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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42화 (42/194)

00042  2-3 검제(劍帝)  =========================================================================

“그, 그래도 감금 중인데 술은…….”

“여기 있으라고 했지,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이야기는 안 했잖아. 그런 말 들은 적 있어?”

그야 아무도 그런 짓 안 하니까!

하지만 3황자는 당당했다.

“없지? 그러니 해도 되는 거야.”

“…….”

“마시자. 너도 싫은 것은 아니지? 무려 프랑소엔 제국의 황실에 내려오던 황실주라고.”

참고로 프랑소엔 제국은 시민 혁명이 일어나기 전, 공화국의 국명이었다.

“하지만...”

물론 그녀도 싫지는 않았다.

엘리제의 몸으로 돌아온 뒤로 한 번도 술을 마신 적은 없었지만, 지구에서 그녀는 외과의사였으니 어느 정도 술을 좋아하긴 했다.

하지만 이래도 되는 걸까.

“아직 저는 성인식도 안 치렀는데…….”

“그러면 더 마셔 봐야겠네! 성인이 되기 전, 어느 정도 술을 마셔 봐야 성인식 때 실수 안 한다고! 그때 분명 엄청 마시게 될 테니. 그리고 리제, 너는 성인이 될 때까지 몇 달도 안 남았는데 뭐가 문제야?”

뭔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왠지 탈선을 강요당하는 소녀의 심정이 되어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의학 연구원에서 손님이 온다고 했었는데. 마셔도 괜찮을까?’

그렇지 않아도 기관 절개술을 논하기 위해 내일 의학 연구원에서 2명의 손님이 온다고 연락받았다.

‘뭐, 특별한 용무는 아니고 기관 절개술에 대해서만 논한다고 한 것이니 조금 마시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 손님이 설마 밴과 그레이엄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했다.

“알겠어요. 대신 저는 조금만 마실게요.”

“그래, 그래. 하지만 마시다 보면 더 마시게 될걸? 이 ‘프랑소엔 제국’ 시리즈는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거든.”

“네에…….”

그렇게 ‘비극의 혈탑(血塔)’이라 불리는 백원의 궁에 때아닌 술판이 벌어졌다.

안주는 심지어 로열 가드가 준비하였다.

“……맛있게 드십시오.”

엘리제가 이래도 되는 거야? 하는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자, 로열 가드는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란 얼굴이었다.

“언젠가 이 술이 없어진 걸 알고 화내실 부황을 위하여, 건배!”

“……그런데 전하가 이번에 감금되었던 것도 탄신연회에 사용할 의례용 포도주를 훔쳐 마셔서 아니었나요?”

3황자가 갇힌 이유.

의례주(儀禮酒)를 훔쳐다 길거리의 시민들과 진탕 마신 탓이었다. 격노한 부황이 백원의 궁에 가두라 했다고.

“아, 그런 건 몰라! 미인은 사귀라고 있는 거고, 미주는 마시라고 있는 거지, 의례에 사용하고 버리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참 대책 없는 말이었지만 왠지 유쾌한 기분이 들어 엘리제는 웃었다.

“쿡쿡, 알겠습니다. 네.”

“자, 그러면 진짜로 건배.”

짠.

유리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혔고, 얕게 깔린 와인이 찰랑거렸다.

이제는 단종된, 프랑소엔 제국 시리즈는 특이하게 황금빛이었다.

그 황금빛 와인을 목에 넘긴 그녀는 감탄을 토했다.

‘맛있어! 역시 프랑소엔 제국 시리즈.’

프랑소엔 제국 시리즈는 지상 최고의 와인 중 하나라 평해진다.

항상 구름만 잔뜩 낀 브리티아 섬의 와인은 감히 흉내도 못 낼 맛. 똑같이 명주라 불리는, 포르투의 와인조차 한참 능가하는 미주였다.

‘이 와인을 내가 또 마시게 되는 날이 오다니.’

사실 그녀는 이 와인을 처음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이전 삶, 한 번 맛본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저 3황자 미하일과.

“맛있지? 더 마시라고. 얼마든지 있으니까.”

“네.”

아까 그의 장담처럼 그녀는 한 모금만 마시고 멈추지 못했다. 그만큼 맛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전 그와 마셨던, 이전 삶이 떠오르며 기분이 씁쓸해져 더욱 마시게 되었다.

‘역시 그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엘리제는 쾌활하게 웃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와인의 도수가 높아서일까? 아니면 어린 소녀의 몸이어서일까?

몇 잔 마셨다고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왔다.

그는 이전 삶에도 저랬다.

