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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융합
쿠릉!
하늘이 불온하게 울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여전히 라그나로크에서 탈출할 생각이 없는 리키를 향해 쥬다스가 휙 몸을 날렸다. 그 돌발 행동에 놀란 세이지가 숨을 훅 들이켜며 탈출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형님!”
그런데 그 손 너머로 세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주군이 뛰어들자 앞뒤 가릴 것 없이 함께 뛰어든 에단, 크리스티나, 바이칼이었다. 세 사람을 마지막으로 정령의 힘으로 열려 있던 탈출구가 팟 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갑작스런 사태에 세이지와 콜, 그리고 그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기사들이 일제히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다 함께 무사히 빠져나왔다 싶었는데 정작 제일 중요한 사람들이 도로 라그나로크에 남아버린 채 공간이 닫혔으니,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이게 대체…….”
처음 오딘 헨리를 따라 올라왔던 건물의 최상층이었다. 이미 주군과 세 심복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세이지는 망연자실하게 텅 빈 소파를 눈으로 훑었다.
‘아니지. 탈출구를 만드신 건 형님이니까, 분명 조금 더 기다리면 평소처럼 태연하게 나타나실 거야.’
그럼 다들 긴장하고 있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겠지. 기사들이 진이 빠진 걸 보고 에단 경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엄하게 혼낼 게 분명했다.
그런 상상을 하며 세이지는 고개를 들었다. 라그나로크의 몽환적인 하늘과 다르게 그들의 눈앞에는 투명한 유리창 너머 파란 하늘이 보였다.
33층이라는 고층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기계가 가득한 인공도시.
세이지는 유리벽에 손바닥을 맞대며 중얼거렸다.
“형님. 얼른 나오세요.”
마치 손바닥에 맞닿은 것처럼 보이는 미드가르드의 풍경이 너무나도 차가웠다.
“이제 우리 그만 돌아가요. ……루바르잔으로.”
세이지는 간절히 바랐다. 순례의 길에서 깨달은 게 무척 많았고, 그로 인해 다들 많은 부분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그들의 중심에 쥬다스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고, 또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는 소망했다.
형님이 돌아오길,
그리하여 고국으로 함께 돌아갈 수 있길.
쥬다스는 더 이상 백로황자가 아니었다.
그는 제국의 황태자이며 더 이상 그 누구도 그의 나약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누구라도 그를 직접 만난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탄복하고 만다.
게다가 이젠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고, 반드시 그들 위에 군림하길 바라는 군주였다.
* * *
리키는 하늘이 무너지든 땅이 갈라지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조금만 더 기다리면 손안에 들어올 시솝의 권능, 그 하나만이 간절할 뿐이었다.
‘어차피 마지막 기회야. 이번에 실패하면 살아 있어도 의미가 없어.’
리키의 목적은 단순하리만치 직선적이었다.
오로지 한 가지 목표만 보고 달려왔다.
만일 이대로 라그나로크가 무너져 시솝이 가진 모든 데이터를 찾을 길이 없게 되어버린다면 목표를 이룰 방법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 리키는 목숨 걸고 라그나로크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기계가 되어 영생을 사는 법을 알 때까지, 그리고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방법에 관련된 정보를 티끌만큼이라도 찾을 때까지.
그러나 제이를 손에 얹고 시솝의 데이터를 해킹하던 리키의 어깨를 누군가 확 끌어당겼다.
“뭐야! 방해하지…….”
따악!
버럭 소리 지르려던 리키는 장렬하게 내려찍히는 꿀밤에 머리를 감싸 안고 주저앉았다. 절로 끄윽 하는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정수리에서 후끈후끈 열이 나는 게 머리에 불이라도 지른 기분이었다.
“아으으, 진짜 뭔데. 왜 때리는데!”
“네 아버지가 진정 이런 걸 원하리라 생각하느냐.”
“……!”
리키는 머리를 감싸 쥔 채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낯이 익었지만 가면이 사라진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멍하니 그를 쳐다보게 되었다. 보석을 캐다가 그대로 깎아 만든 듯한 금안과 스스로 빛을 내기라도 하듯 반짝이는 은발이 하염없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멍청해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리키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은발이었나?’
얼굴이야 가면을 쓰고 있어서 몰랐다곤 하지만 머리카락 색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라그나로크에 들어오기 전 쥬다스의 머리색은 분명 은발이 아니라 흔하디흔한 갈색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당신, 시솝의 도전자 맞지?”
묻는 순간 쥬다스를 뒤따라온 세 사람이 다가와 호위 진영을 만들어냈다.
“쥬다스 님.”
철컥!
쥬다스에게 다가선 에단이 검을 뽑아 리키를 겨누었다.
