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7 2-2 뜻밖의 대형사고(?) =========================================================================
‘그렇지 않아도 벌써 신문에서 날 황태자의 약혼녀로 보도하고 있어.’
황태자의 약혼녀 발표는 금년 탄신 연회의 최대 이슈였다.
모든 신문사에서 발표만 기다리고 있다가 호외로 발표한 것이다.
[황태자의 약혼녀, 클로랜스 영애로 발표!]
[클로랜스 영애, 탄신 연회의 주인공이 되다.]
이런 기사는 약과였다.
[클로랜스 가문의 레이디 엘리제! 제국의 퍼스트 레이디(First lady)가 되다!]
이미 그녀가 황태자와 결혼이라도 한 듯한 기사도 무수히 많았다.
지난 삶, 정식 약혼 발표가 났을 때와 큰 차이가 없는 반응들. 이제 제국의 시민 중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하아. 잘하자, 엘리제.”
이대로라면 내기와 상관없이 황태자의 약혼녀로 굳혀질 게 분명할 터.
그러기 전에 상황을 바꿔야 했다.
그녀는 의지를 다지고 탄신 연회로 향했다.
연회장에 도착하니 수많은 사람이 그녀를 바라봤다. 마치 주인공이라도 도착한 듯한 시선이었다.
“오, 클로랜스 영애. 축하합니다.”
“전 폐하께서 영애를 선택하실지 짐작하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엘리제에게 몰려들었다.
아직 약혼녀로 정식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곧 성인식만 치르면 약혼녀가 될 거라 여기는 것이다.
차후 황태자비, 황후가 될 여인.
모두 그녀의 눈에 얼굴도장을 찍기 위해 몰려들었다.
“아니에요. 아직 폐하께서 정식으로 발표하신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생각이 바뀌실 수도 있고요. 그러니 그런 축하는 받기 어렵습니다.”
엘리제는 부드럽게 그들의 축하를 거절했다.
그녀로선 정말 싫어서 하는 거절이지만, 사람들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안 좋은 소문이 많았는데 다 헛소문이었구나.’
‘사실상 약혼자로 간택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정말 겸손하네. 이전에 들었던 소문과는 다른데?’
‘역시 황태자비로 내정된 영애다워.’
사람들은 그녀가 겸양하는 것으로 여기고 감탄의 눈길을 보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외모, 정숙한 태도, 예의 바른 언행.
그들의 눈에 비친 클로랜스 영애는 기존의 소문과 다르게 황태자비에 정말 잘 어울리는 레이디로 보였다.
“소문이 믿을 게 못 되네요.”
“역시 사람은 직접 봐야지 알 수 있다니까요.”
사람들은 서로 속삭였다.
“역시 폐하께서 보는 눈이 있으셔요. 제국 최고의 명문가 클로랜스 가문에, 저런 영애라니.”
“그러게 말이에요. 황태자 전하와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 속삭임을 들은 엘리제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니라고. 정말 아니라고요!
라고 외치고라도 싶었지만, 지금으로선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폐하와 해결을 봐야 해.’
그래, 모든 것은 황제와의 담판에 달렸다.
이들에게 이야기해 봐야 아무런 의미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형처럼 웃으며 황제를 기다렸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니, 어제보다 훨씬 머리 아프고 어지러웠지만 참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황제 폐하 납십니다!”
나팔 소리와 함께 황제가 연회장에 입장했다.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와 함께.
“……!”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는 여러 대신들과 함께였다. 현 황궁의 가장 큰 안주인인 1황비는 늘 그렇듯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안 돼. 조금만 더 기다리자.’
그녀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황제와 독대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어머, 클로랜스 영애. 반가워요.”
푸근한 인상의 귀부인.
황실의 친척인 하버 공작부인이 엘리제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금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공작부인을 뵙습니다.”
엘리제는 예를 올렸다.
“어제는 잘 들어가서 쉬었나요?”
“네, 부인.”
공작부인은 동행한 하녀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원래 예법상 황궁 탄신 연회에 개인적인 시종의 입장은 불가하지만, 부인 본인이 황족이고 앓고 있는 파킨슨병 때문에 부득이 동행한 것 같았다.
