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9 2-5 변곡점 =========================================================================
[2막 : 小和田 雅子???]
[2-5장 : 변곡점 (3)]
***
그렇게 엘리제는 자격을 갖춘 정식 의사가 되었다.
그것도 역대 최고점 수석 합격자뿐 아니라, 역대 최연소 합격자로.
사람들은 황태자비가 될 거라고 알려진 그녀가 이후 어떤 행보를 보일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녀는 원래 일하던 테레사 병원에서 계속 일했다. 다만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도제가 아닌, 의사로서 정식 취직했다는 점이었다.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가 테레사 병원에서 계속 일한다고? 그 황태자비로 정해진?”
“그렇다는데?”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그녀를 지켜봤다.
클로랜스 가문만 한 대귀족 출신이 의사가 된 적도 거의 없었고, 황태자비로 내정된 이가 의사가 된 적은 더더욱 없었으니까.
“대단하시군. 빈민들이 주로 오는 테레사 병원에서 일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닐 텐데.”
“그러게 말이야. 남자들도 학을 뗀다던데. 황태자비가 되기 전, 건강이라도 상하는 것 아닐까 걱정이야.”
사람들의 시선은 주로 호의적이었다.
황태자비가 될 거라 예정된 지고한 여인이 구제 병원에서 빈민을 돌보는 것이 나빠 보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까운 시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황태자비가 될 거면서, 왜 의사를 한다고 그런담? 저거 다 그냥 정치적 쇼 아니야?”
“그러게.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
주로 클로랜스 가문과 대립 관계인 귀족파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엘리제가 황태자비가 되기 전, 대중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쇼를 벌이고 있다고 폄훼했다.
근거 없는 헐뜯음은 아니었다.
실제로 엘리제는 테레사 병원에서 일하면서 시민들에게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고 있었으니까.
[퍼스트레이디가 될 지고한 여인,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빈민구제병원에서 남을 위해 봉사하다!]
사실 어느 정도 오해였지만, 일반 시민들은 열광했다.
세상에 저런 황태자비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당장 옆 나라 프랑소엔에서 앙투 황후가 시민들의 분노로 단두대에 목이 잘린 게 50년도 안 된 일이었다.
합스브루엔 가문 왕녀들의 사치도 유명한 일이었고.
“위대한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 그리고 데임 클로랜스를 위하여 건배!”
시민들은 펍에서 술을 마시며 황실의 이름을 위해 건배할 때 엘리제의 이름도 같이 건배했다.
그만큼 그녀는 아직 정식 약혼도 안 했으면서 시민들에게 굉장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황태자비가 이런 인기를 얻은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지만, 막상 당사자인 엘리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난 황태자비가 되지 않을 거니까.’
그녀는 그렇게 굳게 생각했다.
4개월.
그 안에 반드시 황제와의 내기를 이길 것이다.
그래서 황태자와 연관 없는 평범한 의사의 삶을 살 것이다.
‘최선을 다하자, 엘리제.’
그런 마음으로 그녀는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돌봤다.
아니, 꼭 내기가 아니라도 그녀는 환자를 돌보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좋아하는 일이니까.
꿈에서 바라던 일이니까.
‘즐거워.’
의사 자격증을 따니 너무 좋았다.
도제 때와 다르게,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진료를 할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기회.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고 행복하게 환자를 진료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 이주일.
한 달, 두 달.
폐하와의 내기와는 별개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몸이 약한 탓에, 여러 차례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엘리제는 정말 원 없이 환자에 몰두했다.
‘넌 이상해.’
과거 한국에서 서울대 의대 친한 동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환자를 보는 게 그렇게나 즐겁다니. 물론 어느 정도 보람이야 느낄 수 있지만. 아무리 보람차도 결국 일이잖아. 그런데 즐거워? 넌 이상해. 아무리 좋게 봐줘도 넌 일중독, 워커 홀릭이야.’
그래,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이상했다.
이 일이, 환자를 보는 것이 이유 없이 좋았으니까.