항상 자유로웠고, 즐거웠으며, 악의 없이 모두를 사랑으로 대했다.

황태자가 시민들의 존경을 받는 이라면, 3황자는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이였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유쾌한 기행, 신분을 따지지 않고 평민들과도 거리낌 없이 술잔을 나누는 쾌활함. 그리고 자랑스러운 제국 최강의 오러 나이츠.

제국 시민들은 모두 그를 사랑했다. 수없는 염문도 그의 매력이라고 여겼다.

그 시민들의 사랑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정치적 저력.

하지만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저 그의 성품에 자연스럽게 따라온 것일 뿐.

‘그런 그이니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었지.’

그녀는 울적하게 생각했다.

모두에게 외면당할 때 그만이 편견 없이 자신을 바라봐주었다.

그래서 소중했다.

‘하지만 막을 수 없겠지.’

그의 마지막을 떠올리자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는 결국 죽는다.

미래를 알고 있는 그녀이지만 그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안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바꿀 수 있는 일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마치 절대적인 명제처럼, 앞으로 일어날 그 일은 정해져 있었다.

‘유일한 방법은 그가 황권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황권을 노리고 있는지.

사실 관심도 없는 황제의 자리에 그가 어떤 절박함으로 목숨을 걸고 있는지.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슬펐다.

그 안타까운 이유가 슬펐고, 그래서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이할 그의 미래에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최후를 맞이하던 순간이 떠올라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시 그의 미소를 생각하니 가슴이 울컥했다.

“리제? 왜 그래?”

“…….”

“리제?”

놀란 3황자가 물었으나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열면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서였다.

그때 그의 마지막 말.

‘형수님, 나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있었어.’

‘무엇인데요?’

하지만 그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잘 지내란 말 한마디만 남기고 평소와 다름없는 자유로운 표정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그때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궁금했으나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다.

“…….”

그녀가 입을 다물자 자연스레 술자리도 조용해졌다.

엘리제는 잔에 남아 있던 와인을 원샷 하듯 쭈욱 들이켰다. 뜨거운 기운이 가슴에 올라오며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죄송해요. 갑자기 술기운이 올라와서 그랬어요. 이제 괜찮아요.”

미하일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눈초리.

그는 와인을 잔에 가득 따르더니 싸구려 럼주를 들이켜듯 한 번에 목에 넘겼다. 그 모습에 엘리제가 놀란 표정을 짓자 그가 말했다.

“거짓말.”

“……!”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아직 성인식도 안 치른 꼬맹이 주제에 뭐가 그렇게 슬픈 표정이야? 세상을 몇 번이고 산 사람처럼.”

엘리제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술기운에 그랬어요. 제가 술이 약해서. 신경 쓰지 마세요.”

그 흔들림 없는 대답에 3황자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여튼 귀엽게 생겨 가지고, 실제론 귀여운 맛이 없다니까. 애 늙은이도 아니고. 그렇게 혼자 속으로 삭이면 병 생긴다.”

엘리제는 그저 웃었다.

3황자는 한숨을 쉬더니 물었다.

“형님 때문에 그래? 형님이 잘 안 해주셔?”

“……!”

그녀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전혀 상관없어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형님이 잘해줄 리가 없잖아. 지금까지 여자 손은커녕, 연애도 한 번 안 해본 연애 바보이시니까. 론도에서 재미없고 무뚝뚝한 남자의 순위를 매기면 아마 형님이 1등 할걸? 네 큰오빠인 렌 남작이 2등 정도 하고.”

그 말에 엘리제는 쿡쿡 웃었다.

천하의 황태자한테 연애 바보라니.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3황자이니 가능한 표현이다.

“차라리 나한테 오는 것은 어때? 나는 형님과 달리 아주 잘해줄 수 있는데.”

“됐네요. 전하를 그리워하는 수많은 여인 중 한 명이 되고 싶지는 않거든요?”

엘리제의 말에 미하일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전하를 그리워하는 여인들을 일렬로 세우면 론도 시내를 한 바퀴 감쌀 수 있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 그건 터무니없는 모함이야. 난 항상 진실 된 사랑만 했다고.”

“네네, 알겠습니다. 어쨌든 전 사양이에요.”

미하일은 일부러인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고, 엘리제는 쿡쿡 웃었다.

사실 미하일의 말은 틀린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그의 매력에 홀린 여자가 먼저 다가온 경우가 많으니까. 그저 그의 잘못이라면 잘생기고, 매력적이라는 게 죄랄까?

어쨌든 무거워졌던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둘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나누었고, 취기가 올라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내가 동방 청에서!”

