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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28화 (128/194)

00128  5-4 첫키스  =========================================================================

4장 첫키스 - 3

며칠간의 시간이 지나고, 춥디추운 론도 날씨가 수그러들며 조금씩 봄기운이 올라오려 할 때.

대망의 승전 기념식이 다가왔다.

론도 시민들은 서로 들뜬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드디어 개선식이구나.”

“그래, 구경 가야지. 가게 문도 다 닫았다고.”

“대경기장 가서 전공 포상식도 구경할 거지?”

“가야지.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광경인데.”

전 세계에 영향력을 투사하는 브리티아 제국은 크고 작은 전쟁이 잦았다.

하지만 이번 크림전쟁처럼 수십만 단위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었던 전쟁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비교적 최근의 앙젤리 전쟁도 십만 단위가 충돌했을 뿐이다.

특히 숙적인 프랑소엔 공화국에 이토록 큰 승리를 거둔 것은 거의 처음.

가히 압도적이란 단어가 어울릴 정도의 대승이었다.

그런 만큼 이번 승전 기념식을 맞는 시민들의 표정은 크게 들떠 있었다.

“과연 이번 전쟁에 최고 전훈자(戰勳者)는 누구일까?”

“글쎄, 당연히 총사령관인 황태자 전하와 부총사령관인 맥가일 원수 아니야?”

“그거야 당연한 거고. 그다음 순위 말이야.”

시민들의 관심이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전공 포상에 쏠렸다.

전쟁 중 공훈을 따져 최상위 10명에게 황제가 직접 내리는 황실십자훈장!

누가 과연 그 영광의 주인공이 될까?

“글쎄, 클로랜스가(家)의 대공자?”

“아, 새로 총기사단의 단장이 된 그분? 그분도 유력하지. 하지만 내가 군부에 있는 친척에게 듣기로는 다른 사람이라고 하던데?”

“누구? 3함대의 사령관 루이스 후작? 아니면 여러 성을 함락시킨 라이트 후작?”

대화를 나누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분들도 10인에 들어가긴 하겠지. 하지만 전공 서열 1위는 아니야.”

“그러면 전공 서열 1위는 누군데?”

남자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놀라지 말라고. 그 주인공은…….”

그리고 전공서열 1위의 정체를 들은 시민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게 정말이야? 정말 그분이?”

“그렇대도. 나도 듣고 놀랐어. 하지만 그분이 세운 공을 하나하나 듣고 보니 그럴 만하더라고. 패전이 될 뻔한 전쟁을 몇 번이나 뒤엎은 것이니까.”

“하, 그렇군. 역시.”

시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몇 시간 후면 승전 기념식과 개선식이 시작되니, 그때 같이 가서 보자고.”

“그래.”

한편 같은 거리, 시민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때 마차 안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중년의 귀족이 있었다.

‘제길.’

메기 같은 인상.

귀족파 서열 2위, 상원 위원장인 메르키트 백작이었다.

그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는 이유는 얼마 전 입수한 전공 서열에 대한 내용 때문이었다.

‘검제 전하께서 서열 1위가 아니라니.’

검기사단의 단장인 3황자 검제 미하일이 이번 전쟁에서 세운 공은 무수히 많았다.

그럼에도 총사령관과 부총사령관을 제외하고 따진 실질적 전공 순위가 1위가 아니었다.

‘그 인물’에게 밀린 탓이다.

메르키트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황태자의 지지율만 올라가겠군.’

사실 미하일이 전공 서열 1위를 못한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전공 서열이 학교 시험 등수도 아니니까. 큰 공을 세웠으면 됐지 1위를 하든, 2위를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문제는 실질적 전공 서열 1위를 차지한 인물의 정체 때문이었다.

‘골치 아프군.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고.’

그는 자신의 주군, 미하일의 경고를 떠올렸다.

‘왜긴? 내가 그녀를 사랑하니까 그렇지.’

메르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승전 기념식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실질적 전공 서열 1위에 오를 주인공.

그건 다름 아닌, 등불을 든 여인, 엘리제 드 클로랜스였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이 온 론도를 진동시키게 생겼다.

그게 귀족파 메르키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녀의 명성이 올라가는 것은 황태자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

승전 기념식은 론도 근교의 대경기장에서 진행됐다.

