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99화 (19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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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융합

그렇게 시솝을 만나겠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리키가 임시로 일행에 합류했다. 자신만만해했던 대로 리키는 시솝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 시솝이 직접 모습을 나타나는 일은 절대 없어. 그자는 정치엔 모래 한 톨만큼도 관심이 없으니까.”

“나라가 망해도?”

“그 정도로 큰일이 벌어지면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진 그래.”

의자를 거꾸로 돌려 앉아 등받이에 턱받침을 한 바이칼이 질린 눈으로 물었다.

“아직까지라면……. 설마 300년이라는 집권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응.”

“참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 그쯤 틀어박혀 있었으면 존재 자체도 잊힐 만한데.”

“시솝이 괜히 서열 1위가 아니야. 그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미드가르드 전역을 늘 지배하고 있어. 아마 지금 우리 이야기도 듣고 있을 걸?”

“지금? 어떻게?”

“모든 기계 시스템은 시솝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도록 설정이 되어 있어. 시솝이 왕이라면 기계는 전부 그의 기사야.”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이지는 오싹 소름이 돋아 팔뚝을 쓸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을 거란 이야기에 목줄을 매놓은 개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 세이지만큼은 아니더라도 불쾌함을 느낀 에단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치 신이나 다름없군.’

미드가르드가 어째서 교황청과 대립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시솝의 권한은 제국 황권이 지닌 권력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재물, 자유, 심지어 건강과 수명까지도 모조리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아무튼 그동안 시솝이 관심을 보인 주제는 ‘질서의 붕괴’, 그리고 ‘화제성’이야.”

리키는 설레는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너흰 벌써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해냈어. 노예 시장을 닫아버리고 핫이슈 검색어에 올랐잖아! 이미 시솝은 너흴 주시하고 있을 거야.”

“300살 넘은 아저씨가 어디선가 몰래 지켜보고 있다니 기분이 좀 나쁜데…….”

그러자 가야가 단호하게 손날을 세워 바이칼의 머리통을 통 내려쳤다.

“단정 짓지 마, 멍충아. 아직 아저씨인지 아줌마인지도 모르잖냐?”

“윽. 아줌마라고 해도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진 않은데요.”

“그리고 300살이 넘었으면 너희 기준이면 아저씨가 아니라 할아버…….”

거기까지 말하던 가야는 문득 자신이 신수로서 존재해 온 세월이 천 년도 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말꼬리를 돌렸다.

“―가 아니라 형이라고 불러야지.”

“에이, 가야 님. 무리수 두지 마십시다. 세상에 30살도 아니고 300살 차이 나는 형이 어디 있답니까?”

“남자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형이고 오빠다. 아저씨나 할아버지 따윈 되지 않아.”

“오? 그거 왠지 멋진 말씀이네요.”

“난 원래 멋져.”

비장한 어조로 말하는 가야를 보며 바이칼이 경탄을 터뜨렸다. 은근히 죽이 잘 맞는 신수와 수하를 바라본 쥬다스가 뭐라 끼어들 말을 찾지 못하고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흠……. 그럼 리키 네가 볼 때엔 이제 우리가 무엇을 더 하면 되겠느냐?”

저 바보들은 뭔가 싶은 표정으로 바이칼과 가야를 쳐다보고 있던 리키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들 강하다며? 기왕 시솝에게 도전을 할 거면 화끈하게 미드가르드를 뒤흔들어 봐. 어디 보자, 나한테 마침 미드가르드 서열 순위권자의 정보가 있으니까.”

리키는 손등에 장착한 연분홍 빛 기계, 내비게이션 홈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겨 보이며 개구쟁이처럼 헤헷 웃었다.

“서열 깨기. 어때?”

* * *

메이벨 시티.

규모는 다른 도시에 비해 작은 편이지만 집 밖으로 멀리 나가기 귀찮아하는 이들을 위해 편의시설도 오밀조밀 잘 구성해 놓았고 큰 사건 없이 늘 조용하여 제법 사랑받는 장소였다.

특히 아름다운 자연의 강물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마력 홀로그램 운하가 흐르고 있어 삭막한 도시 풍경보다는 쾌적하다는 평을 듣곤 했다.

