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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융합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늘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던 시스템에 균열이 생겨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밤, 골드 등급의 최상위권 서열권자가 쓰러졌다.
“하…… 하하.”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버린 서열자와 그 추종자들을 지켜보던 리키가 헛웃음을 지었다.
강할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건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쥬다스가 다루는 힘은 상대를 전부 무력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높은 서열권자라고 해도 그 앞에서는 갓 태어난 아기나 다름없었다.
“대단해.”
리키는 쥬다스의 뒤를 따라가며 쓰러진 사람들을 힐끔힐끔 살펴보았다.
죽지는 않았어도 의식을 잃을 정도의 큰 타격을 받았다. 이들이 전부 명성 드높은 서열권자란 사실이 소년을 오싹 소름 돋게 만들었다.
“……나도 당신처럼 강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도저히 질투조차 할 수 없는 강함이다.
리키는 그저 그를 부러워했다.
“저기. 왜 굳이 더 강해지려고 하는 거야?”
곁에서 그런 리키를 의아하게 여긴 세이지가 질문을 던졌다.
“여긴 능력주의 사회잖아. 2년간이나 시솝을 찾아다닐 여력이 있는 걸 보니 너도 이쪽 사회에서 어느 정도 능력이 있는 것 같은데. 그냥 네 능력만큼 누리고 살면 되지 않아?”
“속 편한 소리를 잘도 하네.”
헹, 콧방귀를 뀌며 투덜거린 리키는 자신의 내비게이션 제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대답했다.
“왜냐고? 여기선 남들보다 뛰어나야 그만한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까. 다들 더 잘난 삶을 살려고, 더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노력하는 거야.”
분홍빛 정령이 막 잠에서 깨어난 반딧불처럼 빙그르르 반짝였다. 그걸 보며 세이지도 마냥 신기하게만 보았던 무법국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을 수정했다.
‘신분제가 아닌 능력주의 사회라고 해서 모두에게 평등한 건 결코 아니로군.’
미드가르드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일국의 지배층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감이 잡혀갔다.
충분히 답을 얻은 세이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앞서 걸어가던 쥬다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남들보다 더 잘난 삶이라 함은 어느 정도 선을 말하는 것인고?”
“정해진 선 같은 건 없어. 그냥 계속 경쟁할 뿐.”
“너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는 셈이로구나.”
리키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딱히 누군가를 목표로 하고 달려가는 삶은 아니었다.
무법국가 미드가르드에선 타인과 경쟁하지 않으면 뒤쳐진다. 기계학을 배워서 획기적인 발명품을 개발하든지, 아니면 타고난 이능을 전투에 접목시켜서 강한 힘을 갖든지, 혹은 뛰어난 머리로 명성을 떨치든 뭐라도 하나는 남들보다 잘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매일 바쁘게 움직여야겠구나.”
“맞아. 사는 게 바쁘고. 계속 바쁜 와중에…….”
“그래.”
“마음 어딘가에 아주아주 작은 구멍 하나가 뚫려서.”
그 구멍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약을 바를 수도, 아프다고 호소할 곳도 없다.
“작고 대단하지도 않은 그 구멍 하나가 가끔씩 너무 시리고 아플 때가 있어.”
왜 아픈지 이유조차 모르고 그렇게 고통스럽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떠난 아버지 때문인지, 아니면 숨 가쁘게 살아가야만 하는 일상이 힘들어서인지는 리키 자신도 몰랐다.
“그래서 이유 없이 슬퍼질 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어. 괜찮아졌다 싶으면 또 아무렇지 않게 살다가.”
어느 날 의미 없이 툭 터지고 하는 그런 눈물방울. 그건 눈물 흘려본 자만이 아는 공허한 슬픔이었다.
“무섭잖아. 내 마음조차 어떤 게 진실인지 모르니까. 그래서 강해지려는 거야.”
상류층에 입성하게 되면 적어도 무시 받는 삶은 살지 않게 된다. 소위 성공한 사람이 되어 힘과 명예, 부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리키는 만일 자신이 쥬다스만큼 강했더라면 2년간 고생할 필요도 없이 간단히 시솝을 만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는 당신은 그렇게나 강하면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겠네?”
