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7 5-6 달콤한 납치 (1) =========================================================================
6장 달콤한 납치(1) - 4
‘자, 잠깐.’
그러고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
집에 들어가지 못하니 외박을 해야 한다.
‘그와 같이 외박해야 한다고?’
엘리제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이, 이건 아니잖아?
“전하.”
“왜?”
“방은…… 따로 잡으신 거죠?”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모르겠다는 듯.
“글쎄? 란돌이 예약해 놓는다고만 들어서. 확인해 봐야겠군.”
그리고 왕년에 로열 나이츠였던 란돌.
평소에는 칠칠치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완벽한 일 처리를 보였다.
“최상층의 로열 스위트룸입니다.”
단정한 정복을 입은 여직원이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최상층에 도착한 엘리제의 얼굴이 하얘졌다.
케인즈 시의 특급 호텔 쉬트의 최상층에는 방이 단 하나였다.
그와 같은 방을 쓰게 된 것이다.
‘이, 이건 정말 아니잖아.’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등줄기에 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일까?
***
“다른 방을 쓰겠어요.”
결국, 엘리제는 선언했다. 아무리 그를 사랑한다지만 결혼도 안 했는데 이건 아니었다.
그녀는 곧바로 접수대로 향해 빈방을 문의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레이디. 방이 남아 있지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이렇게 호텔이 큰 데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요? 비싼 방이라도 상관없어요. 얼마든 상관없으니…….”
지금 돈이 문제겠는가?
그리고 그녀는 돈이 많았다. 계속 벌기만 하고 병원에 처박혀 쓰질 않았으니까.
더구나 최근 영지도 받지 않았는가.
그녀는 무려 영지가 있는 영주였다. 제국에 몇 없는.
“죄송합니다. 전부 풀(Full)입니다. 아마 다른 호텔에 가도 비슷한 사정일 것입니다.”
“어째서죠?”
“내일 케인즈 시 전통 축제가 있거든요. 그래서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몰려왔어요.”
“아…….”
엘리제는 그 말에 입을 벌렸다.
축제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그런데 그 순간 떠오르는 한 가지 사실.
‘혹시 전하께서 일부러 나 때문에 축제인 도시에?’
예전에 그에게 말했던 적이 있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길거리 축제 같은 것에 참석해 보고 싶다고.
당시 그는 이렇게 답했었다.
‘그래? 그러면 조만간 데려가 주지. 론도 인근에서는 매년 열리는 케인즈의 전통 축제가 제일 유명하다고 하던데.’
그냥 지나가듯 한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설마 정말로 그때 이야기했던 것 때문에?
그런데 그때였다.
뒤에서 가만히 접수대의 이야기를 듣던 린덴이 말했다.
“미안하군. 란돌이 방 하나를 예약할지는 몰랐어.”
“아, 아니요. 전하.”
그가 사과하자 그녀는 당황했다.
일부러 이렇게 계획한 게 아니었나?
뭔가 죄 없는 그를 의심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하지.”
“어떻게?”
“상황이 이러니 같은 방을 쓰도록 하지. 하지만 걱정하지 말도록. 그대를 건들거나 하지는 절대 않을 테니.”
그러며 그는 물었다.
“혹시 나를 못 믿는가?”
“……아니요.”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왠지 믿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자신을 납치한 납치범의 말을 믿은 것도 우습긴 하지만…….
‘그, 그래도 전하는 욕망에 휘둘리는 분은 아니시니까.’
부부로 그와 지냈지만 그가 색을 밝히는 것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남자.
그러니 욕망에 휘둘리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그녀는 ‘애써’ 생각했다.
물론 엘리제가 고려 못한 것이 있었다.
지금의 그는, 이전 삶의 그가 아니란 것을.
***
탁.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아늑하면서도 고급진 방 안의 모습이 나타났다.
물론 클로랜스가의 저택에서 살고 있고, 중후한 황궁에도 쉴 새 없이 들락거린 엘리제지만, 부티크하게 꾸민 호텔 방의 화려한 풍경은 나름 색다른 매력을 주었다.
“…….”
방 안에 들어온 엘리제는 방구석에서 엉거주춤하게 있었다.
