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07화 (207/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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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융합

“리키가…….”

“모쪼록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본래 어린아이일수록 앞뒤 가리지 않고 잔인해질 수 있는 법이니까요.”

꺼져가는 눈빛으로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눈에 보이는 것만 바이러스라고 생각하시면…… 곤란…….”

자세히 물어보려던 찰나 시솝의 몸이 허물어졌다. 찬 바닥에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오딘 헨리를 보며 쥬다스는 손 안에 쥐었던 화염을 훅 흩었다.

파라락 날아든 유니가 그 앞을 빙글빙글 서성였다.

「얘 뭐야. 죽은 거야?」

「죽은 건 아닐 거다. 본체가 따로 있으니.」

「죽진 않았어도 더 이상 움직이진 못하는 것 같다요.」

「으응, 글쎄요. 리키라는 꼬마애가 시솝의 권한을 훔쳐갔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카니의 대답에 유니가 끙 팔짱을 끼며 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어떡할래? 만일 시솝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거면 그 애가 이제……. 이그레트?」

잠깐 사이 그의 안색이 몹시 좋지 않았다. 쥬다스는 떨리는 손으로 근처 무너진 벽을 짚었다.

‘숨이, 꼭, 죽어갔을 때처럼.’

전생의 죽음이 떠오를 만큼 강렬한 고통이 벼락처럼 찌르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갑작스런 통증에 숨마저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

정령들도 그가 느낀 고통을 대략적으로 감지하고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그레트, 어디 아파?」

「히잉. 아프다요?」

어지간한 고통으로는 내색조차 하지 않던 그였다. 그런 그가 이번엔 숨 쉬는 것도 잊고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거품을 물고 기절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쿨럭!”

한차례 피를 토해낸 후에야 그는 간신히 가빠진 호흡을 정돈했다. 피는 손바닥을 타고 흘러넘쳐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쥬다스는 자신의 상태가 무엇 때문인지 그 원인을 쉽사리 짐작해 낼 수 있었다.

‘바이러스. 대체 어느 틈에?’

제이가 뿜어내는 바이러스를 보자마자 바람으로 경로를 완벽히 차단했고 불로 전부 태워 버렸다. 그 과정에 틈은 없었다.

하지만 문득 시솝이 조금 전 한 말이 떠올랐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는 건가.’

방울 형태의 바이러스를 직격으로 맞는다면 더욱 끔찍한 효과가 기다리고 있었겠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아주 미세한 양만 침투하였다.

그는 소매로 대충 피를 닦아내곤 길게 숨을 내뱉었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나니 당장은 견딜 만했다.

「괜찮아? 바이러스인가 뭔가 하는 그거 때문인 거야?」

“……괜찮아, 유니.”

“하지만 주인 지금 안색이.”

기대고 있던 벽에서 손을 떼며 다시 바로 선 쥬다스를 보며 가야가 머뭇머뭇 걱정의 말을 건넸다.

“나는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보다 만일 리키가 시솝의 힘을 강제로 빼낸 거라면 문제가 조금 커지겠구나.”

「그건 차라리 잘된 거 아냐? 꼬마가 약속을 어긴 건 괘씸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솝의 힘을 빼앗아온 거니까. 이제 더 싸울 이유가 없잖아.」

“그렇게 평화롭게 흘러가주면 좋겠다만.”

쥬다스는 다른 방으로 건너가는 통로를 찾기 위해 바람을 사용했다.

초록색으로 반짝이는 바람들이 훅 하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시솝의 말대로라면 이 라그나로크는 여러 개의 방으로 이어져 있을 것이다. 그중 리키와 다른 일행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서둘러 찾아가야만 했다.

“굶주린 이에게 너무 많은 음식을 주면 배를 앓는 법이지.”

그릇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거대한 힘은 오히려 독이다.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큰 힘을 손에 넣은 사람은 쉽게 그 힘에 취한단다.”

「과한 욕심을 부린다는 소리다요?」

「아, 나 알 것 같아. 예전에 이그레트가 만난 사람들도 그랬었잖아.」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그레트’의 힘을 탐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유한 성격과 미천한 신분을 약점으로 삼아 발아래 꿇리려 했다. 그가 가진 힘을 자신들이 휘두를 수 있게 되길 바랐다.

