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98화 (98/194)

00098  4-1 탈출  =========================================================================

1장 탈출 - 5

파앗!

위고 중장은 총알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냈다. 전신을 감싼 오러가 그걸 가능하게 했다.

“조심하십시오! 검에는 눈이 없으니!”

그러고 그는 그대로 린덴에게 돌진했다.

타앙! 타앙!

연달아 총을 쏜 린덴은 권총을 엘리제에게 건네주고,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까앙!

검과 검이 부닥치며 불꽃을 튀겼다.

“……!”

자신의 코앞에서 멈춘 위고의 검을 보며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곧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얼핏 생각하면 린덴의 일방적 우세일 것 같았다. 그에겐 초상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위고는 공화국 최고의 검술가. 린덴의 초상 능력을 강렬한 의지로 피하고 버텨내며 맹렬한 프랑소엔 검식으로 그를 몰아붙였다.

브리티아 제국 내에서도 위고에 맞먹는 검술을 지닌 자는 검제 미하일과 엘리제의 큰오빠 렌 남작, 그리고 로열가드의 수장 길버트 백작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린덴에게는 품 안에 안겨 있는 엘리제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는 지금 가급적 강력한 초상 능력의 사용을 자제해야 했다. 심페폴을 탈출하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초상 능력을 사용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하! 전하. 순순히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포로로서 대접해 주겠습니다!”

늙은 위고는 의기양양해 외쳤다.

린덴은 얼굴을 굳혔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끝을 내야겠어.’

저 멀리 적의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저들마저 합류하면 그때는 더욱 빠져나가기 어려워진다.

그렇게 그가 무리해 강력한 초상 능력을 이끌려던 찰나, 팽팽한 접전이 끝나는 일이 일어났다.

위고와 린덴, 둘 모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타앙!

“어?”

위고는 자신의 어깨를 멍하니 바라봤다. 총알에 꿰뚫려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시선을 앞으로 돌리니, 공제의 품에 안긴 어린 소녀가 이를 악물고 리볼버로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리볼버가 다시 불을 뿜었다. 위고의 시야가 빛으로 번쩍였다.

타앙! 타앙! 타앙!

이번엔 간신히 오러로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흔들린 이상 승부는 끝났다. 초상 능력의 올가미에 걸려든 것이다.

린덴의 ‘눈 가리기’, ‘의식 추방’이 번갈아 들어갔고, 결국 위고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말에서 떨어졌다. 한동안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

위고를 쓰러뜨린 후 린덴은 다소 당황해 엘리제를 바라봤다.

이 작은 소녀가 총질이라니?

작은 소녀는 떨리는 손으로 총을 부여잡고 있었다.

“……어떻게 총을 쏠 생각을 한 것이지?”

“쏘라고 주신 것 아니었나요?”

“아니, 그냥 가지고 있으라 준 건데…… .”

“그, 그런가요. 죄, 죄송합니다.”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린덴은 피식 웃었다.

이런 모습도 사랑스러운 것을 보면 내가 미친 게 맞는 거겠지?

어쨌든 그녀 덕에 큰 문제 없이 공화국 최강자인 위고를 막을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추가적인 흉갑기병대가 달려오는 듯해, 린덴은 서둘러 말을 달렸다.

“잡아! 저러다 빠져나가겠다!”

길을 달리면 달릴수록 쫓는 인원이 많아졌다.

위고와 싸우며 잠깐 낭비한 시간이 컸다.

얼핏 뒤를 돌아보니 대로에서 까마득한 기병대가 그를 쫓고 있었다.

아무리 그라 해도 이제 멈추어 서면 끝이었다. 한 번에 성문을 주파해야 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저 멀리 성문이 보였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성벽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드디어 성문에 도착한 순간.

“…….”

엘리제는 좌절했다.

성문이 굳건히 닫혀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 중인 수도의 성문이 한밤중에 열려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잡아라! 저 앞에 갇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등 뒤에서는 흉갑기병대가 떼를 지어 달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황태자라도 저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짧은 순간 고민해 봐도 그녀의 머리로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늘로 솟아오르지 않는 한, 이 위기를 어떻게 넘어가겠는가?