“앞으로 같은 식구가 된다니 기쁘네요. 황태자 전하를 잘 부탁해요. 딱딱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귀여운 분이에요.”
“…….”
엘리제는 어색하게 웃었다.
귀여운? 그 황태자가?
세상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이다.
하지만 공작부인은 정말 그를 귀엽게 여기기라도 하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조금 무뚝뚝해 보이지만, 어렸을 때 전하가 얼마나 착하고 사랑스러웠는데요. 나한테 뒤뚱뒤뚱 걸어와 재롱 피우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리고 부인은 목이 말랐는지, 음료를 입에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음료를 입에 넘기고 나서였다.
“쿨럭, 쿨럭!”
돌연 사레가 들렸는지, 갑자기 기침하기 시작했다.
“부인!”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별것 아닌 사래로 보이지만 달랐다.
‘파킨슨병에 동반된 흡인(Aspiration) 증상이야.’
파킨슨병이 진행되면 팔, 다리의 운동 기능이 떨어짐과 동시에 식도의 삼킴 기능도 같이 저하된다.
따라서 식도로 넘어가야 할 음식이 자꾸 기도로 넘어가게 되는데, 심하면 숨구멍인 기도를 막아 질식으로 사망하게 된다.
‘병 자체를 좋게 할 수는 없지만, 흡인으로 인한 급성 사망은 막아야 할 텐데.’
이전 삶에서도 질식으로 사망한 공작부인이다.
증상의 정도를 봤을 때, 언제 문제가 생길지 몰라 흡인을 방지하는 예방법이 필요하다.
‘기회를 봐서 예방법을 알려드려야겠어.’
그녀는 그렇게 다짐했다.
질식으로 인한 사망은 사고와 같은 거라 언제, 어느 때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니 엘리제는 그녀에게 늦지 않게 예방법을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간신히 기침을 멈춘, 공작부인이 말했다.
“하아, 힘드네요.”
“조심하세요, 부인.”
“네, 그래야겠어요. 아, 영애. 사실 전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어떤?”
“폐하께서 영애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는데, 가보시겠어요?”
“……!”
엘리제의 얼굴이 굳었다.
드디어 황제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운명이 걸린 대면이었다.
***
황제, 민체스터 드 로마노프는 연회장에 연결된 2층 방의 발코니에 서 있었다. 홀 쪽으로 난 발코니라 연회장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엘리제는 요동치는 가슴을 참으며 예를 올렸다.
민체스터가 그녀를 돌아보더니 빙긋 웃었다.
“오랜만이네, 영애. 한 달 반 정도 되었나?”
“네, 폐하.”
“병원에서 일이 많이 힘들었나 보군. 많이 말랐어.”
“아닙니다, 폐하.”
“아니긴 뭘 아니야. 안색이 안 좋은 걸 보니 마음이 안 좋아.”
“송구스럽습니다.”
민체스터는 혀를 찼다.
“영애.”
“네, 폐하.”
엘리제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가로이 안부나 나누려고 따로 부르진 않았을 터. 분명 어제 일을 꺼낼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 달랐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 말씀하시옵소서.”
“지난번 만났을 때, 짐에게 달여 준 차를 다시 한 번 타줄 수 있겠나?”
한가로이 차를 달일 마음이 아니었으나, 누구의 부탁인데 거절하겠는가.
엘리제는 공손히 답했다.
“네, 폐하.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그녀는 시종에게 말해 찻잎을 비롯한 필요한 도구들을 가져오게 했고,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차를 달이기 시작했다.
‘하아, 도대체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이신 걸까?’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고요히 차를 끓이고 있는 덕분일까? 흥분했던 가슴이 차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쨌든 잘 이야기해 보자. 이대로 흘러가게 놔둘 수는 없어.’
차가 끓으며 향이 그윽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동방의 고요한 나라, 려(麗)를 연상시키는 깊은 그 향에 황제가 말했다.
“영애는 모를 걸세. 내가 지난번 영애가 달여 준 차를 마시고, 얼마나 그 차 맛을 그리워했는지. 영애가 일러준 레시피대로 해도 도통 그 맛이 나지를 않더군. 도대체 어떻게 이런 향을 낼 수 있는 건가?”
