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9 5-7 달콤한 납치 (2) =========================================================================
7장 달콤한 납치(2) - 1
사람들 사이에 어울려 춤도 추었다.
귀족 연회의 격식 있는 춤은 아니었다.
그저 시민들끼리 특별한 규칙도 없이 흥겨움에 몸을 맡기는 춤.
린덴은 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녀가 추고 싶어 하는 것 같아 함께 춤을 추었다.
엘리제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춤 싫어하지 않으세요?”
“싫어한다.”
“아,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야.”
그는 엘리제의 허리를 잡고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어 체향을 맡으며 말했다.
“싫어하지만, 너와 함께하는 것은 다 좋아.”
“……!”
목덜미에 느껴지는 그의 느낌에 엘리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 그게 뭐예요.”
“정말이다.”
사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춤뿐이 아니었다.
단 디저트도, 그녀가 좋아하는 고기 요리도, 러브스토리 연극도, 모두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 따위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녀와 함께하면 무엇이든지 다 기쁜데.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둘의 눈에 희한한 물건이 보였다.
“웬 피아노가?”
성당에서나 볼법한 커다란 피아노가 길거리에 놓여 있었다.
한 시민이 웃으며 설명했다.
“축제용으로 시에서 준비한 거예요. 치실 줄 아는 분 있으면 자유롭게 치시면 돼요.”
피아노 체험 같은 것 같았다.
“전하, 저 쳐봐도 돼요?”
“그래.”
엘리제는 간만에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렸다.
물론 실력은 형편없었다.
어릴 적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로서 교양으로 배우긴 했지만, 그게 도대체 몇 년 전인가? 지구에서의 삶을 포함하면 수십 년 전이다.
엘리제는 민망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내려왔다.
“잘 안 되네요.”
린덴은 피식 웃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본인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전하? 연주하시게요?”
“그래.”
엘리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피아노 연주를 한다고?
시민들도 조각같이 생긴 남자가 피아노 앞에 앉자 흥미로운 표정으로 구경했다.
린덴은 잠시 엘리제의 눈을 바라봤다. 잘 들으라는 듯.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콰앙!
강렬한 시작.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율.
‘아…….’
엘리제는 속으로 탄성을 삼켰다.
믿을 수 없게도 아름다웠다. 강렬하면서도 달콤한, 부드러운 연주였다.
그때, 린덴이 건반을 누르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간절한 열망이 담긴 시선.
그 시선을 받는 순간, 엘리제는 이 곡의 이름을 떠올렸다.
프러시엔의 천재 음악가가 작곡한 피아노곡이었다.
오로지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을 위한 열정적인 곡.
그 곡을 그가 연주하고 있었다.
바로 그녀를 위해서.
뭉클.
엘리제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왜일까? 이유 없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연주하는 내내 린덴의 눈은 계속해서 그녀를 향했다. 그의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내가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결국, 엘리제는 급히 고개를 돌려 눈을 비볐다. 한 방울 눈물이 손가락에 흘렀다.
“와아! 최고다!”
연주를 마친 그에게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는 엘리제에게 다가왔다.
“왜 울지?”
“그냥…… 좋아서요.”
그녀는 그에게 안겨 들었다.
린덴은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그녀를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그 따뜻한 품 안에서 엘리제는 눈물을 흘렸다.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로. 눈을 뜨면 깨질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행복하지만 불안했다.
이 행복이 사라질까 봐.
난 이 행복이 사라져도 살아갈 수 있을까?
아예 몰랐을 때는 괜찮았다. 하지만 이런 행복을 경험한 뒤, 잃으면 버틸 수 있을까?
안다. 이런 불안이 쓸데없는 걱정이란 것을.
너무 행복해서인 것 같다. 이런 쓸데없는 걱정이 드는 것은.
엘리제는 조금 더 그를 느끼고 싶어 더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린덴은 그런 그녀를 말없이, 더욱 강하게 안아주었다.
***
그렇게 축제를 즐긴 그들은 대망의 하이라이트, 토마토 축제에도 참가했다.
물론 싸움에 직접 낀 것은 아니었다. 그냥 구경하러 관람자로 참석했다.
“기대돼요. 어떨지.”
“황태자로서 이런 토마토 낭비 축제는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은 된다만. 도대체 세금이 얼마나 낭비되는 건지.”