그런데 그때, 린덴이 의외의 행동을 하였다.

말을 좀 더 앞으로 몰더니, 성문에 다가간 것이다.

“전하?”

“쉬잇.”

그는 조용하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성문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눈을 감았다.

“……?”

마치 벽을 짚고 명상이라도 하는 듯이 고요한 표정.

하지만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의 주위 공간이 시야가 어지러울 정도로 일그러지더니!

우웅. 우웅.

고요한 파동과 함께 철로 만든 성문이 기이한 진동음을 내며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

그 놀라운 광경에 엘리제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쩌적. 쩌저적.

마치 흙으로 만든 얇은 벽이 지진에 금이 가듯 성문에 금이 갔다.

이후 와르르. 철로 만든 성문이 모래성 무너지듯 무너져 내렸다!

“……!”

그 말도 안 되는 기적에 엘리제는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건 뒤따르던 흉갑기병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말을 달리는 것도 잊고 멍하니 멈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저, 저, 저……?”

이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킨 린덴이 짧게 말했다.

“가자.”

“…….”

그런데 그를 올려다본 엘리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저, 전하……?!”

“조용히.”

그의 입가에서 피가 주륵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안색도 창백한 게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린덴은 흔들림 없는 얼굴로 말했다.

“간다.”

그러고 발굽으로 말허리를 차 심페폴을 벗어났다.

공화국의 자랑 흉갑기병대는, 그리고 여러 병사는 경악에 휩싸여 감히 그를 쫓을 생각도 못했다.

***

“커억!”

심페폴의 성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린덴은 왈칵 피를 토해냈다.

“전하!”

엘리제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새빨간 선홍색의 피였다. 출혈양도 많았다.

하지만 린덴은 옷으로 피를 닦더니 오히려 그녀를 보며 걱정했다.

“다친 데는 없느냐?”

“……!”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왜? 왜?

저렇게 안 좋은 상태에서도 자신을 먼저 걱정하는 걸까? 목숨이 위험한 곳에 왜 자신을 구하러 온 걸까?

-알잖아.

그래, 안다. 모를 수가 없다. 저렇게 온몸으로 외치는데.

이제 외면하지 못한다.

“미안하다.”

그는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판단해서 널 위험하게 만들었어.”

그는 사막의 전갈의 기만술에 넘어가 그녀를 포로로 만든 것을 말했다.

그녀는 다시 가슴이 울컥했다.

이전 삶 자신에게 단두대를 내렸던 이 남자가 왜 이렇게 바보같이 바뀌었을까? 도대체 왜?!

알 수 없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그녀는 급히 그에게 말을 꺼냈다.

“빨리 몸 상태를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린덴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괜찮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안 됩니다. 피를 토하신 걸로 봐서 내부 장기가 상하셨을 수도 있어요.”

“정말로 괜찮아. 초상 능력의 반작용이니 시간 지나면 저절로 나을 거다.”

그러나 의사로서 엘리제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피를 토했고, 저렇게 안색이 창백하다. 분명 몸 내부 어딘가가 상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냥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라고?

“전하…… 빨리 제대로 치료를 받아야…….”

그런데 린덴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기쁜 표정으로.

“지금…… 나를 걱정해 주는 건가?”

“……!”

“그렇지? 걱정해 주는 것이 맞는 거지?”

그는 약간의 씁쓸함과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너의 걱정이…… 의사로서 환자를 염려하는 마음이겠지만…… 그래도 기쁘군.”

그의 목소리에는 이렇게라도 그녀의 관심과 염려를 받을 수 있어서 기쁘다는 마음이 들어 있었다.

그 순간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야.

의사로서 환자를 향한 걱정?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듯 저밀게 아픈 감정이 어찌 의사로서 환자를 향한 감정일까?

“어쨌든.”

린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곳은 이런 대화를 나누기 적절하지 않군. 곧 공화국군이 몰려올 테니 말이야. 따라잡히기 전에 빨리 이동해야겠어.”

“그러면 북쪽으로?”

제국군의 진영은 심페폴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북쪽은 안 돼. 심페폴 바로 북쪽엔 공화국군이 밀집해 있으니까.”

