 기운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바닥에 버리고 갈 수도 없다.

‘정령의 기운과 사령의 기운이 함께 공존하는 검이라.’

이론상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쩌면 레이야의 마지막 염원이 깃든 탓일지도 몰랐다. 사람의 마음이란 때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쥬다스는 잠시 고민하다 그 검을 에단에게 건넸다.

“사령의 힘이 깃들어 있다곤 하나 정령의 힘이 대부분이라 해롭진 않을 게다. 에단 네가 누구보다 검에 조예가 깊으니 잠시 맡아줄 수 있겠느냐?”

“명을 받듭니다.”

에단은 군말 없이 검을 넘겨받았다. 본래 속성이 얼음인 검이라 날은 물론이고 손잡이조차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에단처럼 전문적으로 검을 다루는 기사들은 충격을 줄이기 위해 손바닥을 감싸는 특수 글러브를 착용했기에 냉기 정도는 다루는 데에 무리를 주지 않았다.

팔뚝 하나 길이로 그다지 길이가 긴 편은 아닌데다가 따로 검집이 없었기에 에단은 이를 헝겊에 둘둘 싸서 다른 검과 함께 고정시켜 두었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백호가 쉼 없이 쫑알거렸다.

「그냥 네가 가지고 있는 편이 낫지 않냥? 왜 저 인간에게 준 거냥?」

쥬다스가 딱히 답을 해주지 않아도 백호의 일방적인 이야기는 주구장창 이어졌다.

「정령과 사령의 기운이 뒤섞인 검이라면 분명 사령에게도 치명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은데냥!」

“흠.”

「이 세상에 너만큼 정령을 잘 다루는 술사는 없을 거다냐…… 냥?」

갑자기 몸이 붕 들리는 느낌에 백호가 놀라 귀를 접었다.

쥬다스는 백호를 품에 안아 들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팔에 단단히 안긴 채 벙찐 백호의 콧등 위로 유니가 폴싹 내려앉았다.

「이그레트는 꼬마들을 엄청 아끼거든.」

「꼬마들?」

「저 에단이란 꼬마를 비롯해서 주변 아이들 모두. 평소엔 꼬마들도 제법 강해서 괜찮은데 이번처럼 사령이 나타나면 아무래도 상황이 어려워진단 말이야.」

「아하! 그렇구냐릉.」

백호는 고개를 위로 꺾어 물끄러미 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넌 아이들이 네가 없을 때에도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갖길 원한 거구냥?」

쥬다스는 말없이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을 마음에 들어 한 백호는 흡사 사람이 웃듯이 고로롱고로롱 목을 울렸다.

「그런데 네 이름이 그 유명한 ‘이그레트’가 맞다냥?」

하나를 해소해 주니 이번엔 백호의 호기심이 엉뚱한 쪽으로 튀었다.

「꼬마들한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 같던데. 이름이 두 개나 된다냥?」

‘이그레트’는 정령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이름이었다. 굳이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처음 그를 보는 순간 알았다.

자연의 사랑을 받는 자.

신수도 정령이었으니 본능적으로 그에게 이끌렸다.

물론 그에게 해동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곁을 맴돌게 되는 걸지도 몰랐다. 어떤 이유든 간에 백호는 그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그간 백호가 지켜본 바, 그는 정령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름보다는 ‘쥬다스’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었다.

삶은 한 번뿐이란 진실하에 백호는 당연한 의문을 품었다.

「이름 두 개 맞아. 그렇지만 이그레트는 이그레트니까.」

「크흥. 뭔가 사정이 있나 보구냥. 뭐 둘 다 상관없다면 편한 쪽으로 부르겠다냥.」

「아냐. 부르지 마.」

「므앙?」

당사자가 아니라 정령의 단호한 거절 탓에 백호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해버렸다.

유니는 퉁명스럽게 손가락을 뻗어 아기 호랑이의 이마를 쿡 찔렀다.

「애초에 안겨 있질 마. 떨어져.」

「맞아요. 우리 멍뭉이도 제 발로 걸어가는데!」

「그렇다요! 멍뭉이 자리를 빼앗지 말라요!」

푸른 늑대와 백호의 시선이 어색하게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아니, 난 이게 더 편해서…….」

어차피 크기도 커서 안기는 건 무리고. 거기까지 말하다 보니 왠지 조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자연계 정령인 그는 일부러 계약자가 선호하는 우아한 늑대의 모습을 유지한 건데, 막상 저 동물계 정령은 귀여운 아기 호랑이의 외형으로 계약자의 관심을 훔쳐갔다.

루니는 눈을 가늘게 뜨며 뚱하니 코주름을 잡았다.

「……역시 좀 거슬린다.」

「우이 씨. 내가 일부러 작아졌다냥? 사령술사에게 힘을 다 뺏겨서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지 않냥! 험악한 표정 짓지 말라냥.」

자연계 정령들과 백호 사이의 미묘한 대치 상태는 숙소에 돌아가 날이 밝을 때까지 이어졌다.

간밤에 어떤 난리가 벌어졌는지 전혀 모른 채 잠에서 하나둘 깨어난 일행은 무척 피로한 얼굴로 멍하니 박살 난 창문이며 바닥 등을 훑어보았다.

“이게 무슨……?”

“삐이이.”

