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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97화 (97/194)

00097  4-1 탈출  =========================================================================

1장 탈출 - 4

서걱!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탓에 정확한 공격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진 대가는 컸다.

그의 왼팔이 팔꿈치에서부터 공간 베기에 그대로 잘려 나간 것이다!

“크아악! 크악!”

린덴은 그 고통스러운 비명을 차갑게 바라봤다.

엘리제를 납치한 것도 모자라, 그녀를 범하려 했다. 일말의 동정도 필요 없는 놈이다.

오히려 이 순간, 확실히 숨통을 끊어놔야 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공제를 잡아라!”

타앙! 타앙!

사격 준비를 마친 공화국군이 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린덴의 눈이 다시 금빛으로 변하며 그와 그녀의 주위의 공간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무(無)속성의 공간 방어였다.

‘아쉽군.’

그는 바닥에서 구르며 비명을 지르는 루이 니콜라스를 차갑게 바라봤다.

이렇게 사격을 받는 상황에서 자신 혼자면 모르겠지만, 엘리제가 있는 상태에서 저놈을 잡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다가 일순 방어가 약해져 그녀가 상하기로도 하면 큰일이니까.

“이제 가야겠군.”

“어, 어떻게요?”

엘리제는 혼이 빠진 얼굴로 말했다.

지금 이게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상황인지 모르겠다.

“밖으로.”

“네? 그게 무슨……?”

엘리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도고 계단이고 모두 공화국군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만 그녀는 곧 답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그가 어떻게 아무도 모르게 이 건물 4층에 올라왔는지도 알 수 있었다.

린덴이 그녀의 무릎과 허리를 잡아 번쩍 안아 들었던 것이다.

“저, 전하?!”

“꽉 잡고 있어. 놀라지 말고.”

“네?”

그러고 그가 자신을 안고 향하는 방향을 본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저, 전하? 저기는?!”

“꽉 잡아.”

창문이었다!

그는 4층의 창문으로 가더니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꺄악!”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이, 이렇게 죽다니!’

물론 아까 전처럼 루이에게 범해질 바에는 죽는 게 낫긴 했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린덴이 그녀를 안은 그대로 발을 허공에 내디뎠다. 동시에 그의 눈이 다시 한 번 빛났다.

무(無) 속성 초상 능력, ‘공간 밟기’였다.

그의 발이 닿는 곳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는 마치 계단을 밟고 내려오듯 허공을 내려왔다.

“저, 저!”

관사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공화국군은 입을 쩌억 벌렸다.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너무 놀라 총을 쏘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 이런 사기적인……!”

한 장교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기적.

그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증기선과 기차가 다니고, 사진이 찍히는, 총과 대포의 시대에 저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이라니.

“정신 차려! 정신 차리지 않으면 2년 전, 염왕(炎王) 지펠을 잡을 때 꼴이 난다!”

“……!”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2년 전, 검은 대륙의 앙젤리에서 공화국군은 제국의 1황자 염왕 지펠과 싸웠었다.

결국, 지펠은 전신이 포탄에 갈가리 찢겼지만, 공화국군이 입은 피해도 악몽과도 같았다.

더구나 공제는 염왕에 비해 몇 수는 강한 초상 능력자 아닌가?

“공제는 무(無) 속성 초상 능력자! 강하지만 그만큼 한계가 명확하다! 그러니 정신 차리면 잡을 수 있어!”

한 장교가 외쳤고 모두가 그 독려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 초상 능력자라도 결국 인간이다.

그리고 이곳은 공화국의 본거지. 10만이 넘는 병력이 있으니, 아무리 공제라도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잡아!”

“보는 대로 쏴! 생포하지 않아도 된다!”

늦은 밤, 크림의 수도 심페폴이 환하게 빛났다.

갑작스러운 적, 공제를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그때 린덴은 엘리제를 미리 준비해 둔 말 위에 올리고 있었다.

