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6 2-2 뜻밖의 대형사고(?) =========================================================================
<2-2 뜻밖의 대형사고(?)>
그렇게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누군가 그녀를 살짝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영애, 영애.”
“…….”
“영애?”
“……!”
그 흔들리는 느낌에 정신이 들어 엘리제는 눈을 번뜩 떴다.
‘아…… 잠들었구나.’
딸기 케이크를 먹고 소파에 기대 그대로 곯아떨어진 것 같았다.
‘어지러워.’
아직도 아픈 머리를 붙잡고 정신을 차리니, 푸근한 인상의 중년 귀부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워낙 푹 자는데 깨워 미안한데, 이제 곧 폐하께서 축일 기념문을 낭독할 거여서.”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누구지? 낯이 익은데.’
이곳은 황족 전용 휴게 라운지. 분명 황족이나 그 인척일 것이다.
엘리제는 곧 귀부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분이구나!’
그녀는 화급히 예를 올렸다.
“하버 공작부인을 뵙습니다. 클로랜스 가문의 엘리제라고 합니다.”
“뭘요. 몸도 안 좋은 것 같은데, 편하게 하세요.”
“아닙니다, 부인.”
하버 공작부인!
브티리아 섬의 서쪽 지방 웨일의 대귀족 하버 공작의 부인이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신분은 바로 황실의 친척이란 것!
“죄송한데 저를 조금 부축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영애?”
“아, 네. 부인.”
황족의 피가 흐르는지라 공작부인의 눈동자는 금색이었다. 다만 색이 흐릿하고 옅었다.
참고로 황족에게 내려오는 초상(超上) 능력은 강할수록 금안이 짙은 색을 띤다.
뇌제(雷帝)라 불리며 역대에 손꼽는 초상 능력의 소유자인 민체스터 황제의 금안은 무척 짙었고, 황태자의 금안은 그것보다도 더 짙었다.
‘황태자는 초상 능력만 따지면 역대 최고, 아니, 역대 최고인 것은 비단 초상 능력만이 아니었지.’
이후 3황자와의 정권 다툼에 승리하고 황제가 된 황태자는 명군 민체스터를 능가하는 통치력을 보여주었다.
자신은 사형당해 보지 못했지만, 그가 통치하는 브리티아 제국이 어디까지 번영할지 짐작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유일한 티가 있다면 바로 3 황자와의 정권 다툼 후 일어났던 혈사(血史).’
당시 무수히 많은 피가 흘렀었다. 시민들이 론도의 비극이라 일컬었을 정도로.
물론 황태자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걸 알았다. 하지만 동시에 슬픈 일이었다.
그녀와 감정적 교류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때 일을 굉장히 괴로워했다.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괴로움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래, 당시의 일은 그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원래부터 너덜너덜했던 그의 가슴은 그때의 비극으로 완전히 찢어져 버렸다.
‘그리고 또 다른 티는 황후인 나였지.’
그녀는 씁쓸히 생각했다.
그래도 이번 삶에선 자신이라도 황후가 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나마 그것 하나라도 그에겐 다행일 것이다.
“이렇게 잡아드리면 될까요, 부인?”
“네, 고마워요. 제가 다리가 조금 떨려서.”
엘리제는 공작부인을 살폈다.
정말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흐릿하게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보행동결(Freezing of gait).
특징적인 그 모습에 그녀의 머리에 진단이 떠올랐다.
‘파킨슨병.’
사실 그녀는 공작부인을 잘 모른다.
그가 황태자와 약혼 후 결혼하기 전 사망했기 때문이다.
사인은 질식사.
‘파킨슨병은 신경세포의 퇴행으로 몸의 운동 기능이 떨어지는 질환. 파킨슨병으로 목의 삼킴 기능이 떨어졌다가 음식이 숨구멍, 기도에 걸려 사망하셨지.’
그녀는 생각했다.
‘인상이 무척 좋으신데. 도와드릴 방법이 없을까?’
환자를 보니 의사의 본능이 자극됐다.
하지만 파킨슨병은 아무리 그녀라도 딱히 방법이 없었다.
‘지구에서도 진행만 늦출 뿐 정복하지 못한 병이니까. 질식사의 경우엔 내가 바로 옆에 있지 않은 한 도와줄 수가 없고.’
음식이 목에 걸리면 1-2분 안에 조처해야 한다.
옆에 의사. 그것도 응급조처에 능숙한 의사가 없으면 사실상 살리기 어려웠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 보자.’
기억 상으로는 그녀가 사망하는 시기가 요 근처였던 것 같다.
물론 이번에는 그때와 시기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경 세포의 기능이 떨어져 목에 음식이 걸리는 것은 확률적인 일이니까.
조금 더 늦게 일어날 수도 있고, 당장 이번 탄신연회 때 일이 터질 수도 있다.
‘큰 문제 없으서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연회장에 들어갔다.
“고마워요, 영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뵐게요.”
“네, 부인.”
