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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36화 (136/194)

00136  5-6  달콤한 납치 (1)  =========================================================================

6장 달콤한 납치(1) - 3

오래 지나지 않아 마차는 론도 북쪽에 위치한 어느 작은 소도시에 멈추어 섰다.

시간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늦은 오후쯤.

“조심히 내려라.”

먼저 마차에서 내린 그는 손을 뻗어 혹시나 그녀가 발을 헛디디지 않게 에스코트했다.

“꽤 오래 왔는데, 몸이 불편하지는 않나?”

엘리제는 그 말에 얼굴을 붉혔다.

몸은 괜찮았다. 그와 방금 한 입맞춤 때문에 부정맥이 온 것처럼 가슴이 뛰어서 문제지.

“전하…….”

“왜 그러지?”

엘리제는 조심히 그에게 말했다.

“저…… 할일이 많은데.”

그녀는 황태자에게 항의하며 론도로 돌려보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의 대답은 하나였다.

입 다물라는 듯 거친 입맞춤.

어찌나 많이 키스를 당했는지, 입술이 살짝 부어 있었다.

이번에도 또 키스당할까 봐 그녀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이번에 그는 키스 대신 답을 해주었다.

물론 납치범답게 돌려보내준다는 뜻의 답은 아니었다.

“괜찮다. 내가 다 처리해 놨으니.”

“네?”

“아까 보지 않았는가. 그대의 업무는 다른 사람들이 다 나눠서 할 예정이다.”

“……!”

그제야 병원에서 황태자와 만났던 이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모였던 게?

“그대만큼은 아니지만 다들 유능한 이들이다. 엘리제 네가 돌아올 때까지 남은 일들을 다 끝내놓으라고 황실의 이름으로 명해놨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하, 하지만 그래도 제가 해야 할 일인데.”

그래도 미련을 못 버리는 일중독 소녀를 보며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제.”

“네?”

흠칫! 위기감을 느낀 그녀가 뒷걸음질 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고, 품 안으로 그녀가 들어오자.

하얗게 튀어나온 귓볼을 지그시 깨물었다.

“……!”

엘리제의 몸이 탁 멎었다. 마치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 것처럼.

‘이, 이게 무슨……?’

“저…… 전하?”

떨리는 목소리.

린덴은, 아니, 맹수는 낮게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일 생각은 그만하도록.”

“…….”

“이제 여기에는 우리 둘밖에 없어.”

그는 그녀의 얼굴을 자신을 향하도록 했다.

그리고 코앞까지 입술을 가져가 말했다.

“그러니 다른 것은 잊고, 나만 바라봐.”

***

“…….”

엘리제는 말없이 린덴의 뒤를 따랐다.

방금 그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 여기에는 우리 둘밖에 없어. 그러니 나만 바라봐.’

그의 말처럼 이 한적한 시골 도시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정말로 세상 속에 그와 그녀 둘만 있는 듯한 느낌.

그런데 이상했다.

납치범과 단둘이 있는데, 싫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저 가슴만 두근두근 떨렸다.

‘하아, 모르겠다.’

뭔가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었으나, 납치당한 판에 무슨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그를 따라갈 수밖에.

“……전하.”

“왜 그러지?”

“혹시 지금 어디를 가는 중인지요?”

“아.”

그는 지금 지도를 보고 있었다.

“잠시 들를 곳이 있다.”

“무슨 일로?”

“가보면 안다.”

그런데 지도가 엉성한 건지, 아니면 처음 와보는 곳이라 헷갈리는 것인지 그는 좀처럼 목적지를 찾지 못했다.

계속 같은 곳만 헤매기를 몇 번째.

“……미안하군. 처음 와보는 곳이라.”

왠지 머쓱한 표정으로 사과하는 그를 보자, 엘리제는 쿡쿡 웃음을 지었다.

“크림반도에서는 길 잘 찾지 않으셨나요?”

“……여기서도 금방 찾을 수 있다. 잠시만 기다려라.”

탈출 당시 그는 길치 검제 미하일과 다르게 탁월한 방향 감각으로 그녀를 이끌었었다.