“그리 보이느냐.”
“당연하지! 누구나 당신 앞에 무릎 꿇었을 테고.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질 수 있었겠지? 위협당할 일도 없으니까 아무것도 잃은 적 없을 것 같아.”
“…….”
쥬다스는 그저 침묵했다. 리키의 짐작은 전부 다 틀렸다. 사람들은 그가 가진 거대한 힘을 탐내 어떻게든 자신들의 발밑에 꿇리려 했다.
그리고 남들에겐 없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주길 바랐다.
가족처럼 소중히 여겼던 아이들은 그의 등에 칼을 꽂았고, 차가운 배신만이 되돌아왔다.
제국의 황자로 다시 태어난 삶에서조차 그는 세상에 존재한단 이유만으로 목숨을 위협당했고 비참하게 어미를 잃었다.
살아갈 자리를 지키고 지금 그의 곁에 함께하는 친우들을 얻기까지 무던히 노력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어린아이는 그저 보이는 대로 그의 삶을 부러워했다.
“좋겠다. 원하는 대로만 살아왔겠네.”
‘나는…… 그렇게.’
원하는 대로 살아오지 못했어.
그가 평범한 열일곱 살이었다면 했을지도 모르는 항변이었다. 하지만 쥬다스는 답하지 않고 그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그랬으려나.”
“……쥬다스 님.”
작은 부름에 돌아보자 내내 조용히 그를 따르던 크리스티나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정작 그가 웃어버리니 말문이 막혀 버린 표정이었다.
그녀의 바닷빛 눈동자 속에 담긴 걱정을 읽어낸 쥬다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
결국 크리스티나는 입을 다문 채 째릿 리키를 노려보았다. 그 서늘한 눈빛을 느낀 리키가 영문 모를 표정으로 쥬다스에게 속닥거렸다.
“이상해. 당신 부하들은 왜 저렇게 다 날 싫어하는 걸까?”
“흠. 글쎄다.”
에단에 이어 크리스티나에게까지 미움을 산 리키는 억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전방 갈림길에서 우측 골목입니다. 이어서 목적지 부근입니다.」
내비게이션 제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방향을 알렸다. 그러자 늘 맡아오던 역할을 잃은 유니가 쀼루퉁하니 볼을 부풀렸다.
「체엣.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세부 정보를 찾기엔 어렵다고 하지 않았다요?」
「이 나라는 너무 막힌 부분이 많단 말이야. 날씨 조절이다 뭐다 하면서 배리어를 쳐놓고 자연의 바람은 들어가지 못하게 하질 않나, 창문을 죄다 유리로 막아버리질 않나!」
「그래서 제이의 도움을 받는 거 아니다요?」
유니는 순진하게 대꾸한 토니의 볼따구를 양손으로 감쌌다.
「토니.」
「……?」
그리고 꾸욱 꼬집어 찰떡을 늘리듯 쭉 늘렸다.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이 멍청아!」
「우에에에!」
「‘제이’라고 친근하게 쟬 부르지도 마!」
「끄앙. 아라떠여.」
유니는 답을 듣고 나서야 울먹이기 시작한 토니를 놓아주었다.
「그치만 제이를 제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른다요?」
「어차피 불러봤자 별 반응도 없잖아.」
기계형 정령인 제이는 다른 정령들과 소통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오로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정령이란 본디 계약자에게 제일 민감하게 구는 성향이 있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일방적으로 한 사람에게만 반응하진 않는다.
정령에게도 감정이 있고 사고능력이 있다. 개체마다 차이야 있었지만 오히려 인간보다 더욱 풍부한 감성체계와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진 정령도 많았다.
「솔직히 쟤네, 마음에 안 들어. 사람들이 겉껍데기만 흉내 내서 만든 장난감 같단 말이야.」
기계형 정령은 감정도 없고 이성도 없다. 그저 입력한 프로그램에 따라 주인을 도울 뿐이다. 이미 상품으로 거래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정령과는 차이가 컸다.
「그건 그렇다요.」
토니는 물끄러미 제이를 쳐다보다 추욱 날개를 늘어뜨렸다.