지난주 콜로세움을 기점으로 드디어 미드가르드의 공식서열 100위권 안에 들어오게 되어 골드 등급으로 승급한 신예 ‘카자하’가 바로 이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한적한 호프에 들어가 골드 진입을 홀로 자축하며 술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소문 들었나?”

덜컹.

비어 있던 맞은 자리에 덩치 큰 사내가 앉았다. 카자하는 놀란 척도 하지 않은 채 주전자만 한 잔에 담긴 맥주를 한입에 깨끗이 비우곤 대꾸했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노예 시장 얘기를 또 하려는 거면 콧구멍에 후추통을 처박아주마.”

소식을 전하러온 동료가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 얘기의 연장선이긴 한데……. 흠흠, 그 도전자들이 지금 이 도시에 와 있다고 하더군.”

“뭐?”

시솝의 도전자들!

미드가르드인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던 화젯거리였다.

지겹다고는 했어도 카자하 역시 미드가르드의 상위 서열을 차지한 골드 등급자. 바로 지척에 당사자들이 존재한다는 얘기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건방진 도전자 놈들이 근처에 있었다니.’

시솝은 미드가르드의 자존심이다. 그에게 도전한다는 건 미드가르드를 전부 자신의 발밑으로 두겠다는 뜻이나 매한가지다.

그래서 정말 그만한 실력이 있다고 인정받기 전까지는 상위 서열일수록 그 도전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쾅!

테이블이 부러질 듯 거세게 짚고 일어선 카자하가 동료를 향해 눈알을 부라렸다.

“그 자식들 위치는?”

“진정하고 마저 얘기를 좀 들어봐.”

“어차피 나보고 처리해 달라고 물어온 정보 아닌가? 자세한 위치 당장 넘겨.”

동료는 한숨을 쉬고 위치좌표를 알려주었다. 워낙 작은 도시라 그런지 건물 위치가 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숙소에 머물고 있음을 확인한 카자하가 착용 중인 내비게이션을 작동시켰다. 그러자 띠링 하는 기계음과 함께 보라빛 정령이 카자하의 손등에서 튀어나왔다.

「꺄하항, 주인님을 위해 불철주야 일하는 Navi.M40이에용! 감지된 위협 0건~ 음주로 인한 약한 상태이상 1건이 발견되었어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발랄한 정령의 목소리가 호프에 울려 퍼졌다. 내비게이션의 발랄한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움찔 놀라 그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연계 정령과 달리 기계형 정령들은 누구나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주인이 원한다면 파장을 보내 귓속말 하듯 몰래 대화를 주고받기도 한다.

카자하는 쓸데없이 답답하기만 한 귓속말 기능을 해제하고 줄곧 이렇게 큰 소리로 대화하곤 했다.

“입력한 좌표를 토대로 시솝의 도전자들이 있는 현재 위치를 찾아. 그리고 전투를 준비해.”

「경고, 주인님 음주 상태예요! 경고, 전투는 늘 맑은 정신으로!」

“경고는 무시한다. 전투 모드.”

주인의 안위를 위해 쫑알대던 정령은 재차 이어진 명령을 받고 곧장 경고를 멈추었다. 그러더니 몸에서 화앗 빛을 뿜으며 무기로 변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들기는커녕 밑에 깔리거나 반동으로 팔이 부러질 법한 거대한 마력총이었다.

“놈들의 위치 탐색은?”

「좌표 확인. 생체 반응 확인. 위치정보 갱신.」

큰맘 먹고 새로 장만한 카자하의 내비게이션은 확실히 비싼 값을 했다. 정령은 물 흐르듯 빠르게 주변을 탐색하더니 결과를 알려주었다.

「목표 대상은 1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응?”

막 호프를 나가려 문고리를 잡았던 카자하가 잠시 멍하니 자리에 못 박혀 섰다.

‘1미터?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나?’

순간 내비게이션이 고장이라도 난 게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황당한 수치였다.

‘고장이 아니라면 이 문 밖에 바로 놈들이 있다는 뜻.’