‘전하가 내 목숨을 구해줬었지.’

당시 생각이 떠오르며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막의 전갈에게 치욕을 당하기 싫어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을 위해 싸우다 상처를 입었던 것도 떠올랐다. 그때 참 가슴이 아팠었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나며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렇게 자신을 납치한 것은 당황스럽고 밉지만.

그래도.

“전하.”

“응?”

“좋아해요.”

“……!”

그녀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옆에 놓인 그의 손을 조심히 만졌다.

“손…… 잡고 걸어도 돼요?”

“…….”

린덴은 답이 없었다.

그녀가 빼꼼이 다시 물었다.

“싫…… 으세요?”

그리고 그 순간.

탁!

그의 차가운 손이 뜨겁게 그녀를 붙잡았다.

“……!”

“그럴 리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영원히 안 놓아줄 테니, 너도 놓을 생각하지 말도록.”

그러며 타오르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

그녀의 마음이 다시 파르르 떨렸다.

아…… 전하…….

계속 그의 눈길을 보고 있다가는 가슴이 고장 날 것 같아,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영원히는…… 안 돼요.”

“뭐?”

“수술도 해야 해서.”

린덴은 눈썹을 꿈틀했다. 누가 일중독 아니랄까 봐!

그때, 엘리제가 물었다. 약간은 수줍은 목소리로.

“전하,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뭔데?”

“이대로 잠시 걸으면 안 돼요?”

“이대로?”

“네, 그러니까…… 이렇게 손잡고. 옛날부터 이런 예쁜 길을 전하와 손잡고 걸어보고 싶었거든요.”

그 부탁에 린덴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이 일중독 마음에 안 드는 소녀는 사랑스럽긴 또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걸까?

“얼마든지.”

그렇게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길을 걸었다.

인적 드문 시골 소도시의 길은 론도의 거리와 다르게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마치 동화 속 거리에 들어온 듯한 느낌?

“거리가 참 예뻐요. 원래 소도시들은 다 이렇게 예쁜가요?”

“그렇지는 않을 거다. 원래 이곳 노버러의 거리는 근방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니까.”

“전하는 이곳에 이전에 와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

“그런데 어떻게?”

“이번에 나오면서 란돌에게 물어봤다.”

“아.”

그녀는 그가 일부러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과 예쁜 거리를 함께 걷고 싶었던 것이다.

왠지 뭉클한 기분이 들어 그녀는 그에게 조금 몸을 기댔다.

“좋아요.”

“뭐가?”

“그냥 전부 다요. 거리도 예쁘고…….”

그리고…….

‘전하도 좋아요. 사랑해요.’

왠지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그 말은 입에 삼켰다.

“그나저나 시간이 늦겠군. 해가 지면 안 되는데.”

“어딜 가는 중인데요?”

엘리제는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

린덴은 마치 공연 시간에 늦은 것처럼 초조한 기색을 보이더니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아, 찾았군. 다 왔다.”

“……?”

무엇인가 보니 성당이었다.

갑자기 미사를 드리려고?

하지만 린덴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따라와라.”

“전하?”

그는 그녀를 이끌고 성당, 아니, 그 옆에 위치한 종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선형 계단을 가진 종탑은 높고 높았다.

린덴은 엘리제가 미끄러지거나 발을 잘못 디디지 않도록 조심히 에스코트하며 탑을 올랐다.

“힘들진 않으냐?”

“아, 괜찮아요. 그런데 왜 탑에는?”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뭐하려는 거지?

“거의 다 올라왔다.”

그리고 탑에 꼭대기에 올라간 순간.

그녀는 그가 왜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아……!”

높은 탑 밑에 펼쳐진 소도시의 전경.

아기자기한 건물들, 도시에 흐르는 부드러운 강, 그리고 뒤에 펼쳐진 푸른 들판과 낮게 깔리기 시작한 황혼.

아름다웠다.

번잡한 론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전망이었다.

그는 이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이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던 것이다.

“……괜찮은가? 볼만한가?”

린덴이 어딘지 염려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일부러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그녀가 만족할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엘리제는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보다 그런 그의 모습에 더 마음이 울컥했다.