「그래도 친해지면 재밌을 텐데.」
「응, 좀 더 알아볼 필요는 있을 것 같긴 해요. 나중에 이그레트가 여기서 하려는 일이 끝나고 나면.」
시무룩해진 땅의 정령을 향해 카니가 부드럽게 제안했다.
「같이 남아서 기계형 정령들에 대해 조사해 볼래요, 토니?」
「응요!」
「……네가 웬일이래?」
평소 아기 캥거루처럼 쥬다스에게 붙어 있길 좋아하는 카니답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그레트와 떨어져 있기 싫어했잖아.」
「많이는 말고 조금만 보고 오려고요. 몰랐던 정령들을 보고 나니 관심이 생겨서.」
「끙, 하긴. 카니 넌 옛날부터 호기심이 많은 편이긴 했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표정의 유니를 보며 카니는 후후 웃었다.
「당연히 우리는 이그레트와 언제까지고 함께할 테지만.」
노을처럼 말간 다홍빛 눈망울이 느릿느릿 깜빡였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잠시의 틈도 없이 손에 쥐려 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고.」
정령은 계약자의 내면을 닮아간다. 그가 성장할수록 그의 정령들 역시 어린아이 같은 집착에서 벗어나 보다 성숙한 애정을 품게 되었다.
계약자와의 분리에 대한 불안을 품고 있던 카니가 먼저 이를 시도하겠다고 나선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카니는 방긋 웃으며 말을 맺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그레트가 나의 계약자란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가만. 너 또 은근슬쩍 소유권 주장을…….」
「목적지에 도달하였습니다.」
제이의 안내 음성에 따라 정령들의 대화가 멈추었다.
서열깨기, 즉 상위권 서열권자들을 무릎 꿇려 정복하는 도중인 그들 일행이 이번 목표로 삼은 건 드디어 골드 등급을 넘어 시솝의 바로 아래 권력자라는 ‘스탭’들이었다.
스탭은 미드가르드 내에 총 10명이며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시솝 대신 각자 나라 관리의 중요한 부분을 맡아 하였다.
그중 하나인 등급관리 스탭이 바로 이번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콜로세움’…….”
제이가 안내를 해온 곳은 끝이 보이지 않도록 높이 솟은 원형 건물 앞이었다.
이른바 콜로세움, 즉 결투를 통해 국가공식 서열등급증을 발행받는 곳이다.
제국의 건축물들은 일반적으로 2층에서 3층이었고 높아봐야 5층 정도였다. 그리고 미드가르드에서 본 건물들은 대부분이 5층 이상으로 높긴 했다.
그런데 이 콜로세움은 미드가르드의 다른 건물보다도 월등하게 높았다.
층수만 따져 보아도 장장 33층!
해를 가리고 하늘과 맞닿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어찌나 넓던지 콜로세움 건물 하나로도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이열~ 장난 없네요. 이렇게 높은 건물을 어떻게 지었을까요?”
“꾸꾹.”
“그렇지? 플루비. 너도 저기까진 못 날겠지?”
“까깍!”
바이칼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그러자 그의 어깨에 앉아 있던 플루비도 덩달아 날개를 까딱이며 괴성을 내질렀다.
“등급을 올리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니까 크게 지을 수밖에. 여긴 골드 등급전만 취급하는데도 이 정도야. 실버나 브론즈 전당은 이거보다 훨씬 더 커.”
“이보다 더 크면 그게 건물이냐. 산이지.”
“산이 그렇게나 커?”
리키는 오히려 방대한 자연을 본 적이 없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냇물, 무수한 식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이란 미드가르드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대상에 신기함을 느끼며 콜로세움 출입구로 들어갔다.
밤중에도 건물 내부는 대낮같이 환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바글바글 들어차 있었기 때문에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눈여겨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어느 틈엔가 또 금요일이 돌아왔군요. ^^ 일주일 중 가장 좋아하는 금요일! 으하하.
독자님들도 행복한 금요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ㅎ
참, 이그레트 완결이 이제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이번 6월에서 7월 사이에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예정 중입니다. 마지막 최종장을 찍는 그 순간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