바이칼과 플루비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누가 봐도 습격받은 현장이었다. 이 난리가 날 때까지 전원 일어나지 못한 건 문제가 컸다.

심지어 숙소 주인이나 다른 투숙객들도 아침이 될 때까지 전혀 상황을 몰랐다.

비슷한 시기에 잠에서 깨어난 란과 크리스티나도 옆방에서 옮겨와 그들과 합류했다. 그리고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방 안을 보고 기함을 금치 못했다.

“좋은 아침이구나.”

유일하게 쥬다스만이 이런 와중에도 변함없이 태연했다.

그는 이미 출발할 채비를 마치고 여유롭게 너저분한 방 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숙소 주인에게 전투로 인한 피해배상은 했고, 깨지고 조각난 쓰레기들은 한 곳에 쓸어모아두고 이불도 손수 개어 장롱에 넣었다.

완전히 박살 나버린 창문 너머로는 상쾌한 봄바람이 햇살과 함께 살며시 흘러들어왔다.

“형님,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음, 있기야 했지.”

쥬다스는 짤막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밤중에 사령이 습격했었고 에단이 막아냈으며 그 과정 중에 검상을 입은 사령이 대나무 숲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령은 소멸했다.

“맙소사. 사령이라니.”

이야기를 들은 후 세이지가 인상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나머지 일행의 표정도 가히 좋지 않았다.

자칫 큰일로 번졌을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자책과 의문, 안도를 차례로 떠올리는 이들 사이에서 콜만이 유일하게 다른 이유로 표정이 굳었다.

“쥬다스 님. 그 사령이 죽었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괜찮…… 으십니까?”

사령이 죽었다는데 뜬금없는 걱정이 이어지자 모두의 의아한 시선이 콜에게로 쏟아졌다.

콜이 기억하는 레이야는 소녀가 아니라 성숙한 여인이었다.

당시 콜은 그녀보다 어렸고 그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이나 배신의 징후를 눈치채기엔 너무 순진했다.

그래서 레이야가 다른 두 동료와 함께 어떤 마음으로 스승을 배반하였는가 따위는 모르기도 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들이 미웠다.

‘그자들은 도대체 왜 자꾸 스승님을.’

어렸던 그날 울면서 떠올렸던 원망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속을 끓였다.

그치들이 죽든 살든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거기에 다시 스승을 끌어들이는 건 치 떨리게 화가 났다.

한 번 찢어놓은 가슴을 억지로 다시 벌려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콜은 진심으로 분노했고 또 걱정했다. 굳은 표정으로도 감추어지지 않는 노제자의 감정을 읽어낸 쥬다스는 부러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단 다들 안색이 좋지 않은데.”

“아, 그건.”

긴 밤 내내 사정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은 서로 퀭한 눈으로 멋쩍은 시선을 교환했다.

심지어 와이번마저 끼에에 하품을 터뜨렸다. 바이칼이 플루비를 안은 채 대표로 보고했다.

“그게, 귀기가 감돈다 하더니 실제 수면상태에 관여하는 모양입니다. 어젯밤 한 명도 빠뜨림 없이 전부 가위 눌림을 경험했습니다.”

“가위 눌림?”

“이상하게 계속 악몽을 꾸고요. 중간 중간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깨긴 했는데 물속에 있는 것처럼 울리기만 하고 제대로 들리진 않았어요. 거기다가 몸이 전혀 움직여지질 않아서.”

세이지가 덧붙여 설명했다. 가위를 눌리던 당시엔 마취약에 취하기라도 하듯 손끝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일부 기사단원 사이에선 귀신을 봤다는 목격담마저 나오고 있었다.

“분명 남자만 있는 방인데 기분이 쌔해서 눈을 떠보니 웬 머리 긴 여자가 옆에 누워 있더라나? 처음엔 누가 침입한 줄 알고 놀라서 얼굴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더니 똑같이 스르르 고개를 돌리더라고…….”

“으아아아! 왜애애! 얼굴은 또 왜 확인하는데!”

괴담에 유독 취약한 바이칼이 얼굴을 싸매고 절망했다. 아무 생각 없이 어느 기사의 경험담을 읊던 세이지가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근데 사실 저도 무슨 여자 목소리 같은 걸 들은 것도 같…….”

“아, 제발!”

몸부림치는 바이칼을 한심스럽게 쳐다본 에단이 작게 한숨을 뱉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확인한 결과 현재 나라 전체에 이와 같은 괴현상이 유행 중이라 합니다. 원흉이 밝혀지지 않아 상부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 모양입니다.”

“일단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이니 수도로 가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구나.”

해동이 제국의 동맹국이라곤 해도 당장 쥬다스 일행이 논할 개재는 아니었다.

부정적 영향을 받긴 하지만 실제로 생명이 직결된 문제는 아니었고 원흉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들은 일단 해동의 왕을 먼저 만나보기로 했다.

아침이 되어 수도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예전엔 식목일에 놀았던(?) 것 같은데 이젠 그저 평범한 화요일이네요.ㅎ

나무.. 나무를 심고 싶다...!

직접 심지는 못해도 만개한 꽃들을 보면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입니다. 근처 릉(?)에 소풍가고 싶군요! (릉이 의외로 칙칙하지가 않고 꽃도 많고 넓습니다. 아이들 소풍명소가 하나 있는데 몇년전에 가보니 경관이 엄청 좋더라고요.ㅠㅠ)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