황제의 축일 기념문 낭독을 앞두고 귀족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제도 클로랜스 가문의 가족들이 자리한 곳으로 이동했다.
“리제, 어디를 다녀 왔었니? 찾았잖아.”
“아... 잠시 쉬고 왔어요. 죄송해요, 오라버니.”
“몸은 좀 괜찮고?”
“네, 조금 나아요.”
도대체 어디를 갔다 왔느냐는 가족들의 물음에 잠시 쉬고 왔다고 대답했다.
“곧 폐하께서 기도문을 낭독할 것이니 기다리렴.”
“네, 아버지.”
이제 이것만 끝나면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엘리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공부고 뭐고, 정말 푹 쉬어야겠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나팔 소리와 함께 모든 귀족이 자리에서 예를 취했다.
그리고 축일 예복을 입은 황제가 성서를 들고 단상으로 올라갔다.
황제는 예의 인자한 얼굴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이에게 주의 축복이 있기를. 그러면 먼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께 감사하며 기도문을 낭독하겠습니다.”
탄신 연회 때 기도문을 낭독하는 것은 500년이 넘은 전통이었다.
브리티아 제국이 브리티아 왕국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인 것이다.
황제는 단상에서 등을 돌리고 전면에 놓인 커다란 십자가를 올려다보았다. 십자가 위에는 가시 면류관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고어로 기도문을 낭독했다.
“אָבִינוּ שֶׁבַּשָׁמַיִם
יִתְקַדַּשׁ שִׁמְךָ
תָּבוֹא מַלְכוּתֶךָ
יֵעָשֶׂה רְצוֹנְךָ
כְּבַשָּׁמַיִם כֵּן בָּאָרֶץ
אֶת לֶחֶם חֻקֵּנוּ תֵּן לָנוּ הַיּוֹם
וּמְחַל־לָנוּ עַל־חֹבוֹתֵינוּ
כְּפִי שֶׁסּוֹלְחִים גַּם אֲנַחְנוּ לַחוֹטְאִים לָנוּ
וְאַל־תְּבִיאֵנוּ לִידֵי נִסָּיוֹן
כִּי אִם־תְּחַלְּצֵנוּ מִן־הָרָע
כִּי לְךָ הַמַּמְלָכָה וְהַגְּבוּרָה וְהַתִּפְאֶרֶת
לְעוֹלְמֵי עוֹלָמִים.”
기도문 낭독 후 축일 기념문 낭독이 이어졌다.
축일 기념문 내용은 늘 그렇지만 예년과 비슷했다.
제국의 만수무강과 축복을 비는 내용.
‘이제 거의 끝났어. 이것만 버티자, 엘리제.’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것이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기념문 낭독도 거의 다 끝났으니 고지가 코앞이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약혼녀 발표야 금방 끝날 테니. 힘내자. 끝나면 바로 빠져나가는 거야.’
그렇게 그녀는 의지를 돋우었다.
“이상입니다.”
이윽고 기념문 낭독이 끝났다.
원래대로라면 다 같이 탄신 연회를 축하하고, 연회가 재개되는 게 정상.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한 가지 일정이 더 남았기 때문이다.
“오늘 여러분께 할 말이 있습니다. 바로 황태자인 린덴 드 로마노프의 약혼자에 대해서입니다.”
드디어 황태자의 약혼녀를 발표하는 순간이었다.
황제의 목소리는 기도문과 기념문을 낭독할 때와는 달리 한결 편안했다.
이 약식 약혼 발표가 예식(禮式)이 아니라, 황가의 경사를 알리는 황제의 개인적인 발표이기 때문이다.
귀족들도 예식으로 경직된 얼굴을 풀고 기대하는 표정으로 발표를 기다렸다.
과연 누가 황태자의 약혼녀, 제국의 퍼스트레이디(First lady)가 될까?
“그런데 먼저 말할 게 있습니다. 짐이 발표 전에 한 가지 고려 못한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황제는 청중으로 있는 귀족들에게 경어를 썼다.
이는 황제를 천자(天子)로 모시는 동방의 청(淸, Qing)과는 다른 모습으로, 민체스터의 개인적 성향도 있지만 브리티아 제국의 문화 차이 탓이 컸다.
“짐이 황태자의 약혼녀로 정한 레이디가 아직 성인식을 마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
감기에 취해 건성으로 황제의 말을 듣던 엘리제는 퍼뜩 놀라 황제를 바라봤다.
잠깐.
이게 무슨 이야기지?
‘설마? 다른 영애의 이야기겠지?’
성인식을 마치지 않은 영애가 자신뿐이겠는가?
유력한 약혼 후보인 버킹엄 공작 영애도, 스페냐 왕국의 공주도 모두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자신 또래였다.
‘아닐 거야. 설마.’
그녀는 그렇게 불안을 달랬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물론 성인식 이전이어도 약혼 발표를 하는 것은 예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제가 그 영애와 개인적으로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약혼을 성인식 이후로 미루겠다고.”
“……!”
엘리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지금 무슨 이야기를?
서, 설마?