‘전하…….’

가슴이 울렁거려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린덴은 그녀가 답을 하지 않자 머쓱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여러 곳에 갈 테니까. 더 좋은 곳도 보게 될 테다. 여기는 란돌 그놈이 추천해 준 곳이라 원래 믿을 만하지 못했어.”

“예뻐요.”

“응?”

엘리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혼을 등진 그녀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너무 예뻐요. 감사해요. 이런 아름다운 곳에 저를 데려와 줘서 너무…… 너무 감사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말로 꺼내진 않았으나, 마음으로 전달된 것일까?

그는 그녀의 하얀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도.”

그리고 부드럽게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나도 사랑한다. 나의 엘리제.”

***

소도시에는 머물 만한 곳이 없어 마차를 타고 잠시 더 이동했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때쯤 인근의 도시, 케인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시 내 가장 좋은 특급 호텔 앞에 멈춰 선 마부가 황태자에게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전하.”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

그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엘리제를 불렀다.

하지만 원체 수면 부족이었던 탓일까?

그녀는 좀처럼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우웅.”

귀여운 소리를 내며 그에게 안겨들었다.

“하여튼 무리하지 마라니까. 도무지 말을 안 들으니.”

린덴은 투덜거리며 그녀를 감싸 안았다.

말을 안 들으니, 벌을 내려야겠다.

오늘 내릴 벌은 강제로 잠자기였다. 특급 호텔 포근한 방에서 강제로 늦잠 자기.

배고파도 소용없었다.

아침은 룸서비스로 방으로 배달시킬 거니까. 침대에서 먹게 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내일 정오까지는 기상 금지였다.

‘란돌, 일 처리는 제대로 해놓았겠지?’

그녀의 아침 식사를 위해 근방에서 브런치로 유명한 쉐프를 미리 수배해놓기로 했다.

특별히 내일 아침만 그녀를 위한 특식을 만들기 위해.

‘일단 그러려면 방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자는 것을 깨우기 싫었지만, 아니, 이렇게 자신에게 안긴 자세라면 영원히 자게 놔두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깨워야 할 것 같았다.

“엘리제.”

“…….”

“엘리제?”

하지만 묵묵부답.

그는 어쩔 수 없이 물리적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네가 안 일어나서 그런 거야.”

그는 지긋이 그녀의 귓살을 깨물고 혀로 핥았다.

“……!”

역시 효과는 즉효.

“저, 전하?!”

화들짝 놀라 잠이 깬 그녀를 보며 린덴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 늦게 깨도 좋았을 텐데.

왜 이렇게 예민한 거야?

그녀는 정신이 덜 드는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케인즈다.”

“아…….”

론도 북부의 도시 중 나름 큰 규모의 도시였다.

그런데 꽤 거리가 떨어진 곳인데,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나를 안 돌려 보내줄 생각이신 건가?

“저…… 그런데 저는 언제 집에…….”

“안 돌려 보내줄 건데? 말하지 않았나. 그대는 지금 납치당한 거라고.”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납치범이 저리 당당하지?

“가족들이 신경 쓰이는 거라면 걱정하지 말도록. 미리 연락을 다 해놨으니.”

“정말요?”

“그래.”

엘리제는 왠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하긴 했다.

허락을 안 받아서 그렇지.

‘음…….’

제국 최고의 명문이자 자신의 가장 큰 우군인 클로랜스 가문을 생각한 린덴은 침음을 삼켰다.

왠지 이번 납치가 끝나고 나면 크리스의 눈빛이 한결 더 싸늘해져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점점 크리스의 눈빛과 닮아가는 엘 후작의 눈빛도 그렇고.

그 둘은 자신을 ‘도둑놈’이란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렌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고.

‘아닌가?’

왠지 지난번 만났을 때 렌마저 도둑놈, 아니, 그래도 주군이니 ‘도둑님’, 이란 눈빛을 힐끗 보였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냥 자신의 착각이겠거니 황태자는 단정했다.

“일어나자. 들어가야지.”

“어디를요?”

멍하니 물어보다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특급 호텔이 보였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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