「나야 뭐 이그레트를 자기 발밑에 두려고 한 게 제일 짜증 났지만.」

그는 과거사를 떠올리며 꿍얼거리는 유니를 가만 바라보았다.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에 와선 그때 만난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각양각색의 사정과 이유로 그들은 간절했다. 타인의 불행보다 자신의 소망이 더욱 중요했을 뿐이다.

꼭 지금 리키가 하는 행동처럼.

「웅?」

안색이 창백해진 계약자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던 토니가 문득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다 무언가 알아차리곤 파다닥 쥬다스의 머리 위에서 내려와 짧은 팔다리를 붕붕 휘저었다.

「으에에. 큰일요! 큰일났다요! 이그레트!」

「뭐야. 왜 또 갑자기 오두방정이야?」

「유니이! 유니는 이게 안 느껴진다요?」

「그니까 뭐가?」

라그나로크는 시솝이 만들어낸 인공공간이었다. 정령들의 감은 외부에 있을 때보다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바람의 정령조차 감지하지 못한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해 낸 땅의 정령을 말똥말똥 쳐다보던 카니가 움찔 눈을 깜빡였다.

「어머나. 이건 좀 큰일이 맞긴 하네요.」

「흐엥. 어떡한다요.」

「……니들 자꾸 못 알아듣게 말할래?」

큰일이고 자시고 당장 유니의 손에 뺨을 꼬집히게 생긴 토니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빽 소리쳤다.

「여기, 무너지고 있다요!」

「뭐?」

「이 공간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거다요!」

그 말을 듣자마자 유니도 흔들리는 기류를 느끼고 흠칫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갓 자라난 새싹처럼 고운 연두색 하늘이 깨진 빙판처럼 이리저리 금이 가 있었다. 때맞춰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덩이들이 작게 진동하며 기름에 콩 볶듯 드드득 튀기 시작했다.

「시솝이 쓰러져서 라그나로크도 닫히려나 봐. 지금 애들을 찾는 게 문제가 아니야, 이그레트.」

정령들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쥬다스는 별다른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유니는 그의 주변을 빙글 돌며 한 차례 더 경고했다.

「여기서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이 라그나로크와 함께 소멸할지도 몰라.」

무수한 방 중 일행이 있는 방을 찾는 게 어려울 뿐, 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가 다루는 정령의 힘이라면 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인공 공간을 찢고 밖으로 탈출할 수 있다. 쥬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찢어버리면 되겠구나.”

그가 손을 뻗자 응축된 4속성 정령에너지가 콰앙 폭발을 일으켰다.

그러자 허공에 꼭 신문지를 여러 겹으로 접어 구멍을 낸 것처럼 괴상한 통로가 생성되었다. 통로를 넘어 다른 방으로 이동하자 굽이치는 은빛갈대밭이 보였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올려다본 하늘이 퍼즐조각처럼 부서져 흩날렸다.

「아으으, 정말! 이런 때에도 고집 부릴 셈이야? 너 지금 상태도 별로 좋지 않잖아.」

쥬다스는 갈대를 헤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유니 말대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그의 상태는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시간이 가면서 라그나로크도 무너지고 있었다. 혼자 밖으로 나가서 상태를 돌볼 여유 따윈 없었다.

‘모두를 찾아서 나가야 해.’

그는 욱신거리는 가슴께를 짚으며 잔기침을 뱉었다.

소량이라고 해도 바이러스는 인체에 몹시 치명적이었다. 이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일단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시솝이 원하는 대로 실험을 하긴 하는 셈이군.’

그리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그러던 순간 먼저 퍼져 나갔던 유니의 바람이 빠르게 그에게로 되돌아왔다.

「어? 찾았어. 다행히 전부 근처에 있었나 봐.」

그는 바람의 인도를 따라 곧장 일행에게로 향했다.

그들도 마침 라그나로크의 붕괴를 알아차리고 곤혹스러워하던 중이었다.