하지만 꼭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화가가 그림을 좋아하는 데에는, 가수가 노래에 중독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자신도 그저 이 일에 빠졌을 뿐이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이 멈췄으면 싶을 만큼, 행복한 나날들.
하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평온한 행복을 더 허락하지 않았다.
3달.
성인식을 딱 한 달 남겨둔 그때.
그녀의 운명을 뒤바꾼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났다.
첫 번째 사건은 크림반도를 향한 프랑소엔 공화국의 참전이었다.
확전이 될 거라 알고는 있었지만, 예상과 전혀 다른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참전이 결정된 프랑소엔군의 규모였다.
40만.
무려 40만이었다.
이전 삶과 비교했을 때 두 배가 넘는 대군으로, 이런 대군에 맞서려면 천하의 브리티아 제국도 상비군만으로는 불가능했다. 대규모 징병이 불가피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전운이 론도에 몰려들었다.
사건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두 번째 사건은 바로 론도 대역병(大疫病).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제국의 수도 론도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엘리제 드 클로랜스, 이 작은 소녀는 이 사건들로 인해 의학사(醫學史)가 아닌, 일반 역사서(歷史書)에 처음으로 이름을 남기기 시작한다.
***
브리티아 제국의 황궁.
제국을 통치하는 세 명의 거인이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놈들이 미쳤나 보군. 40만? 정확한 정보겠지, 재상?”
황제 민체스터가 혀를 찼다.
“네, 폐하. 프랑소엔 정규군 30만, 검은 대륙의 무어군 7만, 스위센의 용병 3만. 도합 40만이 맞습니다.”
40만.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니콜라스 총통, 그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시몬 니콜라스.
프랑소엔 공화국을 무려 30년이나 독재한 자.
사실 공화국은 말만 공화국이지, 피의 독재자 니콜라스 총통의 개인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크림반도 이남의 흑해가 저희의 영향권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많아. 15만, 많아도 20만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때 옆에서 가만히 있던 황태자 린덴이 입을 열었다.
“위기감을 느껴서인 것 같습니다.”
“위기감?”
“네, 현재 크림에 원정 중인 2군단은 큰 피해 없이 승전 중입니다. 클로랜스 영애의 조언 덕에 공화국의 계책이었던 몽셀 왕국의 개입도 큰 피해 없이 막았고, 마침 유행했던 전염병도 적은 피해로 끝났습니다. 이대로 원정이 진행된다면 크림반도가 저희 제국에 떨어지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 어지간한 지원군으로는 대세를 뒤집을 수 없다 판단해 이런 대군을 일으킨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건 공화국 정부에 밀파된 정보원이 보낸 정보를 토대로 한 추측으로 정확한 판단이었다.
“어쨌든 우리도 물러날 수는 없으니 전면전의 양상이 되겠군.”
“네, 큰 전쟁이 될듯합니다.”
참 얄궂은 일이었다.
과거 엘리제가 전략을 조언한 이유는 단 하나,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그 일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대규모 확전의 빌미가 되다니.
“돈놀이꾼만 좋아하겠군. 여기저기서 많이 빌리려 들 테니. 그네가 제일 좋아하는 것 아닌가? 전쟁 나면 돈 빌려주고 이자 받아먹는 것.”
“그러게 말입니다.”
엘 후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돈놀이꾼.
귀족파의 차일드 후작을 뜻한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수장으로 있는 국제금융재벌인 차일드가(家)의 족속들을 칭하는 말이다.
차일드 가문은 브리티아 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 프랑소엔 공화국에도, 스페냐 왕국에도, 프러시엔 공국에도.
서대륙 열강들에 각자 다른 이름으로 뿌리를 내려 수많은 은행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실상 서대륙의 돈줄을 움켜쥐고 있는 자들.
그런 강력한 금권(金權)을 가지고 있기에, 황제인 민체스터도 함부로 손을 못 대고 있는 것이었다.
“재상.”
“네, 폐하.”
“우리가 투입할 수 있는 상비군이 어느 정도지?”