2,000여 년 전, 서대륙을 통일한 라틴족이 세운 대경기장은 인원을 수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규모여서 국가의 대규모 행사는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짜앙!

군악대의 징소리와 함께 엄정한 제식을 펼치며 제국 근위대가 입장하기 시작했다.

타앙! 타앙!

허공에 터지는 축포 소리와 군악대의 화려한 음악 소리에 시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

“브리티아 제국 만세!”

그리고 이 승전 기념식의 하이라이트, 전공 포상식에 참석할 인원들은 경기장 내부에서 대기 중이었다.

“엘리제, 몸은 괜찮으냐?”

“네, 아버지. 괜찮아요.”

엘리제는 한결 좋아진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오랜만에 제국군 제복을 입고 있었다.

재상 엘 후작은 감회가 벅찬 얼굴로 딸을 바라봤다.

2년 전만 해도 맨날 말썽만 피우던 딸이 전쟁에 나가 이렇게나 큰 공을 세워 전공 포상식의 주인공이 되다니.

‘물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절대 위험한 전쟁에 참전시키지 않겠지만.’

딸은 전쟁에 참전해 포로로 잡혀간 후 총상을 입었다. 의식을 잃은 딸을 봤을 때 얼마나 참담했는지.

그래도 이 순간은 기뻤다. 딸이 공을 인정받아 큰상을 받는 것이니까.

‘아니, 황실십자훈장은 단순히 상이란 단어로 넘길 영광이 아니지.’

황실십자훈장!

브리티아 무공 훈장이라 불리는 그 훈장은 군인 가문이라면 3대에 걸쳐 자랑할 만한 큰 영광이었다.

더구나 오늘 황실십자훈장을 받는 것은 엘리제뿐이 아니었다.

큰아들 렌도 전공 서열 10위 안의 전훈자로 선정돼 황실십자훈장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딸과 아들이 모두 커다란 훈장을 받는,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인 상황.

아버지로서 엘은 괜히 가슴이 시큰해져 하늘을 바라봤다.

‘보고 있소, 테레사? 우리 자식들이 이렇게 자랑스럽게 자랐다오.’

엘은 감상적으로 변하는 마음을 추스른 후 딸에게 말했다.

“그래, 이제 곧 전공 포상식이니 잘하고. 나는 그만 폐하 곁으로 올라가 봐야겠구나.”

엘리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재상인 아버지가 단상을 향해 사라지자, 엘리제도 감회가 서린 얼굴로 대경기장을 바라봤다.

‘여기도 오랜만이구나. 이전 삶, 마지막 순간에 이곳에 왔었는데.’

좋은 일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단두대에 처형당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으니까.

이전 처형당했던 곳에서 큰 상을 받게 되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죽어라, 악녀!’

당시의 기억이 났지만, 그녀는 얼굴을 굳히진 않았다.

과거의 일이다.

똑같이 황후가 되어도 이번 삶은 전혀 다를 테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엘리제, 뭐 하고 있지?”

“아, 전하.”

조각 같은 얼굴이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 낮은 미소를 본 순간, 엘리제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전 삶, 자신에게 단두대의 칼날을 내렸던 이. 하지만 이제는 따뜻하게 웃어주는 이.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이.

린덴이었다.

“몸은 괜찮은가?”

“네, 괜찮아요.”

“다 나은 건가?”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는 말끔히 나은 상태다. 괜찮다.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그런데.”

그리고 황태자가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면 그때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건가?”

“네, 무슨 약속?”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그의 강렬한 눈빛을 보고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의 얼굴이 갑작스레 화악 붉어졌다.

엘리제가 그에게 했던 약속.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건 약속도 아니었다.

“잊지 않고 있겠지?”

린덴은 웃었다.

그 웃음은 이런 말을 담고 있는 듯했다.

‘네가 이야기했던 승전 기념식 날이 되었으니, 네게 입 맞춰도 되는 거겠지?’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

승전 기념식의 하이라이트는 두 가지였다.

전공을 세운 전훈자들의 포상식과 곧바로 이어지는 전쟁 영웅들의 마차 거리 행진.

그리고 이 순간, 그 첫 번째 하이라이트인 포상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렌 드 클로랜스. 로열 나이츠인 총기사단의 신임 단장으로 코프스크 대회전, 잔코이 탈환전, 사캬 회전, 심페폴 공방전, 빌로히르스크 회전 등에서 세운 공을 인정하여 황실십자훈장과 특별 포상으로 일 계급 특진을 명하노라.”