“말 위에 탈 수 있겠나?”

10만에 달하는 병사가 자신을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지만, 그에게선 별다른 초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네, 전하…….”

그 뚫어지는 시선에, 그 갈망과 걱정에 엘리제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전하, 어째서……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그런 질문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알고 있다.

지금 그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것이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 해도,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그는 왔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바로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런 그의 마음에 그녀의 가슴이 다시 한 번 울렁거렸다.

그런데 그때, 린덴이 그녀가 앉아 있는 말 위에 올라와 그녀의 등 뒤에 앉았다.

“……!”

갑자기 등 뒤에 와 닿는 그의 감촉에 그녀는 흠칫 놀랐다.

“같이 가야 한다.”

말은 한 필이다.

그러니 같이 타고 달려야 한다. 그리고 말이 두 필이어도 각자 따로 타면 날아드는 총탄에 그녀를 보호할 수가 없었다.

“……전하.”

“물론 네가 나를 불편해하는 것은 안다.”

이전 엘리제의 잔인한 말로 둘은 불편한 상태로 지냈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만난지라, 린덴으로선 엘리제의 흔들리는 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잠시만 참아라. 지금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먼저니.”

그러며 그는 몸을 숙여 말의 고삐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를 감싸 안았다.

“……!”

“불편하겠지만 참도록.”

사심 어린 손길이 아니었다.

혹시나 초상 능력을 뚫고 오는 총탄이 있더라도 자신의 온몸으로 그녀를 보호하려는 몸짓이었다.

실제로 작은 체구의 그녀는 그의 탄탄한 몸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두근.

그런 그의 의도를 앎에도 엘리제의 가슴은 다시 한 번 미친 듯이 뛰었다.

자신의 배를 감싸 안은 그의 차가운 손이 너무 뜨거웠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주책 맞은 두근거림이었다.

‘나 어떻게 해.’

엘리제는 빨개진 얼굴로 생각했다.

“역시 불편한가?”

“아, 아니요!”

엘리제는 그가 자신의 등 뒤에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붉어진 얼굴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심장의 떨림은? 혹시라도 새어나가 그가 알아차리면 어떻게 하지?

그때 그가 말했다.

“출발한다. 겁먹지 말도록. 넌 내가 지킬 테니까.”

“……!”

“간다.”

그는 구둣발로 말의 옆구리를 찼다.

히이잉!

그리고 시작되었다.

그녀와 그, 그리고 그와 그녀의 이야기가.

***

“쏴!”

“발사!”

정면에 십여 명의 병사가 나타났다. 미리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들은 진형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무리 공간 방어라도 잘 짜인 진형에서 나오는 화망(火網)을 형성한 집중포화를 맞으면 무사할 수 없다.

자신은 몰라도 그녀가 다칠 수도 있다.

그렇게 판단한 린덴은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눈 가리기!”

병사들 개개인 눈앞의 공간이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졌다. 그러고 곧 울려 퍼지는 비명!

“아악! 눈이!”

“안 보여!”

눈에 들어오는 빛을 일시적으로 일그러뜨리는 능력이다. 이제 저들은 십여 분 정도 시력을 잃을 것이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 정도면 린덴에겐 충분했다.

“잘 잡아.”

“네, 전하!”

린덴은 그대로 눈을 부여잡고 있는 병사들 사이를 단숨에 돌파해 버렸다.

‘이대로 계속 직진. 그러면 성벽에 도착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는 심페폴 내부의 구조를 자세히 파악하고 들어왔다.

자살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녀를 구하러 온 것이니까. 당연히 탈출로를 익혀둔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당연히 평안하지 않았다.

“공제다!”

“잡아라!”

타앙! 타당! 콰앙!

수많은 소총병의 사격은 물론, 수류탄의 공격도 수도 없었다.

그때마다 린덴은 초상 능력으로 방어하며 길을 돌파했지만, 엘리제가 걱정되어 불안 초조했다.