그렇게 말했지만 그도 즐거운 얼굴이었다.
곧 토마토를 한가득 실은 커다란 바구니들이 거리 양측에 준비되었고, 푸른 옷, 붉은 옷으로 편을 나눈 시민들이 양손에 토마토를 들고 서로를 주시했다.
“시작!”
“와아!”
퍽! 퍽!
마치 눈싸움을 하듯 물컹물컹한 토마토가 서로를 향해 날아갔다.
“악! 꺄악!”
“하하! 와아!”
시민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토마토 범벅이 되었다. 엉망으로 변한 얼굴로 시민들은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엘리제도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유쾌한 광경은 난생처음이었다.
린덴은 계속 ‘세금 낭비’라고 중얼거리면서도 그녀를 향해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그녀가 웃으니, 그도 그냥 좋았다.
그런데 그 즐거운 관람이 돌변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꺄악?!”
퍼억!
누군가 엘리제를 향해 토마토를 던진 것이다!
얼굴에 정통으로 토마토를 맞은 그녀의 얼굴이 엉망으로 변했다.
“엘리제!”
린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가 감히?!
고개를 돌리니 웬 턱수염 아저씨가 웃으며 그들을 보고 있었다.
“레이디! 같이 놀아요! 신사분도 가만히 있지만 말고! 하하!”
그 말에 린덴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감히! 용서하지 않겠다!
엘리제가 그 기세에 놀라 그를 말렸다.
“저는 괜찮아요.”
“너는 여기에 가만히 있어라.”
“네?”
“내가 복수를 해주마.”
“무, 무슨?”
그렇게 공화국군을 벌벌 떨게 하던 공제가 자신의 그녀를 위해 나섰다.
양손에 토마토를 들고.
퍼억! 퍼억!
순식간에 얼굴에 토마토를 얻어맞은 턱수염 아저씨가 꽥하고 쓰러졌다.
엘리제가 더듬더듬 말했다.
“저, 전하. 그거 방금 토마토에 초상 능력?”
“착각이다.”
“하지만 분명…….”
“착.각.이다.”
강하게 강조하는 린덴의 말에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초상 능력이었는데…….
“와아! 저기도 던져라!”
“엉클의 복수를 하자!”
우군이 쓰러진 것을 목격한 시민들이 우르르 엘리제와 린덴에게 달려들었다.
“꺄악!”
엘리제는 놀라 비명을 질렀고, 린덴은 코웃음 쳤다.
흥. 어딜 감히!
그렇게 세계 최강국 브리티아의 황태자는 그녀를 위해 토마토 개판 싸움을 하였다. 치사하게 몰래몰래 초상 능력까지 사용하면서.
그리고 30분 뒤.
땅!
징소리가 울리며 축제의 끝을 알렸다.
“끝났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와아!”
시민들이 토마토를 허공에 집어 던지며 함성을 질렀다.
엘리제는 입을 벌리고 린덴을 바라봤다.
“저, 전하.”
“왜?”
조각보다도 더 아름답던 그의 얼굴은 토마토 범벅으로 변해 있었다.
얼굴뿐이겠는가? 걸치고 있던 검은 신사 정장 전체가 빨갰다. 토마토로 샤워한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엘리제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토마토였다.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는 잠시 서로의 추한 몰골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쿡쿡.”
“큭.”
서로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은 점점 커졌다.
“하하. 아. 하하.”
엘리제는 아예 배꼽을 잡고 웃었고, 린덴도 입술을 실룩샐룩했다.
그렇게 케인즈 시의 축제가 끝났다.
함께해서 더욱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호텔로 돌아온 그들은 말끔히 몸을 씻었다. 옷을 갈아입고, 맛있는 식사를 하니 어느덧 달이 떠오른 밤이 되었다.
‘벌써 하루가 지나갔구나.’
엘리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축제의 여운이 남아 있어서일까? 시간이 늦었지만 이대로 하루를 마감하기 아쉬웠다.
그래서 그녀는 린덴에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제안을 하였다.
“저…… 전하.”
“왜 그러지?”
“많이 피곤하신가요?”
“괜찮다.”
한편 방에 돌아온 후, 다시 번뇌에 휩싸여 있던 린덴이 답했다.
저 엘리제는 축제 때 긴장을 푼 것인지, 단둘이 한 호텔 방에 있게 됐는데도 어제처럼 떨지 않았다.