먼저 클로랜스 가문의 대공자인 렌이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훈장을 받았다.

“와아!”

황실십자훈장.

제국 최고의 영예를 나타내는 그 무공 훈장 수여에 군웅들이 큰 함성을 지르며 축하해 주었다.

렌은 훈장과 더불어 특별 포상을 받고 단상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그는 대령 계급에서 한 계단 올라간 준장이 되었다. 청년 장성이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루이스 후작.

그는 제국 3함대의 사령관으로 황태자의 명을 따라 반도 이남을 점령한 공으로 훈장과 특별 포상을 받았다.

“와아!”

“브리티아 만세!”

다음은 보크네 요새를 비롯한 여러 성을 점령한 라이트 후작.

그렇게 전공 순위에 따라, 이름이 호명되었고, 한 명 한 명 단상으로 나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영광된 훈장과 각자에게 수여된 특별 포상을 받았다.

“다음은 전공 서열 4위.”

이윽고 4위의 순서가 왔다.

관례적으로 1위와 2위는 총사령관과 부총사령관의 몫이니 4위면 그들을 제외하고 실질적인 전공 서열 2위였다.

“미하일 드 로마노프 중장.”

황제가 그 이름을 불렀다.

곧 대기석에서 화사한 외모를 지닌 3황자가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와아! 검제!”

“검제 만세!”

“3황자 만세!”

아까 다른 훈장 수훈자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함성이 터졌다. 평소의 그를 향한 시민들의 인기를 알 수 있는 함성이었다.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3황자를 본 황제의 눈에 남모를 애잔함이 스쳐 지나갔다.

“미하일 드 로마노프. 검기사단의 단장이자 로마노프 황실의 황자로 참전. 젤레스크 전투, 오르키제 회전, 코프스크 대회전, 카호카 공방전, 헤르손 전투, 바쉬탄카 전투, 노바사 공성전…….”

황제의 입에서 수많은 공이 나열되었다.

미하일은 일선 기동 전투부대의 지휘관으로 수없는 전투에 참가했고, 그때마다 공을 세웠다.

가히 검제의 위명에 걸맞은 전공들.

“……등의 공으로 황실십자훈장을 내리노라.”

“감사합니다.”

미하일은 고개를 숙여 훈장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상급이나, 계급 특진 등 추가적인 포상을 받았지만, 황족인 만큼 특별 포상은 없었다.

그리고 미하일이 물러나려는 순간, 민체스터가 나직이 말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조용한 목소리.

“미하일.”

“네, 아바마마.”

“잘 지내고 있느냐?”

“……!”

황제가 아닌,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건네는 안부.

아버지의 물음에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건강히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가끔은 내 궁에도 찾아오너라. 차나 한잔 마시자꾸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짧은 대화를 나눈 후, 미하일은 등을 돌려 단상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

대망의 3위.

1, 2위가 총사령관과 부총사령관의 몫이니 3위가 그들을 제외하고 실질적인 전공 서열 1위의 주인공이었다.

과연 누가?

모두가 침을 삼키며 발표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윽고.

황제 민체스터가 그 주인공의 이름을 불렀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 대령.”

그 호명과 함께.

붉은 제복을 입은 하얀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대경기장의 모두가 놀라 그 소녀를 바라봤다. 저 소녀가 전공 서열 3위의 주인공이라고?

하지만 놀람도 잠시.

곧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 데임 클로랜스!”

“등불을 든 여인 만세!”

“황태자비 만세!”

“와아! 퍼스트레이디! 마이 레이디!”

그야말로 대경기장이 떠나갈 것 같은 함성. 아까 전 미하일이 받던 환호를 훌쩍 압도하는 크기였다.

시민들 모두 저 소녀가 전쟁에서 어떤 일들을 해냈는지 알고 있었다.

특히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은 소녀가 저 여린 몸으로 자신들에게 어떤 헌신을 했는지, 어떤 고락을 함께 나누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엘리제는 단순한 예비 황태자비가 아니라, 자신들의 앞을 밝혀준 등불을 든 여인이었고, 마음속 마이 레이디였다.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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