그런데 그때였다.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클로랜스 가문, 아니, 엘리제에게로 향했다.
민체스터 드 로마노프가 빙긋 웃었다.
“그래서 여러분께는 죄송하지만, 약혼 발표는 그 영애. 클로랜스 영애가 성인식을 치르는 날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두 그때를 기다려 주십시오.”
“……!”
그리고 그 순간.
연회장의 모든 이의 시선이 엘리제에게로 향했고, 엘리제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발표란 말인가?
***
그 뒤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저택의 방으로 돌아온 엘리제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내기를 했건만 이런 발표를 하다니!
물론 아직 황제가 내기를 어긴 것은 아니다. 그녀를 약혼녀로 발표한 것은 아니니까.
-약혼 발표는 클로랜스 영애가 성인식을 치르는 날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말만 성인식 때로 미룬다는 것이지, 발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말을 듣고 그 누가 그녀를 황태자의 약혼녀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백이면 백 모두 그녀를 황태자의 약혼녀나 다름없이 여길 것이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발표를 들었을 때, 자신과 마찬가지로 놀란 얼굴이었으니까.
황제의 오른팔이니 대충 의중은 짐작했을지 몰라도, 이런 식이었을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이대로는 안 돼.’
절대 과거의 삶을 반복할 수 없다.
그건 모두에게 비극이었다.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황태자에게도!
그리고 그녀에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바로 의사의 삶!
엘리제의 기억을 갖고 있고 지금도 그녀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녀의 성품과 자아는 외과의사의 것에 훨씬 가까웠다.
절대로 의사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다.
‘폐하와 담판을 지어야겠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운명이 걸린 일이었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내일 탄신 연회에 폐하가 나올 때, 그때 담판을 짓겠어. 이렇게는 안 돼.’
***
그날 밤, 한참이나 뒤척이다 꿈을 꾸었다.
과거 엘리제의 삶.
그러니까 첫 번째 삶의 꿈이었다.
-지옥에서 사죄하도록.
시리도록 차가운 선언.
꿈속에서 그녀는 불행했었다.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떠올리고 싶지조차 않은 기억들.
수없는 파국 끝에 결국 단두대의 날이 떨어졌고, 그 순간 엘리제는 번뜩 눈을 떴다.
“하아! 하아!”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꿈이구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단두대 날의 섬뜩한 느낌에 목을 어루만졌다.
분명 꿈이건만, 꿈을 꿀 때마다 실제처럼 아팠다. 마치 그때 처형당할 때처럼.
“하아.”
그녀는 침대 옆에 놓인 물을 마시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어느새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엘리제의 몸으로 돌아온 후, 거의 꾸지 않았었는데.’
지구에서 살 때는 이 악몽을 수없이 반복했다.
마치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처럼.
악몽을 꿀 때마다 선명히 떠오르는 그 끔찍한 기억에, 과거에, 고통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악몽을 피하려고 뜬 눈으로 보낸 밤이 몇 밤인지.
어쩌면 그녀가 의사의 길에 미친 듯이 매진했던 것도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환자에게 집중하고 있으면, 과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아니야. 이번엔 결코 그때의 삶을 반복하지 않을 거야.’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몸 상태는 더욱 안 좋은 것 같았지만, 앓아누워 있을 여유가 없었다.
‘오늘 폐하와 이야기해야 해.’
그녀는 진통제와 해열제를 복용했다.
정량을 넘어 과량으로.
몸에 안 좋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만큼은 최대한 맑은 정신을 유지해야 했다.
‘더 늦기 전에. 오늘 무조건 담판을 지어야 해.’
그녀는 그렇게 굳게 다짐했다.
============================ 작품 후기 ============================
내일 목요일 오전 09:07분에 올라갑니다.
어쩌면 두편이 올라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한편만 올릴 수도 있습니다.;;)
Ps. 린덴의 '너'라는 표현을 여러 독자분들이 지적해주셨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 고민했던 부분입니다. '너'라는 표현을 사용할지 말지. 고민끝에 린덴의 느낌 같은 느낌 아닌 느낌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냥 '너'라는 표현으로 결정했는데...
사실 결정하고 나서도 잘한 결정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지적해주신 것처럼 조금 무례해보이긴 하거든요. 그런데... 원래 조금 그런 느낌 같은 느낌의 느낌의 느낌 성격이어서.;;;; 조금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Ps2. 저 주기도문은. 네, 히브리어입니다.
이 글의 배경이 사실상 가상의 유럽이니 그냥 당시의 지배적 종교였던 기독교의 것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가상의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무협에서 불교, 도교를 그대로 가져오듯이요.)
글 분량은 저 알아보지도 못할 히브리어를 제외하고 5500자 이상 되도록 하였습니다.ㅠㅠ
Ps3. 많은 분들이 바라는 서브 남주는... 음...^^ 그렇지 않아도 다음 챕터에 제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가 등장하긴 할 것입니다. 그 아이가 글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는... 지켜보면 아실 수 있겠지요.^^
읽어주시는 분들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