믿는다 했고, 실제로 믿지만 단둘이 그와 한방을 쓰려니 역시 어색하고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피곤하지 않은가?”
“아, 아! 네, 네!”
뻣뻣하게 답하는 그녀를 보며 린덴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
그가 가까워지자, 엘리제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얼굴에 와 닿는 그의 손길.
“아…….”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그와 단둘이 한방에 있다는 긴장감 때문일까?
가슴이 미칠 듯이 뛰었다. 손이 닿는 부위마다 타는 듯이 화끈거렸다.
자신을 믿으라고 했던 맹수는 벌벌 떠는 초식 동물에게 말했다.
“먼저 씻지 그러는가? 물을 뜨겁게 덥혀 놓았을 텐데.”
“아! 네, 네!”
엘리제는 도망치듯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뜨거운 수증기에 몸을 맡기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나 어떻게 하지.’
그냥 손이 살짝 닿은 건데 아직도 화끈화끈했다.
얼굴이 빨갰다. 아니, 빨간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온몸 전체가 새빨갰다.
‘몰라…….’
그녀는 씻을 생각도 못하고 계속해서 떨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한편, 욕실 밖에서 린덴은.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미치겠군.”
란돌.
방을 하나만 예약하다니.
물론 그가 잘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잘했다. 방을 두 개 예약했으면 오히려 화가 났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내가 자제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 믿으라고 말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거지, 단순히 몸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를 가지는 것은, 그녀와 하나가 되는 것은, 그저 입맞춤하고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됐다.
사랑하는 연인이 입맞춤 등으로 서로를 가까이하는 것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엘리제가 원하지 않으면 그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참고, 그녀를 지켜줄 생각이었다.
이렇게 납치를 했지만 그건 거짓 없는 진심.
하지만…….
‘정말 내가 참을 수 있을까.’
한방에 들어온 순간, 그 결심이 곧바로 흔들렸다.
단둘이 좁은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가슴을 뛰게 했다.
정말…… 정말로 내가 참을 수 있을까?
아까 전 손을 뻗었을 때, 손끝에 닿은 느낌만으로도 자제력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특히나 지금.
욕실 안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사이로 그녀가 몸을 씻고 있을 거로 생각하니 가슴이 요동을 쳤다.
‘젠장.’
그는 필사적인 자제력을 발휘하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안쪽 욕실에서 씻고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자꾸 이상한 상상이 들며, 참기가 어려웠다. 괴로울 정도였다.
‘하아. 양이 라도 세어야 하나.’
그렇게 그가 입술을 깨물던 중이었다.
끼익.
욕실의 문이 열리며 엘리제가 나타났다.
“……!”
“전…… 하?”
린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름다웠다.
빨개진 얼굴, 촉촉하게 젖은 백금발, 덜 닦은 탓인지 물기가 맺혀 있는 하얀 피부, 그리고 평소보다 더욱 붉은 기가 도는 입술.
평소에도 예뻤지만, 지금은…… 지극히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자극적이었다.
속살이 언뜻 언뜻 보이는 하얀 목욕 가운을 입고 나왔는데 눈을 둘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왜 그러세요?”
그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자, 엘리제는 의아한 얼굴로 눈동자를 깜빡였다.
귀여우면서도 가슴을 자극하는 모습.
결국, 린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스쳐 지나가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더 보고 있으면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전하?”
“씻고 나오겠다.”
그리고 탁 문을 닫은 그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정하자. 바보같이 지금 뭐하는 거야?
전 세계를 호령하는 브리티아 제국의 황태자이자 탁월한 국정 능력을 인정받은 이, 또한 적국의 공포 대상인 공제이기도 한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시도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빌어먹을. 하나도 소용없었다.
믿으라고 했던 말을 과연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
몇백 마리나 되는지 모를 양을 센 후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황태자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욕실을 나섰다.
하지만…….
“……씻으셨어요?”
“……!”
침실 가운을 입고 침대 한구석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본 순간, 가슴이 덜컥 다시 요동쳤다.
엘리제는 어색한 얼굴로 자신이 입고 있는 침실 가운을 보았다.