“과분한 칭찬입니다. 오히려 제 부족한 솜씨가 폐하의 입맛을 어지럽힐까 걱정입니다.”
엘리제는 겸손히 답했다.
황제는 그녀가 내온 차를 천천히 들었다.
“역시 좋군.”
그는 가만히 미소 지으며 차의 맛을 음미했다.
그렇게 잠시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잔잔한 차 향 때문일까? 홀 쪽의 발코니 너머로 연회가 한참이었으나, 그들이 있는 방은 동떨어진 세상처럼 느껴졌다.
“…….”
엘리제는 치마 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초조한 마음이 들었으나 참았다.
그가 먼저 입을 열기를.
이윽고.
황제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영애.”
“네, 폐하.”
“짐한테 물어볼 말이 있지?”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왔다. 어쩌면 지금의 대화가 앞으로 그녀의 운명을 가를지도 모른다. 반드시 잘 이야기해야 한다.
“네, 폐하. 송구스러우나 허락하신다면 한 가지만 여쭤 봐도 괜찮겠어옵니까?”
“말해보게.”
“지난번 내기는 어떻게 되는 것이옵니까?”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성인식 이전, 의사로서의 가치를 증명해 내면 황태자와의 약혼을 취소하겠다는 내기.
그녀에게 말도 안 되게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이길 자신이 있었다. 아니,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무조건 이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내기를 엎으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녀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그걸 왜 물어보나?”
그런데 황제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네?”
“당연히 유효하지.”
“……!”
“영애와 개인적으로 한 내기이긴 해도, 짐은 서 대륙을 넘어 전 세계를 아우르는 대 브리티아 제국의 황제. 한입으로 두말은 하지 않아.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그 장담에 엘리제는 당황했다.
그러면 어제 발표는?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개구진 미소였다.
“정식 발표 아니지 않은가?”
“…….”
“약혼식을 올린 것도 아니고, 심지어 정식으로 발표한 것도 아니네. 영애가 짐과의 내기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엎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하지만…….”
그녀는 머뭇거렸다.
물론 황제의 말이 맞다.
아직 정식으로 발표한 것은 아니니까. 식을 올린 것도 아니고. 엎고자 하면 엎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번복하면, 황제 민체스터의 위엄이 손상된다. 그 누구보다도 드높고, 존경받아야 하는 황제의 위엄이 말이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짐이 감수할 문제지. 걱정 말게. 로마노프의 이름을 걸고 영애의 명예가 손상될 일은 절대 없게 할 테니.”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리고 이 뇌제(雷帝)의 권위는 고작 이런 걸로 손상되지 않아.”
“……!”
“어차피 황제의 권위는 신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영애? 난 그런 면에서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민체스터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
이게 바로 로마노프 황가의 제왕학(帝王學).
섬기기 위해 지배한다(Governance for serving).
황제의 권위는 신민들을 위하는 마음으로부터.
이 원칙들을 지켰기 때문에, 수많은 왕가가 몰락하는 격변의 시대에도 로마노프 황가가 절대적인 황권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었고, 민체스터가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영애.”
“네, 폐하.”
“내기에 확실히 이길 자신이 있나 보지? 자꾸 이겼을 때를 걱정하는 것을 보면. 하지만 어떻게 하지?”
황제가 짓궂게 말했다.
“짐도 절대 질 생각이 없는데 말이야.”
“……!”
“정확한 내기 내용은 이러했지. ‘황태자비, 후에 황후가 되는 것보다 의사로서 더 가치 있는 일을 해낼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 그런데 의사로서 어떤 업적을 남겨야 대 브리티아 제국의 황후가 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하는 것인지, 짐은 잘 모르겠군. 영애가 성인식 전에 그런 업적을 남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엘리제는 황제의 의향을 깨달았다.
그는 무려 ‘업적’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웬만한 일을 해낸 것으로는 절대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구나.’
더구나 이 내기의 심판은 황제로, 그가 아니라고 하면 그대로 그녀의 패배였다.
그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황제조차도 부정할 수 없는, 그런 대단한 일을 해내야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성인식 이전, 몇 달도 안 남은 시간 동안에.
그의 의중을 깨달은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지지 않아.’
엘리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그녀는 질 수 없었다. 반드시 이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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