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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4화 (4/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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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돌아온 엘리제는 종이에 무언가를 다시 적기 시작했다.

‘앞으로 10년.’

그녀가 적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었다.

그녀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망했던 때까지 앞으로 약 10년 정도의 세월이 남았다.

‘그때까지 일어난 중요한 일들은 대비하고 있어야 해.’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기억이 뚜렷하진 않았다.

그래도 중요한 일들은 얼추 생각이 나니, 일단 떠오르는 대로 적어 내려갔다.

-2차 크림 원정, 작은 오라버니 사망.

그 문장을 적으니 가슴이 찌르르 아팠다.

이번엔 반드시 막을 것이다.

-질병 악화로 새어머니 사망.

-트레스탄 가(家)의 역모 사건. 클로랜스 가문의 멸문. 아버지 처형.

-황후를 비호한 죄로, 큰 오라버니 처형.

가슴의 통증을 참으며, 그녀는 묵묵히 적어 내렸다.

이번 삶엔 다를 것이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니까.

가족들과 관련 없는 중요한 일들도 적었다.

-1차 크림 원정군, 원인불명의 전염병으로 전멸. 추정 사망자 4만 7천 명.

-웨일의 하버 공작부인 파킨슨병 악화로 사망.

-현(現) 황제 지병 악화로 병사.

-2차 론도 대역병 사건. 브리티아 제국 수도 론도(Londo)내 추정 사망자 10만.

-크림 전쟁 후, 동방에서 기원한 천연두(smallpox) 유행. 남부 3개 도시 폐쇄. 사망자 7만 명.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질병 관련 이슈가 많구나. 아직 공중보건의학이나 여러 선진 의학이 확실히 정립되지 않았을 때이니까.’

그녀는 자신이 적은 문구를 다시 바라봤다.

-2차 론도 대역병 사건. 브리티아 제국 수도 론도(Londo)내 추정 사망자 10만.

정말 무시무시했다.

그나마 대비를 해서 저 정도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1차 대역병 때는 수도 내에서 15만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하니까.

‘희생자를 줄일 방법은 없을까?’

그녀는 고민했다.

엘리제의 몸으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자아는 ‘송지현’.

사람의 죽음을 외면하지 못하는 철혈(鐵血)의 외과의사였다.

‘전염병만이 문제가 아니야. 현대 지구에서는 중한 질병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질환으로도 여러 사람이 사망하는 시대니까.’

그녀는 고민했다.

‘내 의학지식을 이용하면 희생자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머리에는 현대 의학지식이 들어있었다.

그것도 희대의 천재라 불릴 정도로 방대한!

사고 당시 비행기를 탔던 것도 여러 연구 업적으로 상을 받으러 세계 외과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내가 외과의사라 공중보건역학이나, 의학사(醫學史)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자신이 첫 번째 삶으로 돌아온 하늘의 뜻이 어쩌면 이것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아버지와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아버지인 엘 후작은 제국의 재상이었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합리적으로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일이 정리되면, 의사로서의 삶을 살아야지.'

그녀는 이전 외과의사의 삶을 떠올렸다.

차가운 메스의 감촉. 죽음과 교차하는 생의 희망.

그 긴장이 그리웠다.

엘리제의 몸으로 돌아왔지만, 그녀는 외과의사의 영혼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번 삶에서도 사람을 살리는 보람을 느끼며 살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이슈는...’

그녀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과거들을 적어 내려갔다.

사소한 것도 있고, 심각한 내용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내용을 적은 그녀는 멈칫했다.

‘맙소사. 내가 왜 이걸 잊어먹고 있었지?’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와 황태자와의 약혼 발표. 제국력 283년. 탄신연회.

제국력 283년, 올해였다.

'탄신연회면 7월. 앞으로 2달밖에 안 남았어!'

엘리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탄신연회.

제국의 모두가 그녀를 축복하던 그때.

황태자와 자신의 약혼이 공표되었고, 비극은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

그날 저녁 식사 시간.

간만에 모든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였다.

"엘리제, 입맛이 없니?"

"아, 아니에요. 어머니."

후작 부인은 딸의 '어머니'란 말에 미소를 지었다.