봄눈처럼 사뿐사뿐 흩날리는 연두색 하늘 조각을 하나 집어든 에단이 굳은 표정으로 서있다 쥬다스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주군?”

“쥬다스 님!”

동시에 그를 발견한 바이칼과 크리스티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앞으로 달려왔다.

쥬다스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여 있는 일행 수를 확인하고 잔잔히 웃었다.

“다들 무사했구나. 사이좋게 모여 있어서 다행이야.”

“어찌 또 아이 취급을 하십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무사히 그를 만나게 된 크리스티나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쥬다스는 자신에게 몰려든 일행의 뒤편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리키에게 시선을 던졌다.

시솝의 권한을 해킹해 온 제이가 멀쩡히 그의 손등에 자리하고 있었다.

리키는 그런 제이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쥬다스의 시선을 따라 리키를 힐끗 쳐다본 바이칼이 콧등을 찡그리곤 상황을 설명했다.

“저 자식, 제이를 시솝에게 넘겼었습니다. 주군과의 약속을 어긴 게 괘씸해서 한마디 하려고 했습니다만, 알고 보니 제이에게 무슨 함정을 파둔 모양이더라고요. 갑자기 시솝이 눈사람처럼 녹아서 사라져 버렸는데 어씨, 소름이 쫙.”

바이칼은 소름이 오른 팔을 벅벅 긁으며 제이를 만지작거리는 리키를 눈짓했다.

“그러더니 이번엔 하늘이 깨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꼬마는 시솝이 사라진 후부터 넋이 나가서 죽 저 상태…… 엇?”

말하다 말고 쥬다스의 옷자락에 시선을 준 바이칼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쥬다스 님. 소매에 왜 핏자국이…….”

후웅!

그 순간 보이지 않았던 바람에 의해 그 손이 튕겨져 나갔다.

쥬다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주군, 왜 그러십니까?”

“음……. 옮을 수 있어서.”

“예?”

그가 감염된 바이러스는 호흡기로 전염될 수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쥬다스는 바이러스가 다른 이에게 옮지 않도록 미리 자신의 주변을 바람의 장벽으로 막아둔 상태였다.

“설마.”

“당장은 괜찮다. 일단 이곳을 나가서 얘기하자꾸나.”

에단이 바이러스에 대한 사실을 짐작하고 침음성을 흘렸지만 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오래 붙들고 사정을 설명할 시간은 없었기 때문에 곧장 정령의 힘을 사용해 탈출구를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쥬다스는 일행을 먼저 내보내고 출구 앞에 멈춰 서 여전히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리키를 불렀다.

“리키.”

“난 안 가.”

아이는 단호히 그의 부름을 거절했다.

“나가야 해. 시솝이 힘을 잃었으니 라그나로크는 곧 무너질게다.”

“……아직 다 빼앗아오지 못했단 말이야.”

리키는 해킹 프로그램을 실행 중인 제이를 손에 얹은 채로 중얼거렸다.

“시솝이 가진 히든 데이터. 그게 필요해.”

영생을 사는 법, 그리고 죽은 아버지를 되살릴 방법.

두 가지를 얻기 위해선 시솝이 모아둔 데이터를 완벽히 빼앗아올 필요가 있었다.

리키는 떨리는 손으로 제이를 감싸 쥔 채 천천히 무너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려면 시간이 좀 더 걸려. 난 아직 나갈 수 없어.”

“바보냐? 라그나로크가 사라지면 영생이고 뭐고 너도 죽는 거야, 이 멍청아!”

탈출구 밖에 먼저 나가 있던 바이칼이 답답한 심정으로 소리쳤지만 리키는 통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큰 소리로 대꾸했다.

“라그나로크는 원래 시솝의 공간이라며! 여길 유지시키는 권한도 뺏어오면 돼. 찾기만 하면 되니까!”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바이러스로 인한 주인공 데드플래그...(?)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

슬슬 이번 에피소드도 끝이 보이고 있네요.ㅎ 생각보다 길어지곤 있지만(..) 굵은 에피소드 하나 끝날 때마다 뭔가 시원섭섭합니다. 헛헛.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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