카자하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발로 문짝을 뻥 걷어찼다. 싸구려 철판으로 대충 못 박아 기워놓은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감히 시솝께 대항하는 오만방자한 도전자가 누구냐!”

총을 든 채 버럭 소리부터 지르고 본 카자하의 시야에 반가면을 쓴 소년이 들어왔다.

검은 지팡이를 짚고 검은 옷자락을 길게 늘어뜨렸으면서 얼굴의 반을 가린 가면만 새하얗다.

“호오, 열렬한 환대 고맙군.”

이런 건 예기치 못했는데, 라며 소년이 가벼이 웃었다. 웃는 입매와 달리 가면 사이로 엿보이는 금색 눈동자는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사냥.’

카자하는 본능적으로 상대의 기세를 느꼈다.

‘놈은 나를 사냥하러 왔다.’

그러고 보니 문을 그렇게 세게 걷어찼는데도 소년은 멀쩡해 보였다.

카자하가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오히려 강철로 된 문짝이 걸레짝마냥 갈기갈기 찢어져 흩뿌려지고 있었다.

후웅!

정체를 알 수 없는 녹색 바람이 이를 드러낸 맹수처럼 위협적으로 주변을 맴돌았다.

“제법 오만하게 굴 자격은 갖춘 모양이지? 제대로 된 훈련만 받으면 골드 등급에 입성할 수 있을지도.”

“저런, 그새 잊어버린 것이냐? 어리석구나. 분명 조금 전 네 입으로 말했을진대.”

“……?”

소년은 검은 지팡이를 들어 그를 가리키며 혀를 찼다. 당당을 넘어 대범하기까지 한 태도에 카자하가 영문을 모르고 서있자 소년은 같잖다는 듯 지팡이를 어깨에 걸쳤다.

“나는 시솝의 도전자다.”

그리곤 홱 뒤돌아섰다. 사납게 피부를 스치던 바람결도 그를 따라 훅 누그러졌다.

“골드 등급은 100위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들이라고 들었는데. 헛걸음이었군.”

“무슨!”

“……학살에는 흥미 없어.”

완벽한 무시였다. 소년은 조롱하려는 의도 따윈 손톱만큼도 없이 진심으로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카자하가 뿌득 이를 갈고는 거대한 마력총을 들어 올렸다.

“자만하지 마라! 학살이 될지 피살을 당할지 어찌 그리 확신하고 등을 보이는가!”

그는 경고를 듣고도 멈추지 않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일반 마력총에 비해 훨씬 많은 마력을 저장할 수 있는 총에선 응축된 강력한 총탄이 두두두둑 연발로 발사되었다.

그리고 곧 카자하는 깨닫고 말았다.

「시스템 작동 정지.」

날아간 총탄은 전부 푸른 장막에 가로막혀 각설탕이 커피에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놀랄 틈도 없이 들고 있던 마력총이 느닷없이 작동을 정지하며 본래 정령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게 대체.’

정령이 가진 능력을 활용한다면 총 말고도 다른 공격도 가능했지만 하필 그의 내비게이션은 무엇 때문인지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자만은 약한 자들이 부리는 주책이지.”

그리 말하는 소년은 혼자가 아니었다. 처음엔 짓눌러 버려야겠다는 생각에 가려 보이지 않던 주변 인물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자신하는 것이다.”

가면을 쓴 소년은 그를 따르는 수하들에게 둘러싸여 유유히 사라졌다.

몇 잔 마시지도 않은 술기운이 뒤늦게 참패에 대한 부끄러움처럼 카자하의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시야가 훌렁 뒤집히는가 싶더니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우르릉!

천둥이 울었다. 사계절 내내 언제나 맑은 날씨를 유지하던 하늘이 그 평상을 깨뜨렸다.

“별일도 다 있군…….”

카자하는 한 방울, 두 방울 천천히 얼굴 위로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을 감상하며 중얼거렸다.

“미드가르드에서 소나기라니.”

날씨마저 시솝의 지배하에 통제되는 영토에서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메이벨 시티의 골드 등급 카자하를 기점으로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시솝의 도전자가 상위 서열자들을 무릎 꿇리기 시작했다’라고.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화로 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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