술기운이 올라 신이 난 3황자가 이전 3년간의 무사수행을 떠들었다.

엘리제는 지난 삶, 몇 번이고 들은 이야기지만 다시 재미있게 들었다.

황실에서는 가출이라 칭하는 그 무사수행은 사실 대단한 것이었다. 3년간의 그 여행이 끝나고, 그는 서 대륙 최강검(最强劍)이자 검제(劍帝)라 불리게 되었으니까.

더구나 검제란 별명은 서 대륙이 아닌, 무술의 본고장이라는 동방 청의 무인들이 경외를 담아 붙여준 존칭이었다.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中華)이라는 착각에 완고하기 그지없는 그들이 양이(洋夷)에게 말이다.

론도의 중심가에서는 당시 그의 가출을 영웅서사시 비슷한 걸로 꾸며 펼치는 연극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말이지. 청에는 악인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 있었어. 청은 땅이 워낙 넓어, 나라 크기가 거의 서 대륙 전체만 해서 중앙 정부의 손이 안 닿는 곳이 많았거든. 그런데 검룡(劍龍)이란 협객과 내가…….”

미하일은 즐거운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고, 엘리제는 열심히 맞장구쳐 주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갔고, 술도 거의 떨어져 알딸딸하게 기분 좋은 취기가 흐를 때 3황자가 말했다.

“리제, 물어볼 게 있어.”

“네? 말씀하세요.”

그가 엘리제의 눈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넌 왜 의사가 되려는 거야?”

“……!”

기분 좋게 떠들 때와 다르게 진지한 물음.

“그건 왜 물어보세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클로랜스 가문의 딸인 네가 굳이 의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싶다는 뜻은 좋지만, 어차피 너 아니어도 사람을 살릴 의사는 많잖아. 굳이 대귀족인 네가 고생하며 의사가 되는 게 의미가 있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가 아니어도, 이 제국에 의사는 많다. 물론 그녀처럼 최첨단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의사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렇다.

남들이 보기에 굳이 하위귀족도 아닌, 대귀족인 클로랜스 가문의 딸이 의사가 되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충분히.

하지만…….

그녀는 대답하기 전 반문했다.

“전하, 외람되지만 저도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될까요?”

“응? 물어봐.”

“전하께서는 왜 검(劍)을 익히셨나요?”

그 물음에 미하일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황족인 전하께서 검을 연마하실 이유는 없으신데.”

그렇다.

대부분 황족은 그저 검술을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익혔다. 황태자인 린덴이 상당한 수준으로 검술을 익히긴 했지만 그가 특이한 경우였다.

왜?

필요가 없으니까.

황족들은 강력한 초상 능력의 소유자여서 검술이 의미가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시대가 변했다.

지금은 총과 대포의 시대.

이전 기사의 시대면 모를까, 지금은 개개인이 아무리 강해도, 전장에서 영향이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3황자는 검술을 연마했다.

그것도 검제란 칭호를 얻을 만큼 높은 경지까지.

그가 초상 능력자라서 검술을 쉽게 익힌 것도 아니다. 초상 능력과 오러, 검술은 전혀 별개였다. 오로지 본인의 피나는 노력만으로 그런 경지까지 도달한 것이다.

도대체 왜? 어째서?

3황자는 중얼거리듯 답했다.

“그야…… 검이 좋으니까.”

그래,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검을 좋아하니까.

그냥 좋아하는 것이 아닌, 매혹당해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미친 듯이 좋아하니까.

엘리제가 그 대답에 빙긋 웃었다.

“저도 그래요.”

“……!”

“저도 좋아해요. 사람을 치료하는 일.”

그녀는 지구에서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엔 첫 번째 삶의 잘못을 갚고자 선택했다.

하지만 수술장에 들어갈 때마다, 그 긴장감을 느낄 때마다, 생명이 살아나는 장면을 경험할 때마다.

그 일에 매혹되었다.

“너무너무 좋아해요. 그 어떤 것보다. 이 일을 못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의사가 되려는 거예요.”

그래, 이건 매혹되었다기보단 차라리 중독이란 말이 어울렸다. 이제 자신은 이 일과 떨어져선 살 수가 없었다.

만약 폐하와의 내기에서 져서.

“제가 의사가 될 수 없다면, 그래서 사람을 치료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저는 새장에 갇힌 새처럼 영혼이 말라 버릴 거예요.”

그러니 반드시 폐하와의 내기를 이길 것이다.

그래서 저 창공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게 원하는 일을 하며 살 것이다.

그렇게 행복해질 것이다.

============================ 작품 후기 ============================

내일 화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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