“어찌 이리 무모하십니까.”
“이런, 다들 왔구나. 좋지 않은 상황이라 말려들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 생각이 더 좋지 않습니다. 차라리 작정하고 말려들게 해주십쇼.”
바이칼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이어 크리스티나가 공손히 덧붙였다.
“따르겠습니다. 명령을.”
연두색 하늘은 이미 반 이상 무너져 있었다. 게다가 붕괴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 꼭 눈이 내리듯 사방이 하늘 조각으로 뒤덮여 반짝였다.
부서지는 세계 속에서 쥬다스는 고집불통인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얘야.”
또다. 리키는 여전히 따뜻한 음성을 들으며 해킹을 진행 중인 제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마주치면서 목소리를 듣다보니 왠지 모르게 자꾸만 아버지가 떠올라 마음이 약해지는 탓이었다.
“네가 영생을 살고자 하는 까닭은,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그런 게지?”
“쳇. 알면서 왜 물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진실이란 게 있다.
쥬다스는 아직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영생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며 그 내면에 숨겨둔 진짜 소망을 읽어냈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 자신조차 몰랐던 다른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해 냈다. 그는 씁쓸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네겐 괴로울 수 있는 질문이겠다만. 혹 아버지를 살해한 자가 누구인지 기억하느냐?”
“……몰라. 그런 거.”
리키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관심 없어.”
“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짜는? 그 당시 사인은 뭐였지?”
“나도 몰라. 자꾸 그런 이상한 거 묻지 마!”
묻는 족족 가시가 잔뜩 돋친 대꾸만 돌아왔다. 그걸 지켜보던 바이칼이 황당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툭 끼어들었다.
“이봐. 이상한 건 너 아니야?”
“뭐?”
“넌 지금 죽은 사람을 되살리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하고 있다며? 보통 그렇게 소중한 가족이 끔찍하게 살해당했으면 적어도 기일이나 사인 정도는 기억할 법하잖아.”
소중한 존재의 죽음을 겪고서 2년이나 지났는데 그에 대해 모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심지어 복수하겠단 의지마저도 없었다.
“여태껏 왜 죽었는지 관심조차 없었다는 게 말이나 돼?”
‘어? 그러고 보니 나, 왜…….’
듣다보니 리키도 이상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한 번도 궁금하게 여겨본 적 없는 문제였다.
리키가 기억하고 있는 건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정보뿐이었다. 아니, 정말로 살해당한 거였나? 리키는 고개를 저었다. ‘사고로 죽었다’가 더 적합한지도 몰랐다.
‘왜 몰랐지?’
멍하니 넋을 놓은 리키를 향해 제이가 알람을 울렸다.
「해킹 과정 중 심각한 손상을 입은 데이터가 있습니다. 건너뛰고 진행하시겠습니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 리키는 제이의 알람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부서지는 하늘 조각 사이에 주저앉은 아이를 바라보며 쥬다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네게 있어 되살리고 싶은 사람은 아버지뿐이더냐?”
“그야 다른 가족은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다른 가족은 없었다. 리키가 기억이란 걸 가질 무렵부터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되살린다’라는 건 죽은 사람에게 바라는 소망이다. 처음부터 없던 존재를 되살리고 싶을 리가 없다.
그 사실을 인지한 리키는 계속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연분홍빛 정령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류로 인해 해킹 프로그램이 중단되었습니다. 계속 진행을 원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제이.”
「네, 주인님.」
“아빠는……. 로키 파르바우티는 왜 죽었는지 알고 있어?”
「로키 파르바우티. 그는 본 내비게이션에 탑재된 바이러스 제거를 시도하다 중도 감염되어 사망하였습니다.」
제이의 차분한 기계음이 소름 끼치게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 리키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살해당한 게 아니라?”
「로키 파르바우티의 사망원인은 바이러스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살인도구가 바로 제이였단 사실을 알게 되자 허탈감이 몰려왔다.
리키의 아버지 로키는 바이러스를 만들어낸 걸 후회했고 다시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바이러스를 없애는 건 만드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로키는 자신이 만들어낸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일에 실패했고, 도중에 감염되어 사망에 이르렀다.
‘말도 안 돼. 그럼 나는.’
로키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이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말길 바랐다.
그래서 눈을 감기 전, 리키의 기억을 수정했다. 아버지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도록, 아버지의 죽음에 집착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가 제거에 실패한 그 바이러스에 손대지 않도록.
모든 정보를 리키의 머릿속에서 삭제했다.
이 모든 게 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었구나.”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린 리키가 헛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영생이 이미 손에 넣은 것이었을 줄이야.