“조금 이상하죠?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
린덴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희미하게 상기된 인형 같은 얼굴.
아직 물기가 덜 말라 흐트러진 백금발.
그리고 가운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하얀 속살.
아름다우면서 미치도록 자극적이었다.
‘젠장.’
엘리제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찾아봐도 이것 외엔 입을 것이 없어서. 직원에게 부탁해 갈아입을 드레스를 구해달라고 해야겠어요.”
린덴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아니, 하지 마.”
“……네?”
“…….”
아뿔싸.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엘리제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하, 하지 마요?”
“…….”
둘 사이가 한층 더 어색해졌다.
둘은 뻘쭘하게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엘리제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어색해.’
사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둘이 있었던 적이 처음은 아니다. 크림반도에서 탈출할 때도 함께 밤을 지새웠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이유 없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를 믿지만…….’
그래, 그를 믿는다.
그는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아니, 욕망에 큰 관심이 없는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남자이니까.
물론 최근 자신에게 하는 것을 보면 정말 그런지는 조금 의문이 들긴 하지만. 그 의문은 애써 외면했다.
‘그래, 아무런 일 없을 거야.’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저…… 힘드실 텐데 그렇게 서 있지 마시고 앉으세요. 아니면 피곤하니 누울까요?”
누울까요?
그 말이 린덴의 가슴에 꽂혔다.
분명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건만 그의 마음은 해일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젠장. 같은 침대에 있으면 내가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양 칠백사십이 마리. 칠백사십…… 아니, 몇 마리째였지?’
양을 다시 세어보려 했으나, 그녀에게 정신이 팔려 숫자가 잘 떠오르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디자인한 가운인지 이런저런 틈으로 그녀의 하얀 속살이 계속 힐끗힐끗 보였다.
훤히 드러난 어깨, 얇은 쇄골. 은은히 보이는 가슴골.
린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문이었다.
‘다른 방으로 가서 자야겠군.’
결국 참을 수 없던 린덴은 다른 방의 침대에서 자기로 결정했다.
이대로는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녀를 지켜주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꼭 지켜줘야 하나?’
그런데 순간 이런 의문이 치밀어 올랐다.
‘우린 결혼할 사이인데.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데. 그녀만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전하? 왜 그러세요?”
그녀가 커다란 푸른 눈을 깜빡거리며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자, 린덴은 죄책감을 느껴졌다.
저렇게 순수한 그녀를 상대로 이런 못된 생각이나 하다니.
‘미치겠군.’
이렇게 미치도록 그녀를 바라지만 아직 그녀가 원하지 않으므로, 지켜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가지는 것은, 그래서 하나가 되는 것은 입맞춤과 단순한 어루만짐과는 다른 것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드는 갈망.
이런저런 것 상관없이 그저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하나가 되고 싶고, 저 순수함을 범하고 싶었다. 저 하얀 속살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너무나 모순되는 생각의 충돌에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괴로웠다. 빨리 이 방을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나가서 자마.”
그러며 린덴은 스위트 룸 침실에서 나와 거실로 나갔다.
호텔의 최고급 방이었기에 당연히 딸린 작은 방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잘 생각이었다.
그러나…….
‘젠장, 왜 침대가 없는 거야?’
그 작은 방에는 침대가 없었다.
아니, 있었던 것 같은데 얼마 전 치운 것인지 카펫에 침대 자국만 눌려 있었다.
‘왜 침대를 치운 거지?’
그때,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전하! 아, 글쎄 말입니다. 제가 젊을 적 연모하던 영애와 몰래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침대가 두 개나 있었지 말입니다. 그래서 각자 침대를 쓰고 자느라 얼마나 속상했던지! 방에 침대를 여러 개 두는 호텔은 모두 혼나야 합니다!”
“…….”
예전 란돌이 했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참, 별걸 가지고 열 낸다고 한심해했었는데…… 설마, 이놈이?
‘레이디 클로랜스를 납치하신다고요?!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호텔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완벽하게 세팅해 놓겠습니다!’
그러며 엄지손가락을 척 올리던 것도 떠올랐다.
저만 믿으십시오! 하며 웃던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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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