엘리제는 지금껏 계모인 그녀에게 단 한 번도 '어머니'란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엘 후작에게 재가한 후, 자식을 못 가져 엘리제를 딸처럼 여겼던 후작 부인은 그녀가 자신을 멀리하는 것이 섭섭했는데, 최근에는 정말 많이 바뀌었다.

'그날 처음으로 날 어머니라 부를 때, 얼마나 기쁘던지.'

단순히 말로만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엘리제는 진짜 친어머니에게 하듯, 친근히, 그리고 공손히 자신을 대했다.

후작 부인은 그 변화가 놀라우면서도, 기쁘고 감사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엘리제의 표정이 안 좋지?'

최근 딸은 항상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이상했다.

마치 큰 걱정이 있는 것처럼, 표정이 어두웠다.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 요리가 나왔는데도, 거의 손도 안 대고.'

"엘리제, 혹시 무슨 일 있니?"

"아, 아니요."

딸은 고개를 저었지만,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어 보였다.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크흠, 왜 그러느냐?"

"그래, 엘리제. 무슨 일 있으면 이야기해봐. 오빠가 다 해결해 줄게."

아버지도, 작은 오라버니도 걱정스레 물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큰 오라버니만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게..."

엘리제는 주저하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탄신연회 말이에요, 아버지."

"아...!"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무슨 걱정을 하는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난 또. 그건 걱정하지 말 거라."

"...!"

엘 후작은 근엄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이미 폐하와 이야기를 다 끝냈다. 모두 네가 원하던 대로 될 것이다.”

엘리제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탄신연회 때 폐하께서 너와 태자 전하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할 거다. 네가 원하던 대로 말이다.”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차가운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갈랐다.

"아버지, 전 그 약혼에 반대입니다."

"...!"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딱딱한 인상.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외모의 미남. 큰 오라버니인 렌 드 클로랜스 남작이었다.

"렌, 그게 무슨 말이냐? 태자 전하와 엘리제의 약혼에 반대라니."

"솔직히 묻겠습니다. 아버지는 저 아이가 태자 전하와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모든 제국의 어머니인 황후의 자리에 적합하다고 보십니까?"

"너...! 그게 무슨 말이냐?!"

배려 없는 그 거침없는 말에 엘 후작이 언성을 높였다.

"미천한 제가 황제 폐하가 결정한 일을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기적인 저 아이가 과연 황후의 위에 어울릴지 잘 모르겠어서 말입니다."

"...!!"

식당에 갑자기 싸늘한 적막이 돌았다.

'아... 형. 한 달 만에 집에 와서 또 이러는구나.'

작은 오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맨날 엘리제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

황실 근위 총기사단(銃-騎士團, Rifle knightage)의 부단장인 렌 남작은 이기적인 엘리제를 항상 못마땅해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으니, 또 한바탕하겠구나. 엘리제 성격에 절대 넘어갈 리 없으니.'

그런데 엘리제의 눈치를 살핀 그는 깜짝 놀랐다.

'응??'

엘리제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은 얼굴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뭔가 알 수 없는 아련함이 가득한?

'뭐지? 내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의 짐작대로 엘리제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큰 오라버니, 독설은 여전하구나. 이전에는 저 독설을 참 싫어했었는데.'

이전 삶에서 황후가 된 후, 그녀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큰 오라버니는 거침없는 직언을 날렸다.

당시에는 그게 참 눈엣가시처럼 싫었는데, 이제는 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들을 했었는지.

'그리고 큰 오라버니의 말은 모두 맞아. 난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그녀는 당시의 삶을 떠올렸다.

모든 비극은 그녀가 어울리지 않는 황후의 위에 올라서였다.

'막아야 해, 이 약혼은. 무조건.'

모두에게 비극이었던 그 결혼.

비단 자신뿐 아니라, 태자에게도 그 결혼은 비극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태자 전하도 그 결혼의 희생자지. 나야, 내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이지만, 그는 아무런 죄도 없이 불행한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까.'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약혼을 막을지 고민해 무조건 막자. 그리고 이번 삶에선 황실과 상관없는 의사의 삶을 사는 거야.'

그렇게 그녀는 생각에 잠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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