허무하고 또 허탈했다. 봉인이 풀리듯 잠겨 있던 데이터가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기계였어. 그것도 13년 동안 죽 이 얼굴 이 모습으로 살아온.”
안드로이드(Android), 즉 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을 뜻하는 명칭이었다.
실제적으로는 리키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는 아무리 기계국 미드가르드라 한들 다른 이들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신 종종 노동이나 소일거리를 맡기기 위해 제작되는 안드로이드들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감정과 이성이 없으며 입력된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인다. 자의를 가지고 움직이는데다가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감정마저 느끼고 있는 리키는 단순한 기계라고만은 볼 수 없었다.
인간에서 기계로 바뀌어버린 시솝 오딘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로키는 그 사실을 아이에게 숨겼다.
‘리키.’
아빠는 왜 날 그렇게 다정하게 불렀을까, 어차피 진짜 사람도 아니었는데.
리키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도무지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영생을 사는 법은 필요가 없게 되었고, 아버지라 생각했던 사람은 자신을 만든 제작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망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리키의 코앞으로 손이 하나 내밀어졌다.
“리키.”
“…….”
“함께 이곳에서 나가자.”
쥬다스였다. 포기하지 않고 손을 내미는 그에게 리키는 따지듯 물었다.
“왜?”
붕괴가 막바지에 다다른 라그나로크는 이제 바닥마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파사삭 바스러진 갈대꽃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잘해줘요?”
“이리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느냐?”
태연한 되물음에 울컥 화가 치솟았다. 리키는 자폭하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난 약속도 어기고, 당신한테 거짓말도 했어. 내가 당신이라면 화가 나서 나 같은 건 굳이 살려주고 싶지 않을 거야.”
‘아빠도, 당신도. 어차피 난 사람도 아니고 그저 로봇일 뿐인데.’
이어지지 못한 한마디가 가슴속에 남아 스스로를 할퀴었다.
영생을 살 수 있게만 된다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영생을 사는 기계란 걸 안 지금, 리키는 다시금 깨달았다.
수명과 관계없이, 자신은 여전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력한 꼬마일 뿐이었다.
“음, 그리 생각하는구나.”
그러나 리키가 뭐라 하든 쥬다스는 그저 빙긋 웃어 보이기만 했다.
꼭 어른 앞에서 떼쓰는 아이가 된 기분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리키를 향해 쥬다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누구나 그런 때가 있지. 내 발이 잘못 꼬여 길에서 꽝 넘어졌는데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니까, 들키기 싫어서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서 척척 걸어가는 그런 순간 말이다.”
리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따스한 빛을 담은 금안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사실은 넘어져서 까진 부분이 눈물 나게 아픈데.”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이 드러났다. 어느 틈에 그렇게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을 정도였다.
“그렇지?”
“우, 흑. 으아아아앙.”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우는 아이를 품에 안아 다독여주는 쥬다스를 보며 세 수하도 공격태세를 풀고 한숨을 쉬었다.
혹여 시솝의 권한을 빼앗은 리키와 싸우게 될까 조마조마했는데 다행이었다.
“유니.”
「알았어!」
기다리던 바람의 정령이 막 탈출구를 만들기 위해 힘을 사용하려던 찰나였다.
훅 촛불 꺼지듯 흩어져 버린 바람을 느끼고 유니가 계약자를 돌아보았다.
「……이그레트?」
정령은 계약자의 상태에 따라 힘의 사용을 제약받는다. 계약자가 정신을 잃으면 정령왕이라 해도 제대로 된 힘을 사용할 수 없다. 그 정령계 법칙에 따라 유니도 현재 힘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털썩!
멀쩡하진 않았어도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다 싶던 쥬다스가 그대로 의식을 잃고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라그나로크라는 특수한 환경이었기에 정령들의 실체화가 풀리진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탈출구를 만들 수 없었다.
놀란 크리스티나가 가장 먼저 그를 붙들었다.
“쥬다스 님! 괜찮으십……!”
상태를 물으려던 크리스티나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쥬다스를 부축하고 있던 손이 피에 푹 젖어 있었다. 의식을 잃으면서 토해낸 피가 그의 흰옷을 잔뜩 적시고 있었다.
‘……안 돼.’
그녀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깨어져가던 하늘이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전부 산산조각 나버렸다.
「이그레트!」
공간의 일그러짐을 느낀 정령들이 일제히 계약자를 향해 몰려들었다.
그날, 미드가르드의 시솝과 함께 그의 거처인 라그나로크가 영원히 붕괴되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뒤통수! 통수를 치자!
....가 아니라 이런저런(?) 사건사고가 가득한 이번 화였네요.ㅎ
이걸로 이번 챕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 편부터는 '24장 : 운명'이 진행됩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