‘정말 날 믿는 것인가?’
젠장. 믿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진심으로.
지금도 가운 안으로 비치는 속살이 신경 쓰이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그녀가 진정 원하지 않는 한, 그녀를 가지는 것만은 지켜주어야 한다는 생각과 어차피 부부가 될 것인데, 라는 생각이 끝없이 충돌했다.
괴로워 죽겠다.
그때, 엘리제가 말했다.
“피곤하지 않으시면…… 술이나 한잔하실래요?”
“……!”
린덴이 흠칫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엘리제는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순진한 표정이었다.
“그냥…… 이대로 자기 아쉬워서요. 맛있는 튀김 안주랑 고기 안주도 먹고 싶고요.”
“…….”
그가 답을 않자, 그녀가 조심히 물었다.
“싫으세요? 피곤하면 괜찮고요.”
“……마시자.”
그는 깊은, 정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예쁜 초식동물이 이제는 날 아예 말려 죽이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
이미 다 씻고 침의로 갈아입은 상태라 술은 방에서 룸서비스로 마시기로 했다.
곧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를 위해 호텔 최고의 쉐프가 잔뜩 솜씨를 부린 안주가 방으로 도착했다.
“와아.”
윤기가 흐르는 바삭한 감자튀김, 스테이크 볶음, 오색 창연한 과일 안주 등등.
엘리제는 갖가지 안주를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린덴은 속으로 다시 한숨을 삼켰다.
‘그렇게 귀여운 표정 짓지 말라고. 날 믿지도 말고.’
속살이 비치는 침실 가운을 입고, 저런 표정을 지으면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참으란 것인가? 미칠 것 같은 고문이었다. 더 이상 셀 양이나 별도 없었다.
‘안주 내올 때 바늘이라도 가져오라고 할 걸 그랬나.’
그런 그의 속마음도 모르고 엘리제가 물었다.
“전하는 안 드세요?”
“……먹겠다.”
술은 작은 오크통에 담긴 흑맥주였다.
린덴은 원래 도수가 높은 위스키를 선호했으나, 엘리제가 시원한 맥주를 원하기도 했고, 독한 술을 마시면 도저히 자기 자신을 주체할 자신이 없어서 흑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술은 마실 줄 아나?”
한 잔만 마셔도 곯아떨어지는 친우 렌을 떠올린 린덴이 물었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좋아해?”
“네, 수술 끝나고 마시는 술이 얼마나 맛있는데요.”
이곳에서야 그럴 일이 없었지만, 지구에서는 밤늦게 수술을 끝내고 간단히 한잔하고 헤어지는 일이 많았다.
‘순댓국에 소주가 참 좋았는데. 감자탕도 맛있었고. 이곳에서 순댓국이나 감자탕을 먹을 수는 없겠지?’
지구에서 즐기던 야식을 떠올렸다.
언제 여유가 되면 만드는 방법을 고민해 봐야겠다.
‘전하는 좋아하실까?’
그도 좋아하면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내가 가끔 해주기도 하고.
‘나중에 내가 요리해 주면 싫어하실까? 그러진 않으시겠지?’
그녀는 살짝 얼굴 붉히며 생각했다. 지난번 우크라 산맥에서 탈출할 때 그랬던 것처럼 그가 자신이 해주는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때, 린덴이 그녀에게 잔을 내밀며 말했다.
“한 잔 하지.”
“네.”
엘리제는 기분 좋게 맥주를 마셨다.
꿀꺽꿀꺽 잘도 마시는 그녀를 보며 린덴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정말 생각보다 잘 마시는 것 같았다.
“전하는 안 드세요?”
“마실 거다.”
린덴도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켰다.
엘리제는 그가 마시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 웃음에 의아한 표정을 했다.
“왜 웃지?”
“좋아서요.”
“뭐가?”
“그냥 이렇게 둘이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게요.”
축제를 같이 보내며 한층 가까워진 것일까. 엘리제는 한결 편하게 그에게 말했다.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좋군.”
사랑하는 이와 술을 같이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이 번뇌하는 가슴만 아니면 말이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Ps. 원래는 3/1일이라 쉴려고 했는데... 출판사님이 연재하라고 해서 내일도 올라옵니다.(삐뚫어지고 싶다...)