‘내가 다치는 것은 괜찮아.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안겨 있는 작은 몸을 바라봤다.

이 소녀가 작은 상처라도 입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한계가 오기 전에 빨리 탈출해야.’

린덴은 속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초상 능력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바로 그의 몸에 큰 무리를 준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다른 황족들과 속성이 전혀 다른 초상 능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아직 과학적으로 정확히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초상 능력은 로마노프 일가에 유전적으로 내려오는 혈액의 어떤 성분이 자연의 에너지와 반응하여 일어나는 현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화력, 수력, 풍력, 뇌력 같은 에너지와 말이다.

그래서 로마노프 일가의 사람들은 대체로 그러한 속성 에너지를 능력으로 사용한다.

현 황제인 민체스터는 벼락의 힘을, 1황자였던 지펠은 불의 힘을.

3황자 미하일도 오러와 검술과는 전혀 별개인 그 자신만의 속성 에너지를 능력으로 사용했다.

참고로, 린덴의 의식 추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긴 했지만 3황자의 초상 능력은 그의 검술 실력과 결합하면 재앙과도 같은 위력을 보여준다.

그런데 린덴의 초상 능력은 그 무엇도 아니었다. 바로 무(無) 속성이었다.

‘처음엔 아예 초상 능력이 없는지 알았지.

그 생각대로 어린 시절엔 아예 초상 능력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의 비극 이후, 단 하나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거치며 깨달았다. 자신에게 초상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무(無) 속성.

어마어마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단점이 존재했다.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그의 몸에 반작용이 돌아왔다.

이전 엘리제를 만나러 가기 위해 사용하던 변검 능력 정도는 큰 무리가 없었지만, 이런 전투 기술들은 반작용이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왔다. 그녀를 위해.

‘상관없어. 그런 반작용 따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어.’

단지 하나.

그녀만 무사히 구해내면 된다. 그러면 그 뒤에는 얼마든지 괴로워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멈추십시오, 전하.”

“……!”

“본 장군을 등 뒤에 두고 가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표정의 변화가 없던 린덴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아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린덴은 천천히 말을 멈추어 세웠다. 확실히 ‘그’를 등 뒤에 두고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랜만입니다, 전하.”

“그래, 오랜만이군.”

하얀 수염과 지긋한 주름살.

하지만 형형한 눈빛.

공화국의 최정예인 흉갑기병대의 사령관이자, 공화국 최강의 오러 나이츠 위고 중장이었다!

“2년 전 일 이후로 뵙고 싶었습니다, 전하.”

“…….”

“드디어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위고 중장은 이마를 가로지르는 흉터를 만지며 말했다. 2년 전, 앙젤리에서 린덴에게 당한 상처였다.

스릉.

위고 중장은 갈색 군마 위에서 기병 검을 꺼내 들었다.

엘리제가 불안한 시선으로 린덴을 봤다.

“전하…….”

린덴도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넌 내가 지킬 테니.

그는 가만히 위고 중장을 바라봤다.

위고는 늙은 사자답게 멀찍이서 신중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설프게 덤볐다가 무 속성 초상 능력에 걸릴까 대비하는 것이다.

린덴도 신중하긴 마찬가지였다.

7연발 리볼버를 꺼내 든 그는 찰칵 장전했다.

‘의식 추방을 쓸까?’

하지만 의식 추방은 상대가 미리 대비하고 있는 경우, 효과가 떨어졌다.

특히 위고 중장 같은 강자가 정신을 굳건히 하고 있으면 효과가 없었다.

미하일의 경우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태에 걸려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만약 대비했으면 그도 그렇게 무참히 쓰러지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그들은 신대륙 서부 황야의 무법자들이 서로 노려보는 것처럼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타앙!

시작은 린덴의 권총이었다! 리볼버가 불을 뿜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11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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