“급한 대로 서대륙 본토 북단의 로마노프령(領)에서 15만 정도입니다. 다른 대륙에 주둔 중인 병력은 움직이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될 듯합니다.”
“그러면 추가로 브리티아 섬에서 최소 15만 이상은 징병해야겠군.”
“그렇습니다.”
민체스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민체스터는 잠시 친구의 눈으로 돌아가 자신의 오랜 벗인 엘 후작을 바라봤다.
“귀족 가문에선 최소 2명씩은 참전해야 할 거야. 괜찮겠나, 엘?”
“……!”
그 물음의 의미를 깨달은 엘 후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굳게 고개를 저었다.
“뭘 그런 걸 물으십니까?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은 귀족의 가장 큰 명예.”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미안하고. 주님의 가호가 클로랜스에게 임하길.”
2명의 참전.
그 말은 엘 후작의 두 아들, 렌과 크리스가 모두 참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최악의 경우 두 명 모두 전사해 직계의 대가 끊길 수도 있는 일.
하지만 아무리 고위귀족이라도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에는 예외가 없었다. 아니, 고위귀족이기에 더욱 앞장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것이 브리티아 제국의 오랜 전통이었고, 귀족의 명예였기 때문이다.
만약 아들들이 전쟁에서 모두 사망해 대가 끊길 경우, 방계의 혈족을 입양해 가문을 잇곤 한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둘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제발.’
엘 후작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착잡한 마음은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린덴, 너도 꼭 조심해야 하느니라. 아무리 초상 능력자라도 총알이 피해가지는 않으니.”
황제가 아버지의 마음으로 말했다.
황실도 군역의 의무에 예외는 없다.
아니, 그 누구보다 앞장서야 한다.
-군대는 로마노프를 위해 싸우고, 로마노프 황실은 조국인 브리티아를 위해 싸운다!
이게 바로 브리티아 제국의 원칙이었으니까.
실제로 2년 전, 검은 대륙의 앙젤리 전쟁 때 1, 2, 3황자가 모두 참전했었고, 그중 첫째인 1황자가 공화국의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시체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첫째의 주검을 보고, 민체스터는 남들 앞에서 눈물을 제대로 흘리지도 못했다.
제왕이었으니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기에.
하지만 남몰래 얼마나 통곡했는지 모른다.
아무리 철혈의 제왕이라도 그도 결국 아버지였다. 아들의 죽음은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 넣었다. 15년 전, 황실의 비극 이후 두 번째 대못이었다.
그 이후 다시는 핏줄의 죽음 따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도 황태자, 그리고 3황자 모두 참전할 것이다. 황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
그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황태자를 돌아봤다.
그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그날의 비극’ 이후 표정을 잃은 자신의 아들.
‘다 내 잘못이지.’
황제는 씁쓸하게 웃었다.
알고 있다. ‘그날’의 일이 린덴에게 어떤 상처가 되었을지. 자신조차도 아직 이렇게 아픈데, 어렸던 그는 어땠겠는가?
돌이킬 수 있다면.
아니,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과연 돌이킬 수 있을까?
민체스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탁 트인 시야로 250만 시민이 사는 수도 론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날씨가 좋군.”
그가 사랑하는 수도의 전경.
저 전경을 위해, 시민들을 위해 일평생을 바쳤다. 그래서 명군이라 칭송받는 군주가 되었다.
하지만 과연 의미 있는 삶이었을까? 이 민체스터 드 로마노프의 삶은?
“정말 날씨가 좋아.”
그는 중얼거렸다.
하늘이 시리도록 맑아서일까?
갑자기 한 가지 바람이 들었다.
‘린덴이 출정하기 전, 엘리제 그 아이와 약혼식 올리는 모습이라도 봤으면 좋겠군.’
하지만 그때, 민체스터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프랑소엔 공화국의 참전 말고도, 론도에 또 다른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단 것을.
2차 론도 대역병(大疫病) 사건.
엘리제의 이전 삶, 론도 시내에서만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전염병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벌써 이 순간, 론도의 각 병원에서는 사망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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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일요일 09:07분에 올라갑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