물론 제국군 군영을 향한 최단 거리는 일직선으로 북쪽 방향이다.

‘나 혼자라면 강행돌파를 시도해 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적들이 밀집해 있어도 린덴 혼자라면 돌파를 시도해 볼 법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겐 그녀가 있다. 무리하게 돌파를 시도다가는 그녀가 상할 수도 있다.

‘그건 절대 안 돼.’

이미 그는 그녀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상할 바엔 자신이 죽는 것이 낫다.

그러니 그는 차선책을 택했다.

“남서쪽으로 간다.”

“남서쪽이요?”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서쪽이면 제국군 군영과 오히려 멀어지는데?

“심페폴 북쪽에 모든 공화국군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남서쪽엔 적의 병력이 거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서쪽엔 우크라 산맥의 지맥이 연결돼 있다.”

“……!”

엘리제는 그의 의중을 알아챘다.

“우크라 산맥은 크림반도에서 가장 험난한 산맥. 우린 공화국군의 눈을 피해 우크라 산맥을 타고 북쪽으로 이동한다.”

***

그렇게 그들은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우크라 산맥으로 향했다. 린덴의 예상대로 공화국군은 거의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방향을 파악당하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는데,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공제가 북쪽이 아니라, 남서쪽으로 향했다고?”

“네, 장군.”

“우크라 산맥을 통해 북쪽으로 향할 속셈인가 보군.”

흉갑기병대의 사령관, 위고 중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지난밤, 엘리제의 총에 맞은 어깨 부위를 붕대로 감싸고 있었다.

‘확실히 우크라 산맥이면 우리 군의 눈을 피해 북쪽으로 달아날 수 있겠어.’

우크라 산맥은 험지. 아무리 반도 중부 이남을 장악하고 있는 공화국군이라도 산맥에 속속들이 군을 배치하고 있진 않는다.

“그래도 놓칠 수는 없지.”

그는 강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단 하나 남은 마지막 역전의 기회야.’

현재 공화국군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전방위적으로 제국군에게 밀리고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는 예비 황태자비인 엘리제 때문이었다.

-황태자비를 구하자!

-등불을 든 여인을 납치한 공화국군을 가만두지 말자!

엘리제는 단순한 예비 황태자비가 아니었다.

고귀한 몸으로 등불을 든 채 제국군과 함께하는 여인이었고, 그들 모두의 마음속 레이디였다.

그런 그녀를 잡아갔으니!

제국군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은 전장 어디에서도 몸을 아끼지 않고 공화국군을 향해 돌진했고, 병력의 질은 물론 기세까지 밀린 공화국군은 속수무책으로 패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니콜라스 각하마저.’

지난밤, 공제는 등불을 든 여인을 구해가며 니콜라스의 왼쪽 팔을 잘랐다.

그렇지 않아도 오른팔에 총상을 입어 몸 상태가 안 좋았던 니콜라스에겐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중상이었다.

또다시 응급 수술을 받아 간신히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그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그리고 몸 상태보다 최악은 정신 상태였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엘리제! 공제!’ 하며 분노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총사령관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급하게 임시로 흉갑기병대의 사령관인 그가 공화국군을 이끌고 있었다.

‘지금 상태로 가다간 우리 군의 패전은 기정사실. 이제 단 하나 남은 기회는 공제를 잡는 것이다.’

그래도 단 하나 운이 좋은 것은 바로 적 총사령관인 공제와 등불을 든 여인이 자신들의 세력권에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우크라 산맥이 복잡해도 공제 혼자라면 모를까. 등불을 든 여인과 함께라면 움직임의 제한이 있을 터. 병력을 투입하면 충분히 잡을 수 있어.’

그렇게 판단한 위고 임시 사령관은 강하게 명령했다.

“가능한 병력을 모두 우크라 산맥에 투입해라. 반드시 공제와 등불을 든 여인을 잡아야 한다.”

그 명대로 공화국의 병력이 우르르 우크라 산맥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린덴과 엘리제를 잡기 위하여.

============================ 작품 후기 ============================

내일 12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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